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자가 본 이찬수의 목사의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를 읽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0. 7. 1. 23:19

 

불자가 본 이찬수의 목사의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를 읽고

 

 

 

 

 

 

 

반박성 댓글을 받고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기도세레모니에 대하여 몇 편의 글을 썻다. 주로 크리스천 선수들의 무례함에 관한 내용이다.

 

그들은 의례히 그렇게 해도 되는 듯한 관행이 수 십년 동안 진행 되어 왔는데, 이에 대하여 그들의 무례함을 나무라는 글을 쓰자, 수 많은 반박성 댓글을 받게 되었다. 주로 기독교인들의 글이다. 그들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의 글이라는 것이다.

 

의례히 그런 줄 아는 데 누군가 잘 못을 지적 하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속으로 부정하고 싶고, ‘아니다라고 항변도 하지만 그들의 권위가 깨졌을 때 몹시 당황해 한다. 반박성 댓글도 대부분 그런 내용이다.

 

낡고, 오래 되고, 고리타분한 것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이 불교에 대하여 지적 하면 일단 반발 하고 본다. 그리고 그 부당함에 대하여 따지려 들 것이다. 그런 글이 최근 불교평론의 열린논단에서 이찬수목사가 밝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찬수목사는 진보적 개신교 신학자이다. 불교에 대하여 잘 알고, 이해 하려고 노력하려는 몇 되지 않는 친불교적 신학자이다. 그가 쓴 글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50)를 보면, 불교인이라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나 불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약간은 거칠게 표현 하였다. 이런 글을 읽는 불교인이라면 매우 착잡해 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이찬수 교수의 글에서 가장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한국불교의 근대성 문제이었다.

 

한국불교의 역사가 1600년 된다고 하지만, 고려시대까지 영광의 시대이었고, 그 후 조선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탄압과 억압을 받는 시기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항상 전통적이고, 항상 한국적이었고, 또 호국불교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통도 근대에 들어 와서 그 개념이 급변하게 된다. 특히 나라가 망하면서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것이 오히려 장애 요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이찬수 교수가 지적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것 보다는 새로운 것에서 희망의 근거를 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20세기 한국인에게전근대적인 것은 극복의 대상이고 서양식근대는 추구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경우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케치프레이즈 하에 기술은 서양에서 빌리지만, 정신은 일본의 것을 지킨다는 생각이 투철하여, 불교는 타격을 받지 않고, 사람들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나라가 망하면서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 되었고, 오히려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서양의 것이면 무엇든지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발전 하여, 새로운 것에서 희망을 갖는 사상으로 발전 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가 아무 여과 없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 스럽게 스며 들었다.

 

이런 구도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불교는 낡고 오래된 것으로 생각 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새롭고, 문명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런 패러다임을 극복 하지 못하면 한국불교는 희망이 없다. 한국불교는 그런 패러다임을 극복하기 위햐여 노력을 해 왔는가.

 

단적인 예로, 최근 강원교육을 대폭 바꾸려 하고 있다. 과거 300여년간 한문경전을 중심으로 한 서당식 강원교육이 지금까지 유지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뇌리에 불교는 낡고, 오래 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와 냉전

 

불자들은 불교의 교리에 관한한 최고의 종교라고 자부한다. 기독교의 창조설과 같은 교리를 들으면,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유치 하게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 밖에 원죄론, 대속론, 종말론등 기독교의 신학 이론도 창조론에서 비롯 되었으므로 유치원 동화정도의 수준으로 치부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불자들은 불교가 제일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에 공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이에 대하여 이찬수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기독교를 매우 천박한 종교로 매도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지독히 자폐적인 시스템이다.

 

 

기독교에 대하여 알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도 냉소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홰불사건이나 불교폄훼 사건으로 인하여 기독교와 냉전을 하고 있지만, 불자들이 느끼는 기독교에 대하여 한편으로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하여 양면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의 양적성장과 천주교의 조직화된 운영시스템 같은 것이다.

 

자꾸 보여 달라는데

 

불교가 교리적으로는 포괄적이면서 불자들이나 종단에서는 왜 기독교에 대하여 배타적일까.  이에 대하여 이찬수 교수는 기독교에 대하여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원효스님의 일심(一心)사상과 의상스님의 화엄일승(一乘)사상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효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를 화쟁 대상으로 삼았으리라.

의상이 오늘날 태어났다면일승이라는 우주적 구원의 진리 안에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포섭했으리라.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를 포용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엔 불교가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구에서 불교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드디어 세계는 불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며 쉽사리 받아들이고, 과학적 세계관이 불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결국 서구 과학도 불교로 오게 되어 있다는, 다소 안일한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핼 태도로는 능력을 보여주어야한다.

 

 

기독교에서는 불교를 연구 하는 신학자는 많지만, 불교의 경우 기독교를 연구 하는 불교학자가 드믈다고 지적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없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우물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찬수 교수의 요지는 한국불교가 자만에 빠지지 말고, 불교의 교리가 모든 사상을 포괄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사상도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보여 달라고 거듭 주장한다. 그러면서 한국불교가 자폐적 시스템과 같고,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보인 다는 것이다.

 

다그치는 까닭은

 

이찬수교수의 주장은 한국불교, 아니 대승불교의 비판이라 볼 수 있다. 인터넷상에서 일부 네티즌들이 대승불교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비판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과거 1700년 전통만 믿고 아무 역할도 못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따끔한 지적이라 볼 수 있다.

 

이찬수 목사는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가 자신의 종교를 뒤돌아 보고 목사의 길로 간 것도 불교의 영향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가 불교에 대하여 제대로 알았다면 목사의 길로 가지 않고 불교로 개종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알아야 하고, 받아 들이라고 다그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만큼 자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불교와 달리 기독교에는 불교를 연구하는 진보적 신학자들이 많이 있다. 김경재 한신대교수, 길희성 서강대교수, 캐나다 리자이나대 신학자 오강남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대승불교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중 보살사상과 대승사상에 대하여 극찬한다. 그래서 기독교도 대승기독교가 되어야 하고, 보살정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학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흔들림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대승불교와 기독교를 비교설명함으로서 모든 종교는 서로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오강남 교수일 것이다.

 

그는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2)’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인 일심진여에 대하여 자신의 창조주인 절대자와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김경재 교수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는 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존재 자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당시의 작은 부족에서 출발한 소박한 신의 개념이 플라톤의 이데아이론과 접목하면서 발전된 개념이다.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은 절대유(絶對有)’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절대 ()’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 없이 ‘항상 있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재가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고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또 선 그 자체임과 동시에 미 그 자체라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리스의 이데아 이론과 접목되면서 날개를 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항상 있는 절대유로 본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적으로 본다면 모두 개념내지 희론이라 할 것이다.

 

김경재 교수는 폴 틸리히가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일본 불교학자 마사오 아베의 글에 대하여 김경재 교수는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사오 아베의 선불교적 궁극적 실재관인 ‘공()’·진여(眞如) 가 말하려는 진리를 폴 틸리히의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공과 진여가 하나님과 다름 없는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길희성 교수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보살 예수에서 길희성교수 역시 불교의 궁극적 실재인 ‘참자아’를 언급 하면서, 대승불교의 사상을 자신들의 종교와 결합을 시도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찬수 교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형적 혹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뿐, 교리나 사상, 더 나아가 종교 체험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불교나 기독교나 외적으로 보일 때 달라보이지만, 안으로 파고 들어 가다 보면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학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대승불교의 진여, 일심, 참나, 본마음과 같은 여래장사상과 그들의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접목을 시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교의 교리가 그렇게 포괄적이고, 자신 있는 교리라면 기독교에 대하여 연구해야 하고, 또한 받아 들여야 된다고 강요아닌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래장 사상

 

이렇게 그들이 공세적으로 나온데는 오랜 연구 끝에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여래장 사상이 불교의 본래 모습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를 연구 하고 있는 각묵스님의 견해는 다르다.

 

 

여래장 계열의 경과 논서들은 인도불교에서는 결코 법을 중심하는 주류에는 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국불교학이 후대로 갈수록 화엄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불교의 아류에 속하는 우리 불교는 아무런 비판 없이 화엄의 교학을 최고로 놓고 있습니다.

(각묵스님,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마음이 만든다?, http://cafe.daum.net/chobul)

 

 

여래장계열의 사상은 불교의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법을 중심으로 한 체계로서,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체계화한 것이 아비담마이고 이러한 법의 공성 혹은 무아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것이 반야/중관이며, 이러한 법을 식(알음알이)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유식/유가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불교의 주류는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반야/중관-유식/유가행이며 그 중심에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법의 종교, 그 법으로 인하여 열반과 해탈을 실현 하는 수행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래장 계열의 불교 즉, 정토사상, 관음신앙, 화엄교학등은 법을 중심으로 한 체계가 아니고, 믿음 즉 신앙을 중심으로 한 체계라는 것이다.

 

특히 여래장 계열에 속하는 화엄경 법화경 대승열반경 등과 특히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대승기신론 등의 논서는 믿음을 토대로한 가르침인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여래장이라든가, 일심, 진여, 불성, 참나, 본마음은 산냐()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타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한국불교의 역사는 여래장 계열의 불교역사이다. 신라시대 원효스님의 일심사상도 여래장의 진수를 보여 주었고, 의상스님의 화엄일승 또한 여래장 계열의 화엄교학에 기반 한다.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이 진여, 불성, 참나가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불교의 스님이나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 이야기를 한다.

 

서광스님은 자신의 저서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불관출판사)’에서 비로자나불아나 알라나 야훼가 이름만 다를 뿐 다 같은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한자경 교수는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의미라는 불광창립32주년기념강연에서 원효스님이 주장한 일심사상을 한마음이라 말하면서, 그 한마음이 하늘님과 같고,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이렇게 믿음의 불교이자 신앙의 불교인 여래장 사상의 일심사상은 기독교 학자 뿐만 아니라 불교학자들도 공공연하게 주장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독학자들의 속내는

 

불교를 연구 하는 기독교학자들은 끊임 없이 기독교와 불교의 접목을 시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대승의 이념을 받아들이려 하고, 보살사상을 그들의 종교에 접목 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 같이 불교를 기독교와 같이 신의 은총영역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진리를 발견하였을 지라도 그들은 신이 창조한 세계임을 강조하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은 이미 거룩한 분에 의해 주어진 축복이며 은총이기에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자연현상이므로 신의 은총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찬수 교수가 불교인들에게 기독교 공부를 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교학을 연구 하는 것이 결국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은 매우 취약하다. 부처님이 설한 것도 아니고, 또한 불교의 주류도 아닌 신앙의 불교인 여래장 사상이 기독교학자들로부터 애호를 받고 있는 한 한국불교는 위기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그것은 초기불교로 돌아 가는 길 밖에 없다. 초기불교는 법 중심의 불교로서 절대자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배격한다. 실재 하지 않은 마음이 만들어 낸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초기불교 내에서 기독교가 설자리는 없다. 출발부터 다른 종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독교 학자들이 초기불교를 연구하였다면 참나와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참나와 하나님 모두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실재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 하고, 열반과 해탈의 실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타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퍼펙트한 종교

 

이찬수 교수는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이고, 가톨릭이 80% 쯤이고, 개신교는 70%(조직신학)쯤 된다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이 교수가 어느 불교를 기준으로 하여 70%라고 주장 하였는지 모르지만, 초기불교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는 70%보다 월씬 더 높은 거의 퍼펙트한 종교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교학체계인 아비담마와 열반과 해탈로 이끄는 청정도론, 그리고 일관되게 무상과 고와 무아를 연기법적으로 설명한 84천을 법문을 조금이라도 이해 하였다면 70%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기독신학자들은 초기불교를 언급 하지 않고 대승불교만 비교 하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이찬수 교수가 말하였듯이 불교는 한수, 아니 여러 수 위이다. 그것은 불교가 출현한 배경에 기인한다. 동국대 김종욱 교수의 불교TV 강의에 따르면 불교와 기독교는 품격이 다른 종교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불교는 수백년동안 철학적 운동이 지속된 다음에 등장하였지만, 기독교는 철학적 기반 없이 출현한 종교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비판종교

철학적 사상의 배경

불교

브라만교

범아일여를 주장 하는 고도의 철학체계인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등장

기독교

유태교

유일신을 믿는 민족주의적 부족종교로부터 시작

 

 

 

기독교 이전의 유태교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부족종교에 불과 하였다. 반면에 불교이전에 있었던 브라만교는 종교이전에 고도의 철학 이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도 신을 이야기 하지만 유태교의 신과 같은 부족신이 아니라, 그 신은 브라만이고 아트만과 일치 하는 ‘범아일여(梵俄一如)의 우파니샤드사상은 유태교의 유일신사상과 격이 다른 고도의 철학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아트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불교가 나왔기 때문에 지극히 철학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브라만교의 고도의 철학적사상을 극복하고 나온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종교일 수 밖에 없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이전의 유태교로 하는 근본적인 철학도 사상도 없는 매우 원시적인 민족종교를 뿌리로 하여 나왔기 때문에 불교와 격이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와 기독교는 품격이 다른종교인 것이다.

 

2000년 이후부터

 

이찬수교수의 글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뼈아픈 지적을 한 글이다. 일부는 인정 할 수 있고, 일부는 인정 할 수 없는 내용도 있지만, 타종교인에게 조롱거리로 전락한 듯한 불교의 현실이 암담하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전래 된지 10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바뀌지 않은 것은 불교는 낡고, 오래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떨쳐 버리지 않는 한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첫째로 부처님이 설한 불교로 돌아 가는 것이다. 여래장 같은 중국불교의 아류에서 법을 중심으로 한 주류불교로 회귀 하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 따라 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기도라는 말 대신에 불공을 쓴 다든가, 기복행위와 같은 비불교적 요소를 타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차별화를 이루었을 때 한국불교가 자리잡아 갈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늦엇지만 2000년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몇십년이 지나면 한국불교가 확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그 때쯤 되면 이찬수교수와 같은 기독학자들의 조롱 섞인 글을 보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이찬수 목사가 불교인들에게 제발 기독교공부를 하고, 기독교를 포용하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여래장 계열의 불교사상으로 접근하기에 미흡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들을 비롯하여 불교학자, 재가불자들은 가장 먼저 초기불교부터 먼저하고 접근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기독교의 사상이라는 것이 유치원 동화수준의 빤냐띠(paññātti, 槪念)이고, 빠빤짜(papanca, 戱論)이고, 허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2010-07-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