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폭류(ogha)에 휩쓸려, 욕망의 꽃과 번뇌의 꽃다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6. 14. 09:06

 

폭류(ogha)에 휩쓸려, 욕망의 꽃과 번뇌의 꽃다발

 

 

 

 

 

 

 

 

불교를 믿는 목적은

 

불교를 믿는 목적이 무엇일까. 어떤 이는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보시함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또 열심히 계를 지켜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 가고자 한다. 또 정토신앙을 믿는 불자라면 극락왕생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그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또 어떤 이는 성불하기를 바란다. 내 안의 불성(佛性)’을 찾아 본래의 깨끗한 마음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불자들은 자신이 신봉 하는 신앙에 따라 추구 하는 목적이 각각 다르다.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 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의 경우는 어떠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윤회의 종식에 있다. 더 이상 나고 죽는 일이 없도록 수행하는 것이다. 이번 생에 윤회가 끝나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 생을 기약 한다. 그래서 이번 생에 최소한 발판이라도 마련 해 놓고자 한다. 그래서 내생을 기약 하는 것이다.

 

불교가법의 종교인 이유

 

극락왕생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윤회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불교는 다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출발부터 다른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출발부터 다르니 목표가 다름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윤회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불교라면 그에 합당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수행방법이 불교의 창시자인 사꺄무니 붓다가 개척한 이래 면면히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하시던 대로 따라 하면 윤회의 종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내용을 설하였을까.

 

초기불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자라면 두말 없이 사성제라고 말할 것이다. 고통과 고통이 일어 나는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설한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네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그런 사성제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어느 초기불교 카페의 비구니 스님은 말하기를 일어나고 사라짐이라고 하였다.

 

모든 법은 이와 같이 일어 났다가 사라진다는 일반적인 성질(共相)을 가지고 있다. 그런 법은 또한 각자 고유의 성질(自相)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71법이라 한다. 즉 마음 1, 마음부수 52, 구체적 물질 18개이다. 여기에 열반 1, 추상적인 물질 10을 더하면 총 82법이 되는 데 이를 구경법이라 한다.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근본법이라는 것이다.

 

테라와다가 법의 종교라는 이유가 바로 구경법에 대하여 잘 설명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듯한 법체계를 만들어 놓았을까. 그렇게 한 이유는 윤회의 종식으로 가기 위해서 그런 법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법체계가 단지 이론으로 끝났다면 하나의 훌륭한 담론이 될 수 있지만, 동아시아 불교의 전통과 다른 점은 이론과 수행이 겸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교리와 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이고, 위빠사나가 아비담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들

 

이렇게 철저하게 교리와 수행이 함께 가는 테라와다 전통에서 가장 경계해야 될 마음은 어떤 것일까.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이 일어 난다. 그 때 마음이 일어 나도록 도와 주는 마음의 작용을 마음부수라 한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항상 따라다니는 마음이라고 해서 또 마음부수라 한다. 그런 마음부수는 총 52가지가 있다고 초기불교에서는 말한다. 그 중 인간을 오염시키는 마음이 있는데 14가지 해로운 마음부수이다.  

 

해로운 마음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 올리게 되는 것이 탐진치이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야말로 중생을 계속 윤회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 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를 탐진치의 소멸에 두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탐진치가 오염원에서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일까.

 

불교의례 중에 사홍서원이 있다. 보통 법회가 끝날 때 독송 된다. 그 네가지 커다란 원중번뇌가 있다. 번뇌를 다 끊겠다는 서원이다. 이때 번뇌는 무엇을 말할까. 초기불교의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명확히 규정 해 놓았다.

 

번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찌들게 하는 오염원이다. 그런 오염원은 번뇌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가 있다. 그 오염원들과 마음부수의 관계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오염원들과 마음부수들과의 관계

오염원

마음부수

번뇌

폭류

속박

매듭

취착

장애

잠재

성향

족쇄

오염원

합계

1

탐욕

1

1

1

1

1

1

1

1

1

9

2

사견

1

1

1

1

1

 

1

1

1

8

3

미혹

1

1

1

 

 

1

1

1

1

7

4

성냄

 

 

 

1

 

1

1

1

1

5

5

의심

 

 

 

 

 

1

1

1

1

4

6

자만

 

 

 

 

 

 

1

1

1

3

7

들뜸

 

 

 

 

 

1

 

1

1

3

8

해태

 

 

 

 

 

1

 

 

1

2

9

후회

 

 

 

 

 

1

 

 

 

1

10

혼침

 

 

 

 

 

1

 

 

 

1

11

양심없음

 

 

 

 

 

 

 

 

1

1

12

수치심없음

 

 

 

 

 

 

 

 

1

1

13

질투

 

 

 

 

 

 

 

1

 

1

14

인색

 

 

 

 

 

 

 

1

 

1

 

개수

3

3

3

3

2

8

6

9

10

47

출처 ; 아비담마 길라잡이

작성; 진흙속의연꽃

 

 

탐견치(貪見癡)라 불려야

 

표를 보면 탐욕, 사견, 미혹등 해로운 마음부수가 14가지이다. 또 번뇌, 폭류, 속박등 오염원이 9가지 인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해로운 마음부수를 악의 꽃으로 비유 하고, 오염원을 악의 꽃다발로 표현 하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번뇌라는 악의 꽃다발은 탐욕 사견 미혹이라는 악의 꽃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표를 살펴 보면 9가지의 악의 꽃다발 중에 빠짐 없이 들어 가는 악의 꽃이 있다. 바로 탐욕이라는 악의 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악의 꽃이 사견(邪見)으로서 8개이고, 세번째가 미혹(어리석음)으로서 7개이다.

 

이렇게 1위부터 3위까지 차지 하는 악의 꽃이 탐욕과 사견과 미혹이다. 이런 순서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어 엎는다. 이제까지 탐진치의 순서로 알고 있었는데 (성냄)’ 4위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하게 이 도표만 가지고 논한다면 탐진치(貪嗔癡)순이 아니라 탐견치(貪見癡)’순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탐욕이라는 악의 꽃

 

번뇌, 폭류, 속박등 9가지 오염원의 꽃다발에 빠짐 없이 들어가 있는 탐욕이라는 악의 꽃은 어떤 것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이라는 악의 꽃을 감각적욕망으로 본다. 더 넓게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감각적욕망은 어떻게 발생 되는 것일까.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감각적 접촉()’을 피할 수 없다. 눈이 있다면 볼 수 밖에 없고, 귀가 있다면 들을 수 밖에 없다. 보지 않고 싶다고 보지 않을 수 없고, 듣고 싶지 않다고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감각접촉은 총 6개의 감각기관이 6개의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이루어 진다.

 

감각접촉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일어 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반드시 느낌()’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 이렇게 세가지로 나뉘어 진다.

       

번뇌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느낌을 받아 들였을 때 번뇌가 일어 난다는 것이다. 어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본다.  

 

 

첫째, 감각적 욕망의 번뇌,

둘째, 존재의 번뇌,

셋째, 사견의 번뇌,

넷쨰, 무명의 번뇌

 

 

여기서 첫번째인 감각적번뇌와 두번째인 존재의 번뇌를 합하여 탐욕이라는 해로운 마음의 꽃으로 보는 것이다.  

 

보통 감각적 욕망의 번뇌는 감각적 욕망으로 향하게 하고, 존재의 번뇌는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따라서 탐욕이라는 꽃은 감각적욕망을 자극하여 존재를 지속하게 해 주는 것이다.

 

만일 탐욕이라는 꽃을 꺽어 버린다면, 존재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과 해탈로 가는 지름길이라고들 말한다.

 

폭류에 휩쓸려

 

탐욕과 사견과 번뇌의 꽃으로 이루어진 꽃다발이 번뇌이다. 번뇌란 어떤 뜻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번뇌는 빠알리어 아사와(Āsava)’의 의역이다.

 

아사와는 고름이나 악취가 나는 무언가가 흘러 나온다라는 뜻이다. 흘러 나오는 이유는 감각적 욕망과 사견과 미혹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더 흘러나옴이 많아 진다면 점차 흐르는 물이 될 것이다.  

감각적욕망을 제어 하지 못하면 또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번뇌는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강물이 되어 거침 없이 흘러 갈 것이다. 거침 없이 흘러 가는 강물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그런 강물에 빠져 버리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마치 홍수가 났을 때 닭이나 돼지가 휩쓸려 가는 것을 알면서도 강물과 함께 휩쓸려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탐욕과 사견과 미혹으로 인하여 휩쓸려 가는 것을 아비담마 역경가는 폭류(暴流)’로 표현 하였다. 번뇌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을 말한다.

 

폭류의 빠알리어는 오가(ogha)이다. ‘실어 가 버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폭류는 쉽게 건널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폭류에 휩쓸려 버리기 때문에 윤회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피치 못할 감각접촉()으로 인하여, 감각적욕망에 대한 느낌()을 받았을 때, 느낌은 갈애()로 발전하고,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어 들러 붙게 되는 취착()으로 발전 한다. 그래서 나란 존재()가 형성 되어 가는데, 매 찰라 마다 반복 되는 거대한 용틀임에 대부분 사람들은 폭류에 휩쓸려 버린다는 것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막연하게 알면서도 그대로 행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를 축적된 성향으로 본다.

 

도둑이 도둑질이 나쁜짓줄 알면서도 도둑질을 하는 이유가 바로 전생에서부터 형성된 축적된 성향에 기인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의 성향 또한 전생의 결과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감각적욕망의 폭류에 휩쓸려 알면서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윤회의 바다로 떠내려 가는 것이다.

 

번뇌와 폭류등 전 오염원에 걸쳐서 빠짐 없이 등장 하는 악의 꽃인 탐욕의 특징은 거머쥐려는 속성이 있다. 이런 속성을 다른 말로 표현 하면 오욕락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 하는 오욕락은 식욕, 색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으로서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 이성과의 거친사랑, 안락하고 보드라운 잠자리, 고급아파트와 외제차, 사회적 성공등을 위하여 전 생애를 건다.

 

그런데 이들 오욕락을 추구 하면 할수록 점점 폭류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가지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져 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중에 감각적 욕망을 추구 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서 언급한 즐거운 느낌이 곧 괴로운 것이다라는 것과 똑 같은 말이다.

 

오욕락을 추구 하면 할수록 왜 괴로워 질까. 그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법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탐욕이라는 구경법 또한 예외가 아니다.

 

폭류를 건너려면

 

이런 폭류를 건너 갈 수 없을까.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명확하게 제시 하였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계를 갖추고 통찰지가 있고 깊이 삼매에 들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근면한 자는
건너기 어려운 폭류를 건넌다.(S.i.53)

 

 

계정혜3학을 닦아야만 폭류에 휩쓸리지 않고 건너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통찰지가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고난 것을 말한다. 이를 생이지(生而知)라 한다. 과거 전생에 수행한 공덕의 소산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흔들림 없이 계에 굳게 머문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찰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요구 하고 있다.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학이지(學而知)라 하는데 수행을 통하여 습관화 하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할 때 만이

 

감각적욕망이라는 폭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계정혜 삼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하여 마음이 일어 났을 때 느낌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 되면 이미 늦다. 갈애로 발전 되기 전에 느낌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괴로운 느낌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 “모든 느낌은 괴로운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모든 느낌은 단지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지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할 때 만이 번뇌가 뿌리 뽑히고, 폭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0-06-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