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사지 비구의 위의(威儀)와 알아차림, 법구경 11-12 사리뿟따 장로이야기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 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깨닫지 않은 사람이 보아도 깨달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은 속인과 달리, 무언가 다른 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형상 나타나 보이는 깨달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부처님이 점차 가까이 다가 오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위 없는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고 난 뒤에 고민 하였다. 과연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누가 이해 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이었다. 이렇게 망설이다가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 줄 것 같았다. 법을 잘 설명 하면 알아 들을 수 있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중생을 교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과 같이 생활 하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들이라면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이해 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만일 이들이 알아 듣는다면 자신이 깨달은 바가 틀림 없을 것이라 생각 한 것이다.
부처님이 다섯 수행자들에게 다가 가자, 그들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 고행수행을 포기한 그를 타락한 수행자로 간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따마를 보면 “ 본체 만체 하고 인사도 하지 말자, 그리고 발우도 받지 말고,발 앃을 물도 내 주지 말자” 라고 서로 약속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이 점차 가까이 다가 오자, 그 위엄 있는 엄숙한 태도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는 발우를 받고, 또 어떤 이는 대야를 가져 오고, 또 어떤 이는 발 앃을 물을 가져 왔다.
부처님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위의(威儀)와 위신력(威信力), 바로 이런 점이 깨달은 사람의 외형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닐까.
나라시하가타(Narasiha Gatha)에서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다. 그 것도 이제 까지 볼 수 없었던 위 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죽음을 초월한 ‘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의 모습은 흔히 32상으로 표현 된다.
부처만이 갖는 다는 신체적인 특징은 테라와다 전통에서 재가불자들에게 널리 애송 된다는 나라시하가타(Narasiha Gatha, 사자게)에 잘 표현 되어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Punna sasañka nibho mukha vanno 뿐나 사상까 니보오 무카 완노
Deva narâna piyo naranâgo 데와 나라아나 삐요오 나라 나아고
Matta gajinda vilâsita gâmī 맛따가진다 위라아시따 가아미이
Esa hi tuyha pitâ narasīho 에사 히 뚜여하 삐따아 나라 시이호
얼굴 빛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사랑받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는 코끼리의 제왕과 같으시니 인간 가운데 코끼리,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나라시하가타 3번 게송)
나라시하가타는 부처님의 신체적인 특징과 고결한 덕성을 백수의 왕인 사자에 빗대어 노래 하고 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부처님 만이 갖는 다는 32상을 설명 하고 있는데, 게송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질 정도로 위의와 위신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 하고 있다.
앗사지 비구에게 감동한 것은
그렇다면 한 번 쳐다 보기만 해도 감화 되는 위의와 위신력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그런 단서를 법구경의 인연담에서 발견 하였다.
법구경의 11번과 12번 게송은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장로 이야기이다. 부처님의 두 쌍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가 교단에 들어 오기 전에 사리뿟따는 우연히 앗사지(Assaji) 비구를 만났다. 앗사지 비구는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제자 중에 가장 막내격에 속 했다.
청년 사리뿟따가 앗사지 비구에게 감동한 것은 그의 ‘위의’ 때문이었다. 점잫고 위엄있게, 자신의 정신을 걸음걸이에 잘 집중 시키면서 흔들림 없는 태도로 걸어 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것이다. 경행중에 있던 앗사지 비구는 한 순간도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이 위의 있었던 것은 한 순간도 알아차림을 놓고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초월 하는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가는 지름길 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이 왜 중요할까.
8만4천법문을 한마디로 줄이면
미얀마에서 수행한 도이거사의 수행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흔히들 8만4천 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요, 그것을 더 줄이면 8정도요, 또 줄이면 삼학(三學)이며, 삼학을 줄이면 대승에서는 ‘자(慈)’ 자 하나나 ‘심(心)’자 하나가 남는다고 하는데, 테라와다에서는 ‘알아차림’ 하나 남는다고 한다.
(도이 거사의 미얀마 수행기6, http://www.mediabuddha.net/print_paper.php?number=3689)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8만4천법문이 ‘마음’ 하나로 귀결 되는 것에 비하여,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알아차림(sati, 사띠)’으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테라와다 전통에서 알아차림이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37조도품을 줄이면 8정도이고, 8정도를 세글자로 요약한다면
팔정도가 삼학(三學)인 이유
먼저 팔정도를 펼쳐 보면 다음과 같다.
팔정도 요약
용 어 |
우리말 |
빠알리어 |
영 어 |
구 분 |
팔정도(八正道) |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의 각지 |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
Noble Eightfold Path |
|
정견 (正見) |
바르게 보기 |
sammā-diṭṭhi |
Right view |
혜(慧) Paññā(Pali) Wisdom(영) |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기 |
samma sankappa |
Right intention | |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기 |
sammā-vācā |
Right speech |
계(戒) Sīla(Pali) Ethical conduct(영) |
정업 (正業) |
바르게 행동하기 |
sammā-kammanta |
Right action | |
정명 (正命) |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기 |
sammā-ājīva |
Right livelihood | |
정정진 (正精進) |
바르게 정진하기 |
sammā-vāyāma |
Right effort |
정(定) Samādhi(Pali) Concentration(영) |
정념 (正念) |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생각하기 |
sammā-sati |
Right mindfulness | |
정정 (正定) |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
sammā-samādhi |
Right concentration |
팔정도에 한 결 같이 바를 정(正)자가 들어 가 있다. 영어로는 Right, 빠알리어로는 삼마(Samma)가 들어 가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삼마는 바르다라는 뜻 외에, ‘전체’로서 뜻과 ‘평등’하다라는 뜻을 함께 내포 하고 있다. 즉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 차릴 때 바르고 정확하게, 전부 알아 차려야 하고, 또한 균형(평등)있게 알아 차려야 하는 것이 삼마(samma)의 바른 뜻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올바른 견해(정견)을 가질 수 있어서 사성제를 알 수 있는 지혜와, 대상을 바르게 겨냥(정사유)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 알아차림이 지혜(慧, Paññā)라는 것이다.
알아차림을 지속 할 때(정념)는 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 만 가능하다.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을 구분 하는 것이 정진의 힘(정정진)이다. 이렇게 대상을 분리하여 ‘찰나집중(정정)’을 함으로써 알아차림을 지속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따라서 알아차림은 바른 집중인 삼매(定, Samādhi)인 것이다.
알아차림이 계율(戒)인 이유는
다음으로 알아차림이 계(戒)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bbs불교방송에서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알아차릴 때는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선한 상태가 되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도둑이 들어와서 나를 지배합니다.
그러면 나는 결코 선한 것으로 보호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막아서 보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 그 자체가 계율을 뜻하기도 합니다.
(
알아차림 그 자체가 계율인 이유는, 알아차리고 있는 그 순간 만큼은 선한상태라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도둑이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차림은 계율(戒, Sīla)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8정도의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관찰하면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으면 동시에
부처님이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보이신 위신력, 앗사지비구의 점잖고 위엄있는 걸음걸이 모두,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서 일어 나는 현상을 그대로 관찰 (dittheva dhamme, 딧테와 담메, 現法)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스리랑카 Dharmagaveshi Bauddha Ashramaya
출처 http://www.pbase.com/kaso/image/62679357
1. 빠알리어 법구경
1-11
Asāre sāramatino 아사아레 사아라마띠노
sāre cāsāradassino 사아레 짜아사아라닷시노
te sāraṃ nādhigacchanti 떼
micchāsa ṅkappagocarā 밋차아산깝빠고짜라아
1 - 12
Sārañca sārato ñatvā 사아란짜 사아라또 냐뜨와아
asārañca asārato 아사아란짜 아사아라또
te sāraṃ adhigacchanti 떼
sammāsaṅkappagocarā 삼마아상깝빠고짜라아
2. 우리말
1) 거해스님
1-11
그들은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 받들고
진실을 거짓이라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릇된 견해에 머물러 있는 것.
결코 참다운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1-12
그들은 진실을 진실이라 받들고
진실 아닌 것을 진실 아닌 것이라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마침내 참다운 진리에 이른다.
2) 석지현스님
1-11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생각하며
진실을 진실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저 진실에 이를 수 없다.
1-12
그러나 진실들 진실로 알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 아닌 것으로 아는 사람은
마침내 저 올바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3. 영문
1) Acharya Buddharakkhita
1-11
Those who mistake the unessential to be essential
and the essential to be unessential,
dwelling in wrong thoughts, never arrive at the essential.
1-12
Those who know the essential to be essential
and the unessential to be unessential,
dwelling in right thoughts,
do arrive at the essential.
2) Thanissaro Bhikkhu
1-11
Those who regard
non-essence as essence
and see essence as non-,
don't get to the essence,
ranging about in wrong resolves.
1-12
But those who know
essence as essence,
and non-essence as non-,
get to the essence,
ranging about in right resolves.
5. 한문(法增比丘)
1-11
執邪以為正(Sara真實,精要無邪見具戒定慧),
或執正為邪,
執持邪見者,
不能見真諦。
1-12
執正以為正,
亦知邪為邪(貪欲kama,瞋恚vyapada,害vihimsa),
執持正見者,
彼能見真諦。(11,12兩偈合誦)
6. 일문(西津紘一)
1-11
黒を白と思い
白を黒と思う人々は
ひねくれ思いに捕われて
本当のことが
解らない
1-12
白を白と見て
黒を黒と見る人々は
素直な心に導かれ
本当のことが
解るでしょう
7. 인연담
1) 영어 (Daw Mya Tin)
The Story of Thera Sariputta
While residing at Veluvana, the Bamboo Grove monastery in Rajagaha, the Buddha uttered Verses (11) and (12) of this book, with reference to Sanjaya, a former teacher of the Chief Disciples, the Venerable Sariputta and the Venerable Moggallana (formerly Upatissa and Kolita).
Upatissa and Kolita were two youths from Upatissa and Kolita, two villages near Rajagaha. While looking at a show they realized the insubstantiality of things and they decided to search for the way to liberation. First, they approached Sanjaya. the wandering ascetic at Rajagaha, but they were not satisfied with his teachings. So they went all over Jarnbudipa and came back to their native place, after searching for, but not finding the true dhamma. At this point they came to an understanding that one who found the true dhamma should inform the other.
One day, Upatissa came across Thera Assaji and learned from him the substance of the dhamma. The thera uttered the verse beginning with "Ye dhamma hetuppabhava", meaning, "those phenomena which proceed from a cause". Listening to the verse, Upatissa became established in the Sotapatti Magga and Phala. Then, as promised, he went to his friend Kolita, explained to him that he, Upatissa, had attained the state of Deathlessness and repeated the verse to his friend. Kolita also become established in Sotapatti Fruition at the end of the verse. They both remembered their former teacher and so went to Sanjaya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one who could point out the Path to Deathlesseness; the Buddha has appeared in the world; the Dhamma has appeared; the Sangha has appeared... Come, let us go to the Teacher." They had hoped that their former teacher would go along with them to the Buddha and by listening to the discourses he, too, would come to realize Magga and Phala. But Sanjaya refused.
So Upatissa and Kolita, with two hundred and fifty followers, went to the Buddha, at Veluvana. There, they were initiated and admitted into the Order as bhikkhus. Upatissa as son of Rupasari became known as Thera Sariputta; Kolita as son of Moggali became known as Thera Maha Moggallana. on the seventh day after the initiation Maha Moggallana attained Arahatship. Thera Sariputta achieved the same a fortnight after initiation. on that day, the Buddha made them his two Chief Disciples (Agga-Savaka).
The two Chief Disciples then related to the Buddha how they went to the Giragga festival, the meeting with Thera Assaji and their attainment of Sotapatti Fruition. They also told the Buddha about their former teacher Sanjaya, who refused to accompany them. Sanjaya had said, "Having bean a teacher to so many pupils, for me to become his pupil would be like a jar turning into a drinking cup. Besides, only few people are wise and the majority are foolish; let the wise go to the wise Gotama, the foolish would still come to me. Go your way, my pupils."
Thus, as the Buddha pointed out, Sanjaya's false pride was preventing him from seeing truth as truth; he was seeing untruth as truth and would never arrive at the real truth.
Then the Buddha spoke in verse as follows.
Verse 11:
They take untruth for truth;
they take truth for untruth;
such persons can never arrive at the truth,
for they hold wrong views.
Verse 12:
They take truth for truth;
they take untruth for untruth;
such persons arrive at the truth, f
or they hold right views.
At the end of the discourse, many people came to be established in Sotapatti Fruition.
2)우리말(진흙속의연꽃)
사리뿟따 장로 이야기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대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숲속의 승원인 벨루와나 (Veluvana)에 머물고 계실 때, 부처님의 존경할 만한 쌍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전의 이름은 우빠띳사와 꼴리따)의 전 스승인 산자야(Sanjaya)와 관련된 게송 11번과 12번을 읊으시었다.
우빠띳사(Upatissa)와 꼴리따(Kolita)는 라자가하 인근에 있는 우빠띳사와 꼴리따마을에서 온 젊은이들이었다. 일체가 무상함을 깨달은 그들은 영원한 자유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처음 그들은 산자야(Sanjaya)를 찾았다. 라자가하에서 금욕수행을 하였지만,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을 샅샅히 돌아 다녔지만 그들이 원하는 진실한 법을 발견 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이 시점에 그들 둘은 누군가 진실한 불멸의 법을 발견 하면 서로 알려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어느 날, 우빠띳사는 앗사지(Assaji)장로가 가로 질러 가는 것을 보고, 그로부터 담마의 실체에 대하여 배웠다. 그 때 장로는
“Ye dhamma hetuppabhava(모든 현상의 진행은 원인으로부터 시작된다)”
하고 첫 구절을 읊었다.
그 게송을 듣자, 우빠띳사는 수다원(Sotapatti)의 도(Magga)와 과(Phala)를 얻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그는 그의 친구인 꼴리따에게 달려갔고, 그에게 자신이 불멸의 진리를 얻었노라고 설명 하고, 그 게송을 들려 주었다. 이 게송을 듣자, 꼴리따 역시 수다원의 도와 과를 얻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 스승을 떠 올리며, 산자야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스승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불멸의 진리를 말한 어느 분을 만났는데, 붓다가 이세상에 출현하였고, 또 담마가 이 세상에 출현하였고, 상가가 이세상에 출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함께 가서 불멸의 가르침을 배우러 가시지요” 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전스승이 자신들과 함께 붓다가 있는 곳으로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러나 산자야는 거절 하였다.
그러자 우빠띳사와 꼴리따는 250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벨루와나에 있는 부처님이 계신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비구계를 받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 하였다.
루빠사리의 아들로서의 이름인 우빠띳사는 후에 사리뿟따 장로로 알려지게 되었고, 목갈리의 아들로서의 이름인 꼴리따는 마하목갈라나 장로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한지 7일째 되는 날, 마하목갈라나는 아라한이 되었고, 사리뿟따 장로는 2주일 후에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은 이들을 쌍수제자(Agga-Savaka)로 만들었다.
쌍수제자는 그들이 어떻게 가락가(Giragga, 기린)축제에 가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앗사지 장로를 만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수다원과를 성취하였는지에 대하여 부처님에게 설명 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전스승인 산자야에게 부처님에 대하여 설명하고, 함께 가기를 권유 하였으나, 그가 거절 한 것도 설명하였다.
산자야는 거절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 하였다.
“제자를 거느린 스승인 내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항아리를 물마시는 컵으로 들어 가라는 것과 같다. 나의 제자들은 극 소수만이 똑똑하고, 거의 대부분은 어리석다. 똑똑한 사람은 고따마에게 가거라. 어리벙한 사람들은 내게로 올 것이이다.”
산자야의 잘못된 자긍심은 그로 하여금 진리중의 진리를 발견할 기회를 놓쳤다고 부처님은 지적 하셨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말하는 그는 진정한 진리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 하시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들은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 받들고
진실을 거짓이라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릇된 견해에 머물러 있는 것.
결코 참다운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진실을 진실이라 받들고
진실 아닌 것을 진실 아닌 것이라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마침내 참다운 진리에 이른다.
부처님의 설법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를 성취 하였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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