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노랑가사(황색가사)와 스님상, 법구경 9-10 데와닷따 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6. 20. 11:18

 

노랑가사(황색가사)와 스님상, 법구경 9-10 데와닷따 이야기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상()을 가지고 있다. 상은 일종의 이미지로서 그 사람의 모습과 됨됨이를 즉각 떠 올리게 만든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까 봐

 

그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떠 올렸을 때 좋은 이미지도 있지만 나쁜 이미지도 있다. 그저 그래서 판단하기 어려운 이미지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급적 좋은 이미지를 형성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집에 가면 가장으로서 상이 있고, 직장에 가면 책임자로서의 상이 있다. 그런데 그런 상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자아와 유리되어 정신적인 건강이 깨질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개 이상의 가면을 쓰고 있다. 집에서는 아버지라는 가면 또는 어머니라는 가면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서는 과장, 또는 사장이라는 가면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면을 떨어뜨렸을 때,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다.

 

심리학에서 이런 가면을 페르조나(Persona)’라 한다. 칼 구스타프 융이 사용한 페르조나라는 용어는 초기불교의 용어인 산냐(sañña)’와 매우 유사하다.

 

상을 부수어야 하는 이유

 

빠알리어로 상을 산냐(sañña)라 한다. 어원적으로는 같게 아는 것이라는 뜻으로서 뭉뚱그려인식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름을 붙이는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대상을 받아 들여 개념작용을 일으키고 이름을 붙이는 작용을 산냐라 한다. 이런 상은 격파의 대상이다. 상은 실재가 아닌 관념이기 때문에 열반과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상이 아마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일 것이다. 이런 4상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해석 한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될 수 있다.

 

 

아상은 자아가 있다는 인식이다.

인상은 개아가 있다는 인식이다.

중생상은 중생이 있다는 인식이다.

수자상은 영혼이 있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견해와 더불어 극복 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자아이니, 개아이니, 중생이니, 영혼이니 하는 인식이 강화 되면, 거대한 개념의 구조물인 희론(papañca, 빠빤짜)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상의 척파는 철저하게 내가 있다라는 견해를 부수는 것이다. 이 것은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상아(常我)개념인 ‘아트만’이나, 이 아트만이 우주적으로 설명 되었을 때의 브라만과 같은 ‘자재신’을 인정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상의 타파는 결국 윤회의 주체를 인정 하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므로 고정적인 나는 있을 수 없고, 단지 매순간 생멸 하고, 조건에 따라 상속 하는 연기적 흐름으로서 나(無我)’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 하는 것이다.

 

스님상이 있을 수도

 

지위가 그 사람을 만든 다고 하였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도 지위를 주고 감투를 씌어 놓으면 그럴싸하게 보인다. 군대에서 이등병일 때와 병장일 때의 행동거지가 다르듯이 지위가 올라 가면 갈수록 하나의 상이 형성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지위에 걸 맞게 행동 하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신부가 사제복을 입는 것도 일종의 상을 형성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목사들 또한 다르지 않다.

 

요즘의 목사들은 설교할 때 마치 대학 졸업식장에서 입는 것과 같은 가운을 걸친다. 그렇게 하는 행위도 일종의 목사에 대한 상을 형성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복장을 함으로써 나는 스님이요” “나는 신부요” “나는 목사요라고 하는 상이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의 경우,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로지 깨달음 하나에 매진 하기 위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단지 승복 입은 것 자체를 대단히 여긴다면, 그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하나 더 추가하여 스님상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스님상에 대한 이야기가 법구경의 9번과 10번의 데와닷따(Devadatta) 이야기이다.

 

노랑가사의 의미는

 

데와닷따는 부처님의 사촌형제로 석가족의 숫빠붓다(Suppabuddha)왕과 아미따(Amitā) 왕비의 왕자로 태어났다. 데와닷따라는 이름은 ‘천인(deva)에게 바친(datta)’이란 뜻이다.

 

데와닷따는 소위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 잇찬티카)라 해서 선근이 끊어진 까닭에 구제가 불가능한 사람 또는 성불이 불가능한 사람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게 된 까닭은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고, 교단을 분열 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와닷따가 노랑가사를 입고 계행에 벗어난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법구경 9번과 10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다.

 

노랑가사는 남방테라와다불교의 상징과도 같다. 노랑가사를 입는다는 의미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자신이 기고한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상좌불교는 빠알리 경전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율을 중요시합니다. 노랑 가사 입은 스님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빠알리어로 예불을 하고 빠알리어로 경전을 줄줄 다 외웁니다.

 

 

이 말 뜻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법의 수호자로서 의미도 있고,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생을 다 바친다는 뜻도 있다.

 

 

 

 

스리랑카 비구의 노랑가사

출처 http://www.pbase.com/kaso/lanka

 

 

 

이렇게 노랑가사를 입는 의미가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의미가 큰 것인데, 노랑가사를 입은 것 자체를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은근히 뽐내고 다닌 다면, 그 비구는 분명히 스님상에 걸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빠알리어 법구경

 

 

1-9

Anikkasāvo kāsāva           아닉까사아오 까아사아왕

yo vattha paridahissati       요 왓탕 빠리다힛사띠
Apeto damasaccena           
아뻬또 다마삿쩨나

na so kāsāvamarahati.         나 소 까아사아와마라하띠

 

 

1-10

Yo ca vantakasāvassa        요 짜 완따까사아왓사

sīlesu susamāhito                실레수 수사마아히또
Upeto damasaccena          
우뻬또 다마삿쩨나

sa ve kāsāvamarahati.          사 웨 까아사아와마라하띠

 

 

2. 우리말

 

 

1) 거해스님

 

 

1-9

그가 번회에 싸여 청정치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면

비록 노란색 까사를 입었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 공덕도 없다.

 

 

1-10

그가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엄정하게 계행을 지키며

자기의 감관을 잘 다스려 진실을 말하면

그에게 노란색 까사는 실로 고귀한 것.

 

 

 

2) 석지현스님

 

 

1-9

그 영혼이 순수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탐구의 열정도 없으면서

수행자의 옷을 입고 으스대다니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수행자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

 

 

1-10

그러나 그 영혼이 순수하며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는 사람.

그는 수행자의 옷을 입을 자격이 있다.

 

 

 

3. 영문

 

 

1) Acharya Buddharakkhita

 

 

1-9

Whoever being depraved,

devoid of self-control and truthfulness,

should don the monk's yellow robe,

he surely is not worthy of the robe.

 

 

1-10

But whoever is purged of depravity,

well-established in virtues

and filled with self-control and truthfulness,

he indeed is worthy of the yellow robe.

 

 

2) Thanissaro Bhikkhu

 

 

1-9

He who,     depraved,

                  devoid

           of truthfulness

           & self-control,

puts on the ochre robe,

doesn't deserve the ochre robe.

 

 

1-10

But he who is free

                          of depravity

                      endowed

                          with truthfulness

                          & self-control,

                      well-established

                          in the precepts,

truly deserves the ochre robe.

 

 

5. 한문(法增比丘)

 

 

1-9

人若不離欲,不守持戒律。

不見Sacca理)克己(Dama調御,自制),

不應著袈裟(kasayakasaya雜色衣,糞掃衣。出家眾的衣)。

 

 

1-10

人若離貪欲,善守持戒律,

克己復見,應穿著袈裟。

 

 

6. 일문(西津紘一)

 

 

1-9

心の汚れを溜めんで
  立派な服を着ようとしても
  上
にするだけだから
  立派な服は
  似合わない


1-10
心の汚れを吐き出して
  っているならば
  心をきれいにする人だから
  立派な服が
  よく似合う

 

 

 

7. 인연담

 

 

1) 영어 (Daw Mya Tin)

 

 

The story of Devadatta

 

While residing at the Jetavana monastery in Savatthi, the Buddha uttered Verses (9) and (10) of this book, with reference to Devadatta.

Once the two Chief Disciples, the Venerable Sariputta and the Venerable Maha Moggallana, went from Savatthi to Rajagaha. There, the people of Rajagaha invited them, with their one thousand followers, to a morning meal. on that occasion someone handed over a piece of cloth, worth one hundred thousand, to the organizers of the alms giving ceremony. He instructed them to dispose of it and use the proceeds for the ceremony should there be any shortage of funds, or if there were no such shortage, to offer it to anyone of the bhikkhus they thought fit. It so happened that there was no shortage of anything and the cloth was to be offered to one of the theras. Since the two Chief Disciples visited Rajagaha only occasionally, the cloth was offered to Devadatta, who was a permanent resident of Rajagaha.

Devadatta promptly made the cloth into robes and moved about pompously, wearing them. Then, a certain bhikkhu from Rajagaha came to Savatthi to pay homage to the Buddha, and told him about Devadatta and the robe, made out of cloth worth one hundred thousand. The Buddha them said that it was not the first time that Devadatta was wearing robes that he did not deserve. The Buddha then related the following story.

Devadatta was an elephant hunter in one of his previous existences. At that time, in a certain forest, there lived a large number of elephants. one day, the hunter noticed that these elephants knelt down to the paccekabuddhas* on seeing them. Having observed that, the hunter stole an upper part of a yellow robe and covered his body and hand with it. Then, holding a spear in his hand, he waited for the elephants on their usual route. The elephants came, and taking him for a paccekabuddha fell down on their knees to pay obeisance. They easily fell a prey to the hunter. Thus, one by one, he killed the last elephant in the row each day for many days.

The Bodhisatta (the Buddha-to-be) was then the leader of the herd. Noticing the dwindling number of his followers he decided to investigate and followed his herd at the end of the line. He was alert, and was therefore able to evade the spear. He caught hold of the hunter in his trunk and was about to dash him against the ground, when he saw the yellow robe. Seeing the yellow robe, he desisted and spared the life of the hunter.

The hunter was rebuked for trying to kill under cover of the yellow robe and for commuting such an act of depravity. The hunter clearly did not deserve to put on the yellow robe.

Then the Buddha spoke in verse as follows:

 

 

Verse 9:

He who is not free from taints of moral defilements (kilesas)

and yet dons the yellow robe,

who lacks restraint in his senses

and (speaks not the) truth is unworthy of the yellow robe.

 

 

 

 

Verse 10:

He who has discarded all moral defilements (kilesas),

who is established in moral precepts,

is endowed with restraint and (speaks the) truth is,

indeed, worthy of the yellow robe.

 

 

 

At the end of the discourse, many bhikkhus were established in Sotapatti Fruition.

* paccekabuddha: One who, like the Buddha, is Self-Enlightened in the Four Noble Truths and has uprooted all the moral defilements (kilesas). However, he cannot teach others. Paccekabuddhas appear during the absence of

 

 

2)우리말(진흙속의연꽃)

 

 

데와닷따(Devadatta) 이야기

 

부처님이 사왓띠의 제따와나 승원에 머무르고 계실 때 데와닷따(Devadatta)와 관련된 게송 9번과 10번을 읊으시었다.

 

언젠가 부처님이 아끼는 제자 중에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 받고 있었던 쌍수제자인 사리뿟따(Sariputta)와 마하 목갈라나(Maha Moggallana)가 사왓띠로부터 라자가하(Rajagaha)로 떠났다.

 

거기에서 라자가하 사람들은 아침공양에 천명의 비구를 초청 하였다. 그 중 어떤 이가 십만냥에 해당 되는 값어치의 천을 보시로서 받아 주기를 간청 하였다.

 

그는 이 천을 팔아서 공양 비용을 충당하고, 만약 공양을 준비하는데 돈이 충분할 때에는 이 천으로 가사를 만들어서 이를 입기에 합당한 비구에게 바쳐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양비용은 부족하지 않았으므로 누군가에 옷을 만들어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의 쌍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 목갈라나는 자주 라자가하를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공양을 거절 하였고, 그 대신 라자가하에서 상주 하는 데와닷따에게 가사를 공양하기로 하였다.

 

데와닷따는 매우 신속하게 노랑가사를 주문 하였다. 그 가사가 완성 되자, 그 가사를 입고 점잔을 빼며 돌아다녔다. 그 때 라자가하로부터 사왓띠로 되돌아온 어느 비구가 부처님에게 예배 하면서, 10만냥의 가치가 있는 천으로 가사를 만들어 입은 데와닷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데와닷따가 그런 행위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또한 그런 옷을 입을 만한 가치도 없다고 말씀 하시었다. 그러면서 데와닷따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데와닷따는 수 많은 전생에 있어서 어느 때 코끼리 사냥꾼 이었다. 그 때 어느 숲이 있었는데, 거기에 수 많은 코끼리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사냥꾼은 이들 코끼리들이 *빳쩨까붓다(paccekabuddhas)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목격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장면을 목격하자 그 사냥꾼은 노랑가사의 윗부분을 훔쳐서, 그의 몸을 싸고, 환심을 사기로 하였다.

 

그는 한손에 창을 들고, 코끼리가 다니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그 코끼리들이  노랑가사를 보자  빳쩨까붓다에 했던 것처럼 공손하게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였다. 그들 꼬끼리들은 너무도 쉽게 사냥꾼의 먹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씩 코끼리들을 잡았는데 여러 날에 걸쳐서 매일 되풀이 되었다.

 

보살(붓다 이전)은 그 때 코끼리떼의 우두머리이었다. 자꾸 동료들의 숫자가 줄어 들자, 그는 조사하게 되었고, 남은 코끼리 떼가 있는 마지막 줄에 따라 붙었다.

 

사냥꾼이 창을 던지자, 그는 방심하지 않고, 그 창을 피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코로 그 사냥꾼을 감아 올려, 땅바닥에 내 던져 버렸다. 그 때 사냥꾼의 노랑가사가 벗겨졌다. 그 거룩한 노랑가사를 보자 그 꼬끼리 대장은 사냥꾼을 죽이기를 단념하고 대신에 용서해 주었다.

 

그 사냥꾼이 노랑가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악행에 대한 죽음을 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가 번회에 싸여 청정치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면

비록 노란색 까사를 입었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 공덕도 없다.

 

그가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엄정하게 계행을 지키며

자기의 감관을 잘 다스려 진실을 말하면

그에게 노란색 까사는 실로 고귀한 것.

 

 

이 설법후에 많은 비구들이 수다원과를 얻었다.

 

 

*빳쩨까붓다(paccekabuddhas)

 

붓다와 같이 사성제를 스스로 깨우쳤고, 모든 오염원이 뿌리 뽑힌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교화 하지 못한다. 빳쩨까붓다는 부처님법이 없는 시기에 출현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로 벽지불. 독각(獨覺). 연각(緣覺)이라 한다.

 

 

 

 

 

 

 

2010-06-20

진흙속의연꽃

 

법구경 9-10 데와닷따 이야기.doc
0.0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