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마시시(samasisi)란 무엇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0. 6. 26. 11:04

 

사마시시(samasisi)란 무엇인가

 

 

 

 

 

 

 

오래 전의 일이다. 언젠가 공항에서 택시를 탓는데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재미 있게 들었다.

 

그는 죽다 살아 났다고 한다. 죽을 병에 걸려서 모두 다 포기 하였는데, 쌀 한말을 들고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는 것이다. 움막을 짓고 혼자 살면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생활을 하는 도중에 병이 나아 버렸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초능력도 얻게 되었는데, 사람을 보면 과거와 미래가 한 눈에 보였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누구나 극한에 몰리면 초월적 존재를 찾게 된다. 그리고 살려 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 때 오히려 문제가 해결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수행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수행하다 죽지 않는다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라 한다. 수행을 하다 죽지나 않을 까 하는 공포감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수행하다 죽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수행자가 좌선 중에 머리가 꽉 막힌 것 같은 증세가 있어서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대로 밀어 붙일 경우,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수행을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 했다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죽어도 좋으니 계속 하기로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수행을 계속 한 결과 머리는 터지지 않았고, 대신에 무언가 쑤욱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머리가 꽉 막힌 듯한 증세가 씻은듯이 사라지고, 수행을 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 이다.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는 암선고를 받은 사람이 이왕 죽을 바에는 수행이나 하다 죽자라고 다짐하고,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그 곳에서 몸과 마음을 청정 하게 한 다음, 죽기를 각오 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때인가 수행이 잘 되어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사라진 것 같은 무아의 상태에서, 마치 개미무리와 같은 검은 물체들이 스멀스멀 몸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깨어서 날자를 보니 3일낮 3일 밤을 한 자리에서 보낸 것이다.

 

이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 본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일어 났다가 사라진다라는 고유의 특성을 본 것이다.

 

괴로움과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고통 그 자체는 본성이 없다. 있을 만해서 나타난 것이고, 또한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고유한 성질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몸에서 일어난 모든 느낌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느낌을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주시 하면 될 것이다. 어떤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 하고 맡겨서는 결코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다 죽으면

 

수행하다 죽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행을 하다 죽으면 그 것처럼 영광스런 일은 없을 것이라 한다. 불교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열반과 해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수행하다 죽으면 그런 목적을 빨리 달성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 죽을 때의 최후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 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을 한자어로 사몰심(死沒心)’이라 하는데, 이제까지 삶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나 그 업에 대한 표상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또 다른 존재로 태어 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은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다는 것이다. 마치 손가락 하나 퉁기는 것 보다 더 빠른 시간에 재생이 이루어지는데, 북방불교에서 말하는 49일 동안 중유상태로 머물다가 태어 날 곳이 결정된다는 것과 다른 이야기이다. 죽는 순간에 지체 없이 다른 존재로 태어 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죽는 순간에 수행을 하고 있었다면, 그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善心)’이기 때문에 결코 악처에 태어 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왕 죽을 바에는 수행이나 하다 죽자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과를

 

죽는 순간의 마음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죽음으로 인하여 불교의 목표인 해탈을 실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좋은 예를 bbs불교방송에서 묘원법사가 진행하는 불교강좌에서 들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서에서는 찌딸라산에 머무신 장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스님이 아플 때, 아픈 느낌이 격렬해지자 끙끙거리면서 신음하고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젊은 비구가 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큰 스님 어디가 아프십니까?

“음 아픈 특정한 곳이 없네. 단지 육체적 감각기반을 대상으로 하여 느끼는 느낌만 있네.

 

“큰 스님 그러한 앎이 일어난 때부터 참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음 나는 참고 있다네.

 

“큰 스님, 참는 것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하면서 큰 스님은 참았습니다.

 

헛배가 부른 체액이 심장까지 부풀어서 마침내 터졌습니다.

내장이 그의 침상에 더미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큰 스님은 그것을 젊은 비구에게 보였습니다.

 

비구여! 이런 정도의 참음은 적절한가?

너무 뜻밖의 현상에 젊은 비구는 말이 없었습니다.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0년 6월 19)

 

 

큰스님은 배가 터져서 죽는 그 순간에도 알아차림을 놓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이다.

 

아라한이 되어서 죽으면 더 이상 재생이 되지 않아 완전한 소멸에 이르기 때문에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과를 얻는, 다시 말해서 동시에 두개의 결과를 얻는 자를 사마시시라 한다.

 

사마시시 검색을 하면서

 

사마시시는 처음 접하는 용어이다. 사마시시란 무엇일까.  키워드 검색을 해보아도 사마시시라는 용어는 찾을 수 없었다.

 

영문으로 ‘samasisi’ 일 것 같아 키워드 검색을 해 보았다. 구글 검색의 결과 수 많은 영문 자료가 있으나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고, 다만 한국어 웹에서 어느 블로거의 글을 발견 하였다.

 

이르모꼬어리서근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Yg9&articleno=17370003#ajax_history_home)’이라는 블로그인데 사마시시에 대한 해설을 유일하게 발견 할 수 있었다.

 

검색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댓글도 검색이 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네티즌들은 댓글을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욕설도 쓰고, 본문에서 다 하지 못하였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댓글은 조회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마시시 검색과정에서 본문 보다 댓글에서 정보를 알아 낸 것이다.

 

블로거가 작성한 댓글에 사마시시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해설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마시시는 「인시설론」(人施設論, Pug.19)에 처음 나타나는 단어로 여겨진다. 이것은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isin, 문자적으로는 머리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 가지 목적이란 최고의 성위인 아라한됨과 완전한 열반(반열반=입멸)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입적한 것을 말한다.

주석서들은 병이 낫거나, 자세가 끝나거나, 목숨이 다하면서 아라한과를 얻고 바로 반열반에 드는것을 사마시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S4.23 고디까 경 - 제자의 자결을 말리라 vs 갈애를 뿌리뽑아 열반에 듦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Yg9&articleno=17370003#ajax_history_home)

 

 

사마시시 종류는

 

이르머꼬어리서근님에 따르면 사마시시라는 용어는 상윳따니까야의 주석서에 나오는데 세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자세의 사마시시 (iriyapatha-samasisi)

둘째, 병의 사마시시 (rpoga-samasisi)

셋째, 목숨의 사마시시 (jivita-samasisi)

(SA.i.183)

 

 

그런데 앙굿따라 니까야의 주석에서는 여기에 느낌의 사마시시를 더 추가하여 네가지 사마시시를 말하고 있다.

 

사마시시라는 용어는 인시설론에서 최초로 나온다고 한다. 인시설론은 법취론(法聚論), 분별론(分別論), 논사(論事), 계설론(界說論), 쌍대론(雙對論), 발취론(發趣論)과 더불어 아비담마 7론이라 불리우며, 빠알리 삼장에서 논장에 속한다.

 

인시설론이란 무엇일까. 검색을 해 보면, 이 경전은 '사람'에 관해 언급된 부분을 추리고 정리해서 열 개 항목으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인시설(人施設)’이라는 뜻은 편의상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경전중에 언급되는 '()'에 관한 용례의 집성을 인시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수행의 진보상태(깨달았는가, 아닌가 등)에 의한 분류다. 이 같은 분류의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은 범부인가, 성인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찌딸라 산에 머물던 장로가 배가 터져 죽은 경우, 4가지 사마시시(자세의 사마시시, 병의 사마시시, 목숨의 사마시시, 느낌의 사마시시)중에 어디에 해당 할까.

 

그 경우 병의 사마시시에 해당 될 것이다. 병이 걸려 죽었지만 그 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경우라 볼 수 있다.

 

호랑이에 잡아 먹히면서

 

그런데 불가피하게 사고로 죽은 경우는 어떠 할까. 그 좋은 예가 있다. 한국명상원의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그러자 호랑이는 비구를 바위위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발가락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때 다른 비구들은, ‘비구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소, 통탄할 뿐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구는 호랑이 입에 들어가면서도 고통스러운 느낌을 알아차려서 발목이 먹힐 때, 수다원이 되었고 무릎이 먹힐 때, 사다함이 되고 배꼽을 먹힐 때 아나함, 그리고 심장이 먹힐 때까지 마음을 분리해서 육체를 지켜보았습니다.

(한 비구와 호랑이의 이야기,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이 이야기도 주석서에 나오는 것이라 한다. 수행중에 어느 비구가 호랑이에게 물려 갔는데,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어서, 발목이 먹힐 때 수다원이 되었고, 무릎이 먹힐 때 사다함, 배꼽이 먹힐 때 아나함이 되었고, 최후로 심장이 먹힐 때 그 순간을 알아차려서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분리 하여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4가지 사마시시 중에 어느 경우에 해당 될까.

 

호랑이에게 잡아 먹힌 순간 육체적 고통은 매우 격렬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스런 느낌을 정신적인 느낌으로 발전 시키지 않고,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알아차렸다면 느낌의 사마시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디까경과 목숨의 사마시시

 

그렇다면 4가지 사마시시중에 목숨의 사마시시란 무엇일까. 이르머꼬어리서근님 소개한 고디까경(S4.23)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고디까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고띠까 존자가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에 머물고 있었다.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디까 존자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3.

두 번째로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디까 존자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세 번째로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디까 존자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네 번째로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디까 존자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다섯 번째로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디까 존자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여섯 번째로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디까 존자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4. 

일곱 번째로 고디까 존자는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여 머물러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 그러자 고디까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섯 번이나 나는 일시적인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나는 칼로 (자결을 하리라.)”

 

5.

그러자 마라 빠삐만이 마음으로 고디까 존자의 마음에 일어난 생각을 알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게송으로 말했다.

 

    "대영웅, 큰 통찰지를 지닌 분,

     큰 성취와 명성으로 및나는 분,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건넌 분, 눈을 가진 분이시여,

     당신의 발에 예배드리나이다.

 

     대영웅,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제자가 죽기를 원하여

     (죽을) 결심하였나니

     그를 말리기를, 빛나는 분이시여.

 

     당신의 교법에서 기뻐하는 당신 제자는

     마음의 이상을 얻지 못한 유학인데

     어떻게 자결을 합니까,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여?"

 

6.

그런데 그 무렵 고디까 존자는 칼로 (자결을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이 자는 빠삐만이로구나.'라고 아시고 마라 빠삐만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현자들은 더 이상 삶에 연연하지 않고

     이와 같은 행위를 짓기도 하나니

     고디까는 이미 갈애를 뿌리 뽑아

     완전한 열반의 경지에 들었도다."

 

7.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우리는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자.

     거기서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가 칼로 (자결을 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8.

그때 세존께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셨다. 세존께서는 고디까 존자가 침상위에서 몸통이 뒤틀린 채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그 무렵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간방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9.

그러자 세존께서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간방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알음알이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알음알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는 알음알이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10.

그때 마라 빠삐만이 벨루와빤두 비파를 가지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게송으로 말했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사방팔방으로 찾아보았지만

      나는 그를 발견할 수 없으니

      도대체 고디까는 어디로 갔는가?"

 

11.

[세존]

 

     "지혜를 구족한 그 현자

      禪을 닦고 항상 선정을 기뻐하였나니

      목숨에도 탐착하지 않고

      밤낮으로 정진했도다.

 

      죽음의 군대를 철저하게 정복하고

      다시 태어남(再生)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며

      갈애를 남김없이 뿌리 뽑은 뒤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도다."

 

 

12.

[송출자]

 

     슬픔에 압도되어 허리의 비파를 떨어뜨리고

     의기소침해진 그 약카는 거기서 사라졌노라.

 

 

(상윳따니까야 , S4.23 고디까 경)

 

 

 

고디까 존자가 여섯번씩이나 일시적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지만, 오염원들로부터 해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번뇌를 소멸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나자 그는 자결을 하였다.

 

여기서 자결을 하였다라는 것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의 주석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장로는 칼로 목의 경정맥을 끊었다. 고통스런 느낌이 생겼지만 그 느낌을 가라앉히고 그 느낌을 잘 파악한 뒤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근본 명상주제를 명상하면서 아라한과를 증득한 뒤 사마시시(samasisi,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듦)로 완전한 열반(parinibbayi)에 들었다.

 

 

 이 경우가 목숨의 사마시시에 해당 될 것이다. 이 고디까 존자의 이야기는 법구경에도 나와 있다.

 

 

만일 그가 계를 잘 지키고

정신을 차려 깨어 있는 생활을 하며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성취했다면

마라도 그가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법구경 57번 게송)

 

 

자결한 고디까 존자가 아라한이 되지 못하였다면, 재생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마라의 눈에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라의 눈에 알음알이가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라도 그가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라고 게송에서 말하고 있다.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자(sisin)

 

새로운 용어 사마시시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아직까지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용어이지만,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 과를 얻어 재생하지 않고 해탈함으로써,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자(sisin)라 해서 사마시시(samasisi)’라고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10-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