담마의 거울

‘화 잘 내는 사람’은, 법구경에서의 성냄과 욕 잘하는 형제들의 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3. 23. 11:52

 

화 잘 내는 사람, 법구경에서의 성냄과 욕 잘하는 형제들의 이야기

 

 

 

높은 사람들은 왜 화를 잘 낼까

 

종종 매스컴에서 대통령이 격노 하였다든가 재벌총수가 진노하였다등의 표현을 사용 한다. 어느 표현이든지 화를 내었다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 화를 내는 정도가 어느 정도 크냐 적냐의 차이일 뿐이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화를 자주 낸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언론에서는 격노’ ‘진노’ ‘대노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 함으로서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회사나 단체의 장들은 성질이 급하다고 한다. 특히 자기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이나 보스들에게 있어서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마치 화를 잘 내는 것이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이다.

 

성질이 급하다는 것은 화를 잘 낸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과시 할 수 있는 곳이 회의 장소이다. 대노하고 격노하고 진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 하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은 화낼 대상이 별로 없다. 누군가 화를 받아 줄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화를 낼 대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화풀이를 하게 마련이다. 부모와 갈등, 부부와의 갈등, 자식과의 갈등이 모두 화를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화를 내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화를 발산 하는 순간 모든 관계는 다 끊어 진다. 수십년 쌓은 단골도 화를 한번 냄으로써 다시는 주문하지 않을 것이고, 또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여 원수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성냄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더불어 가장 피해야 할 독이라고 불교에서는 입이 닳도록 말해져 왔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대로 분노를 발산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또 한 부류는 수양이 덜 되고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일 것이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전혀 모르고 화를 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 간다고 하는데 이 중 가장 드러나기 쉬운 것이 성내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사람 됨됨이를 아는 척도가  화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티벳의 속담에서 저 사람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가 가장 큰 욕이라고 한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화가 났을 때 또는 화내는 사람을 볼 때 부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여러 경전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경전이 법구경이다. 법구경에 여러 주제가 있는데 그 중 (Anger)’에 대한 주제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법구경을 늘 지니고 다니면서 본다고 한다. 포켓에 집어 넣고 다닐 수 있는 소책자 형식으로 된 법구경인데, 마음이 심란 할 때, 분노에 쌓였을 때 늘 열어 본다는 것이다. 열어 볼 때 순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펼쳐 보이는 대로 읽는 다고 한다.

 

요새는 컴퓨터에 저장 하여 놓고 볼 수 도 있다. 파일화된 법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데 약1시간 정도 걸린다. 금강경 독송하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 법구경을 죽 읽다 보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

 

비록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경전이지만 현대인이 읽어도 내용을 공감 하는 이유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법구경 중에 화를 냄, 즉 성냄에 대한 게송을 찾아 보았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

 

 

10 - 133

 

Māvoca pharusa kañci 마오짜 파루상 깐찌

vuttā paivadeyyu ta 웃따 빠띠와데이유 땅

dukkhā hi sārambhakathā 둑카 히 사람바카타

paidaṇḍā phuseyyu ta 빧이단다 푸세이유 땅.

 

사납게 말하지 말라.

사납게 말하는 자는 역습을 당한다.

악의에 찬 말은 실로 둑카의 원인이 되어

마침내 그에게 보복으로 돌아온다.

 

 

사납게 이야기 하는 것이 화내는 것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원수를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화를 내고 나서 나중에 반드시 후회 하게 되어 있다. 성내고 후회하는 것은 괴롭기 그지 없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신체폭력 못지 않은 언어폭력

 

1-3

 

악꼿치 망 아와디 망 Akkochi ma avadhi ma

아지니 망 아하시 메 ajini ma ahāsi me

예 짜 땅 우빠나이한띠 ye ce ta upanayhanti

웨랑 떼상 나 삼마띠 vera tesa na sammati

 

그 사람은 나를 욕했고 나를 때렸다.

그 사람이 나를 굴복시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하여

증오를 품고 있으면

증오는 없어지지 않는다.

 

 

화를 낸다는 것은 언어폭력이다. 이런 언어폭력은 신체폭력 못지 않게 무섭다. 폭력을 당하면 누구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어 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마구 쏘아 붙여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은 대체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상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하여 굴복 시켰더라도 증오는 남는 다는 것이다.

 

 

눈물을 흘렸다면

 

 

5 - 67

 

Na ta kamma kata sādhu 나 땅 깜망 까당 사두

ya katvā anutappati 양 까뜨와 아누땁빠띠

yassa assumukho roda 야싸 아쑤무코 루당

vipāka paisevati. 위빠깡 빠띠세와띠.

 

어떤 행동의 결과가

눈물이요 후회였다면

이런 행동은 결코

옳지 않다.

 

 

화를 내어 상대방을 굴복 시켰더라도 상대방이 증오나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괴로운 일이다. 순간적인 화를 못 참아 발산 하였으나 그 화가 진정되어 조용한 곳에서 있을 때 돌이켜 보면 반드시 후회 하게 되어 있다. 그런 후회할 짖을 하였다면 그 행동은 결코 옳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12 - 161

 

Attanā hi kata pāpa 앗따나 히 까땅 빠빵

attaja attasambhava 앗따장 앗따삼바왕

abhimatthati dummedha 아버맛타띠 둠메당

vajirava'smamaya mani. 와지랑와스마마이양 만잉

 

자기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는 자기가 받는다.

그 악행은 자기가 저지른 것이기에.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저지른 악행으로 자기를 파멸시킨다,

마치 금강석이 다른 보석을 깎듯이.

 

 

화를 내는 것은 악행이다. 천수경에 진애중죄금일참회라는 문구가 있듯이 화를 내는 것은 악업을 짖는 것이다. 그 것도 매우 무거운 중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 악행의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악행을 즉각 받을 수 도 있고 죽어서 내생에 악처에 태어나는 것으로도 받을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화를 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 된다는 것이다. 화를 내고 난 이후에 느끼는 감정이 바로 지옥이고 파멸처라 볼 수 있다.

 

 

어리석은자와 함께 한다는 것

 

 

15 - 207

 

Bālasagatacārīhi 발라상가따짜리히

dīghamaddhāna socati 디가맛다나 소짜띠

dukkho bālehi savāso 둑코 벨레히 상와소

amitteneva sabbadā 아밋떼네와 삽바나

dhīro ca sukhasavāso 디로 짜 수카상와소

ñātīnava samāgamo. 냐띠낭와 사마가모.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기란

오랜 날을 두고 슬프고 괴로운 일.

어리석은 자와 사귀는 것은 둑카,

그것은 마치 원수과 살아가는 것과 같으며

지혜로운 사람과 사귀는 것은 즐거움

친척들과 함께 살아감과 갔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욕심부리고 성내는 것은 잘 드러난다. 그 중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성내는 것이다.

 

욕심은 끌어 당기려 하고, 성내는 것은 밀쳐 내는 것을 말한다. 서로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동시에 욕심내면서 성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잘 드러나지 않고 성내고 욕심을 내어야만 어리석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를 자주 잘 내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다는 것은 무척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23 - 330

 

Ekassa carita seyyo 에까싸 짜리땅 세이요

natthi bāle sahāyatā 낫티 발레 사하야따

eko care na ca pāpāni kayirā 에꼬 짜레 나 짜 빠바니 까이라

appossukko mātaga'raññeve nāge. 압뽀쑥꼬 마땅가란녜와 나고.

 

차라리 홀로 살아가라.

어리석은 자와는 벗할 수 없는 것.

저 마땅가 코끼리가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가듯

홀로 살며 악을 행하지 않고

집착 없이 살아가라.

 

 

어리석은 자들과 함께 살 바에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이다. 성내는 사람과 함께 살다 보면 그 성냄을 받아 주어야 하고, 또 그 성냄으로 인하여 성을 내었다면 불선업을 지을 수 밖에 없다. 화가 화를 부르듯이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살아 보았자 전혀 이득이 없음을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사느니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불선업을 짖지 않는 길인지 모른다.

 

 

재산과 아내와 자녀에 얽매여서

 

 

24 - 345

 

Na ta dalha bandhanamāhu dhīrā 나 땅 달항 반다나마후 디라

yadāyasa dārujapabbajañca 야다야상 다루자빱바잔짜

sārattarattā maikuṇḍalesu 사랏따랏따 마니꾼달레수

puttesu dāresu ca yā apekkhā. 뿥떼수 다레수 짜 야 아뻭카.

 

지혜로운 사람은 말한다.

나무와 쇠사슬의 얽매임은

차라리 강한 것이 아니라고

재산과 아내와 자녀, 그리고

보석과 패물들의 얽매임이 훨씬 더 강하기에.

 

 

화를 잘내는 어리석은 사람과 사는 것이 고통이라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나을 지 모르지만,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 얽매임 정도가 쇠사슬에 비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단 얽매임이 아내와 자녀 같은 가족 뿐일까. 보석과 패물과 같은 재산도 얽매임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정생활은 더욱 괴로운 일

 

 

21 - 302

 

Duppabbajja durabhirama 둡빱밧장 두라비라망

durāvāsā gharā dukhā 두라와사 가라 둑카

dukkho'samānasavāso 둑코 사마나상와소

dukkhānupatitaddhagū 둑카누빠띠딷다구

tasmā na caddhagū siyā 따스마 나 짣다구 시야

na ca dukkhānupatito siyā 나 짜 둑카누빠띠또 시야

 

빅쿠가 되기는 어려운 일

빅쿠가 되었어도 수행하여 행복하기는 어려운 일.

어려운 가정생활은 더욱 괴로운 일

마음이 같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기는 괴로운 일.

생사윤회는 끝없는 둑카의 연속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벗어나라,

둑카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청정도론에서 비구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자라고 하였다. 부처님도 전생에 7번정도 밖에 비구가 되지 못하였는데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게 비구가 되기 매우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수행을 통하여 완전한 행복을 얻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더 어려운 것은 가정생활이라는 것이다. 그 것도 마음이 같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사는 괴로움은 최악이라는 것이다. 같이 수행하는 도반이 어리석다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결국 집착 때문에

 

 

16 - 214

 

Ratiyā jāyatī soko 라띠야 자야띠 소꼬

ratiyā jāyatī bhayam 라띠야 자야띠 바양

ratiyā vippamuttassa 라띠야 윕빠뭇따싸

natthi soko kuto bhaya 낫티 소꼬 꾸또 바양.

 

집착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집착 때문에 두려움에 일어난다.

집착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은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윤회의 가장 큰 원인 두가지를 들라면 무명과 갈애이다. 그런데 무명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조건지워져 결정 된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업력에 휩쓸려 떠 내려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갈애는 선택이다. 자신이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느낌에서 갈애로발전 되는냐 또는 단지 느낌으로끝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 되어 들어 붙으면 집착이 된다. 집착하게 되면 떼어 내지 못하고 업이 생성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집착, 즉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집착에서 기인 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자만심을, 집착을

 

 

17 - 221

 

Kodha jahe vippajaheyya māna 꼬당 자헤 윕빠자헤이야 마낭

sayojana sabbamatikkameyya 상요자낭 삽바마띡까메이야

ta nāmarūpasmimasajjamāna 땅 나마루빠스미마삿자마낭

akiñcana nānupatanti dukkhā. 아낀짜낭 나누빠딴띠 둑카.

 

분노를 포기하라.

자만심을 버려라.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

몸과 마음에 집착이 없는 자는

고통의 불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갈애와 집착이다. 그런 밑바탕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어리석음이 깔려 있고, 그 어리석음이 표출 하는 것이 분노이다. 따라서 분노는 어리석음의 표출이라 볼 수 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상대방을 얕보고 깔보기 때문에 내 뱉어 버리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런데 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 알고 보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탐욕스럽고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잘나고 아는 체 하는 자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욕심 많고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욕심내고 화를 내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화로 인하여 후회하고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화를 낼 마음이 나올까.

 

 

욕잘하는 형제들의 이야기에서

 

 

26 - 399

 

Akkosa vadhabandhañca 악꼬상 와다반단짜

aduṭṭho yo titikkhati 아둗호 요 띠띄카띠

khantībala balānīka 칸띠발랑 발라니깡

tamaha brūmi brāhmaa 따마항 브루미 브라흐만앙

 

그는 꾸짖음 욕설 결발 매질을

착한 마음과 용서로 견디고 버티어

인욕의 힘이 강하기가 잘 무장된 병사와 같다.

나는 그를 브라흐마나라 부른다.

 

 

법구경은 단순한 게송의 나열이 아니라 그 게송의 의미를 설명하는 인연담이 있다. 399번 게송 역시 전해져 오는 인연담이 있는데 화내는 이야기와 관련 된 것이다.

 

거해스님이 번역한 법구경에 욕잘하는 형제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악꼬사라는 사람에게는 바랏와자라는 이름의 형과 다난자야니라는 이름의 형수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아우가 있었다. 그의 형수인 다난자야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한 사람이었다. 이재가 여신자는 누가 자기 몸에 손을 대거나, 재채기를 할 때, 그리고 놀랐을 떄는 큰 숨을 몰아쉬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외는 습관이 있었다.

「나모닷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존귀하신 성자시며 아라한이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은 자기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욕을 잘했고, 또 부처님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자기 아내가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전하는 중 자주 넘어지면서, 그때마다 나모닷싸 운운을 외자 그는 매우 화가 났다.

「이 여편네가 시도 떄도 없이 넘어지기만 하면 저놈의 소리를 외워 대는군!

그는 욕 잘하는 사람답게 아내에게 퍼부었다.

「이년아! 나는 네가 존경하는 고따마를 찾아가 욕을 퍼부어 주고 오겠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역시 소따빳띠의 경지에 오른 신자답게 아주 의연하고 침착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세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가보세요. 그렇지만 여보,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분을 화나게 하거나, 논쟁을 벌여 이기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걸요. 어떻든간에 이왕 가실 거라면 가셔서 한 가지라도 쓸모있는 질문을 해서 뭐든지 배워 오시기나 하세요.

 

바랏와자는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갔다. 그는 부처님께 인사도 올리지 않고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버티고 서서 이렇게 물었다.

 

 

이 인연담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과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 수 있다.

 

욕잘하는 남편 과 함께 사는 여인은 수다원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욕을 하고 성질 부리고 구박할 때 마다 맞대응을 하지 않고 항상나모닷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했다는 것이다.

 

그런 남편이 부처님을 찾아 가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부수어야

초연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버려야만

슬픔이 없겠습니까?

 

나에게 단 한 가지

마땅히 파괴해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고따마 사마나여, 무엇을 파괴하라고 하시겠습니까?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청할 정도이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 욕심 많고 화를 잘내는 사람들은 자기 잘 난 맛에 살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내 뜻대로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남편이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 하였다.

 

 

그로 하여금 화내는 마음을 파괴하도록 하여라.

그러면 그는 초연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으리라.

그로 하여금 화내는 마음을 부수도록 하여라.

그러면 그에게는 더 이사의 슬픔이 없으리라.

 

브라흐민이여, 인간을 해치는 독의 근원은 화내는 마음이니라.

그리고 그것을 참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성현들은 화내는 마음을 파괴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칭찬을 주시느니라.

화내는 마음이 완전히 파괴되고 나면

더 이상의 슬픔은 없느니라.

 

 

가장 먼저 화를 내지 말라고 부처님은 이야기 한다. 탐진치 삼독 중에 가장 겉으로 드러나 보여지기 쉬운 것이 화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화를 다스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화내는 것은 인간을 해치는 근원이라고 말한다. 화를 냄으로서 괴로움과 슬픔이 시작 된다는 것이다.

 

화를 받지 않는다면

 

화를 내지 않고도 살 수 있을까.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과연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수행을 오래한 성인군자도 화를 한번 내면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들은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인연담에서 화를 잘 내는 형제들이 잔뜩 화를 내었지만 부처님은 그 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하였다.

 

 

「브라흐민이여, 예를 들어 그대에게 찾아온 손님들이 있어 그대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손도 대지 않은 채 되돌아왔다면 그 음식은 누구 것이 되겠는가?

「그야 내 것이 되겠지요.

 

 

화를 음식에 비유한 것이다. 결국 화를 받지 않는다면 그 화는 화를 낸 자신에게 되돌아 간다는 이야기이다.

 

화 잘 내는 사람

 

상대가 화를 낸다면 나 때문에 화를 낸다고 볼 수 없다. 그 사람 자신의 문제로 화를 내기 때문이다. 그 화를 내는 마음 자체는 불선한 행위이다. 그리고 불선업을 짖는 것이다. 그 화를 받아서 나도 화를 내면 역시 불선업을 짖게 될 것이다.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은 그의 축적된 성향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의 화를 굳이 받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화를 낼 때 반응 하는 것은 아만심이 강하고, 내가 있다는 견해 즉, ‘유신견이 있기 때문이다. 인연담에 나오는 욕잘하는 남편의 부인이 화를 내지 않고, 그 때 마다 나모닷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하는 것도, 부처님이 화 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은 것도, 유신견을 극복 했기 때문이다. 유신견이 극복 되어야만 수다원이 되어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소멸이라 한다.  탐진치 3독을 소멸하려면 가장 잘 드러난 성냄부터 부수어야 할 것이다. 티벳에서 가장 큰 욕이 화 잘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화를 잘 낸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냄을 말한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라는 것이다.

 

 

 

 

법구경 Wallpaper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wallpaper_eng.html

 

 

 

2010-03-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