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계(戒)의 청정과 성취수단, 법구경 13-14 난다 장로 이야기
우리나라 재가불자들을 일반적으로 신도(信徒)라고 부른다. 타 종교에서 부르는 신자(信者)와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신도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믿음의 종교라고 볼 수 있는 이웃의 유일신종교와 같이 재가불자들을 굳이 신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국적 특수상황에 기인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도(信徒)인가 수행자(修行者)인가
불교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의 불교이고, 또 하나는 믿음의 불교이다. 법의 불교는 사꺄무니 붓다 이래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테라와다 불교가 대표적이고, 믿음의 불교는 여래장 계열의 불교를 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래장 계열의 불교이므로 믿음의 불교, 신앙의 불교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재가불자들을 신도라고 부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불자들은 기복불교, 방편불교에 크게 의지 한다. 절에 가면 법당 마다 복전함 내지 불전함이 있어서 돈을 넣고, 자신과 가정의 안녕을 빈다든가 대학입시 발원, 입찰경쟁 발원등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기복이 주류를 이룬다. 여기에 죽은자를 위한 각종 기도회나 천도제, 수륙제, 방생회와 같은 방편불교가 역시 매우 성행 하고 있다.
이렇게 기복과 방편으로 변질된 불교가 신행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은 보시를 열심히 잘 하는 것이 불교를 잘 믿는 것으로 착각 하기도 한다. 그렇게 된 요인중의 하나로서, 보시를 잘 하고, 계를 잘 지키면 천상에 태어 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사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불교에서는 믿고 바라기 보다 수행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법의 불교는 수행의 불교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재가불자를 신도라고 부르기 보다 ‘수행자(修行者)’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재가불자들은
우리불자들은 여래장과 같은 신앙의 불교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최근 ‘초기불교’가 소개되면서 여러가지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까지 재가불자들은 오로지 믿고 바라는 기도만 하는 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고 해도 염불, 절수행, 다라니와 같은 주력 수행위주 이었다. 또한 참선과 같이 수승한 수행은 출가수행자들의 전유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깨달음은 나와 관련이 없는 것 내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초기불교를 공부 하다 보면 누구나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길은 사꺄무니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이었다. 그 길로만 가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누가 인가해 주는 것도 아니고, 증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지침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깨달음으로 인도 해 주는 방법이 청정도론에 표현된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 일 것이다.
불자(佛子)인가 혜자(慧子)인가
칠청정과 16단계의 최종 목표는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성취 하는 것이다. 그 험난한 여정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단계를 하나씩 넘을 때 마다 새로운 고개가 나타나곤 하는데, 마침내 16단계를 마쳤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수다원이라 한다. 그리고 똑 같은 과정을 다시 반복 하여 사다함이 되고, 아나함이 되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소승4과로 하여 폄하 한다. 성문 연각승은 결코 성불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성불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이다.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로 따라 가면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인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을 세글자로 줄이면 ‘불제자(佛第子)’가 되고, 다시 이를 두글자로 줄이면 ‘불자(佛子)’가 된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일 것이다. 불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불자로 볼 수 있을까. 불자가 6조 혜능(慧能)선사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불자라기 보다 혜자(慧子)로 불려야 할 것이다.
네가지 계의 청정이 있는데
깨달음으로 이끄는 나침반과도 같은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는 크게 칠청정과 16단계 지혜로 나누어 진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는 크게
이렇게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네가지 계의 청정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
|
네가지 계의 청정 |
성취하기 위한 방법 |
비 고 |
1 |
계목의 단속에 관한 계 patimokkhasamvarasila |
믿음(saddha, 삿다) |
학습계율 |
2 |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 indriyasamvarasila |
알아차림(satī, 사띠) |
표상 |
3 |
생계의 청정에 관한 계 ajivaparisuddhisila |
정진(viriya, 위리야) |
계략, 쓸데 없는 말, 암시, 비방, 이득추구, 사주, 점보기, |
4 |
필수품에 관한 계 paccayasannissitasila |
통찰지(pañña, 빤냐) |
옷, 거처, 탁발음식, 약품 |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비구가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계목(빠띠목카, patimokkha)을 단속 하는 일이다. 계목이란 학습계율을 말한다. 계목을 단속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습계율을 제정하는 것은 제자들의 영역을 벗어난 부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믿음으로 성취 되어야 한다.
(청정도론)
학습계율은 부처님의 영역에서 제정 된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믿고 따르는 ‘믿음(saddha, 삿다)’이 계목의 단속에 관한 계의 청정을 성취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표상을 취하지 말아야 하는데
감각기능을 단속 하기 위해서 표상을 취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를 성취 하는 수단은 알아차림(satī, 사띠)이다. 청정도론에서 표상을 취하지 말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차라리 시뻘겋게 불타는 쇠막대기로
눈의 감각기능을 파괴할지언정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형상들에서
표상(nimitta, 니밋따)을 취하지 말라.
(S.iv.168)
이것이 ‘불의 가르침’이다. 눈으로 들어 오는 표상을 취하지 않으려면 알아차림을 유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눈의 문으로부터 들어 오는 ‘오염원’이라는 도둑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굶어 죽을 지언정
생계의 청정에 관한 계는 ‘정진(viriya, 위리야)’으로 성취된다. 왜냐하면 바르게 정진하는 자가 점이나 사주와 같은 삿된 생계를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 정진의 힘은 선법과 불선법을 가르는 힘이다. 그래서선법이면 더욱 더 증장시키고, 불선법이면 쳐 내는 것이다. 따라서 점이나 사주, 재산축적과 같은 삿된 생계를 버리고, 정진으로 탁발을 행함으로서 청정한 필수품만 수용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입의 암시로 인해 생긴 꿀과 죽을
먹었다면 나의 생계는 비난 받았을 것이다.
비록 나의 창자가 밖으로 나와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목숨을 버릴지언정 생계를 얼룩지게 하지는 않으리라.”
(Mimln370)
굶어 죽을 지언정 넌지시 말한다거나 암시하는 말로서 생계를 해결 하는 행위, 점이나 사주등과 같이 삿된 행위로 생계를 유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헤아려본 뒤 사용해야
옷, 거처, 탁발음식, 약품과 같은 필수품에 관한 계는 ‘통찰지(pañña, 빤냐)’로 성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찰지를 가진 자는 필수품에 대한 위험과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수품에 대해서 통찰지로 반조한 다음에 사용 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훔친것의 수용, 빚낸것의 수용, 상속자의 수용, 주인의 수용을 판별하는 것이다. 필수품의 계와 관련된 게송은 다음과 같이 소개 된다.
“최상의 통찰지를 가진 제자는
선서께서 설하신 법을 듣고
탁발한 음식과 승원과 침상과 좌구와
가사를 빨기 위해 길어온 물을
헤아려본 뒤 사용해야 한다.”
(Sn.391)
여기서 헤아려 본다는 것은 다시 한번 반조 한다는 것을 말하고, 사용 해도 적합한 것인지에 대하여 통찰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
불교에서 출가수행자의 대명사가 ‘비구’이다. 빠알리어로 빅쿠(bhikkhu)라 하는데 비구는 어떤 뜻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헤어지고 기운 옷등을 입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칭을 얻은 신심으로 출가한 선남자.
(청정도론 1권 148페이지)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자와 분소의를 입으자로서 출가한 양가집 자제를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본다는 것은 해탈과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고, 분소의를 입었다는 것은 무소유와 청정을 실천 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비구가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계목(빠띠목카, patimokkha)을 단속 하는 일이다. 계목이란 학습계율을 말한다. 이어서 눈과 귀와 코와 같은 감각기관을 단속함으로서 ‘표상’을 취하지 않는다. 또한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점’이나 ‘사주’를 보아 주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네가지 기본적인 ‘필수품(옷, 거처, 음식, 약품)’만 수용한다.
육문(六門)의 문지기는
이 중 두번째인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를 보면, 그 실천 수행방법이 알아차림(sati, 사띠)이다. 감각기능의 단속은 알아차림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계를 지키는 데 있어서 왜 그토록 중요할까.
부처님의 8만4천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 되고, 다시 37조도품을 줄아면 8정도이다. 이 8정도는
알아차림 그 자체는 선법(善法)이다. 따라서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해로운 마음이 일어 나지 않아 선한상태를 항상 유지 한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불선법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와 활개를 치게 된다.
따라서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는 한 계율은 자동적으로 지켜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일종의 ‘문지기’인 것이다.
시절 인연이 되어
테라와다불교의 준거라는 청정도론에서 왜 법구경과 같은 초가경전을 예로 들어 설명 하고 있을까. 그 역사적 배경을 알아 보았다.
5세기에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 스님에 의하여 편찬된 청정도론을 보면 인용된 내용이 대부분 경전에 근거 한다. 주로 4부 니까야이지만 법구경의 내용도 종종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요인은 BC3세기에 아소까대왕 당시 이루어진 ‘3차결집’의 영향이 크다. 그 때 당시 비정통파 승려들을 교단에서 추방하고 이단적인 견해를 가진 자들을 진압하여, 테라와다의 교설이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빠알리 삼장이 완성 되어 세계 각지에 전도단이 파견 되었는데, 그 중에 한 국가가 스리랑카인 것이다.
스리랑카에 빠알리삼장이 전래 된 이래 새로운 대승불교와 같은 새로운 사조의 유입을 막기 위하여 싱할리어로 700년간 보전 하여 왔다. 그러다가 시절 인연이 되자 5세기에 이를 다시 빠알리어로 복원 하는 과정에서 붓다고사 스님이 참여 한 것이다.
그 때 스님은 청정도론을 집필 하면서 빠알리 삼장의 내용을 인용 하였는데,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 하여 주석서를 편찬 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를 설명 할 때 법구경의 13번 14번 게송을 인용 하였다. 감각기능의 단속은 알아차림(사띠, sati)로 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알아차림은 여섯가지 감각의 문에 있어서 일종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빠알리어 법구경( Bhikkhu Pesala)
1-13
Yathā’gāraṃ ducchannaṃ, 야타아
vuṭṭhi samativijjhati 윳티 사마띠윗자띠
Evaṃ abhāvitaṃ cittaṃ, 에왕 아바아위땅 싯땅
rāgo samativijjhati. 라아고 사마띠윗자띠
1-14
Yathā’gāraṃ succhannaṃ, 야타아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윳띠 나 사마띠윗자띠
Evaṃ subhāvitaṃ cittaṃ, 에왕 수바아윗땅 싯땅
rāgo na samativijjhati. 라아고 나 사마띠윗자띠
2. 우리말 법구경
1) 거해스님
1-13
마치 성글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듯이
굳게 수행하지 않은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든다.
1-14
마치 튼튼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지 못하듯이
굳게 수행된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들지 못한다.
2) 석지현스님
1-13
지붕이 허술하면 비가 새듯
잘 수련되지 않은 마음에
탐욕은 걷잡을 수 없이 스며든다.
1-14
그러나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새지 않듯
잘 수련된 마음에는
탐욕이 결코 스며들지 못한다.
3. 영어 법구경
1) Acharya Buddharakkhita
1-13
Just as rain breaks through an ill-thatched house,
so passion penetrates an undeveloped mind.
1-14
Just as rain does not break through a well-thatched house,
so passion never penetrates a well-developed mind.
2) Thanissaro Bhikkhu
1-13
As rain seeps into
an ill-thatched hut,
so passion,
the undeveloped mind.
1-14
a well-thatched hut,
so passion does not,
the well-developed mind.
5. 한문 법구경(法增比丘)
1-13
屋蓋不遮密,雨水必浸入,
心意不善修,貪欲必侵入。
1-14
屋蓋若遮密,雨水不浸入,
心意善修持,貪欲不侵入。
6. 일어 법구경(西津紘一)
1-13
屋根を葺かないならば
雨が降れば
漏るように
心を育てなければ
欲情の雨が漏るでしょう。
1-14
屋根を葺くならば
雨が降っても
漏らないように
心を育てたならば
欲情の雨が漏らないでしょう
7. 법구경 인연담
1) 영어 인연담(Daw Mya Tin)
While residing at the Jetavana monastery in Savatthi, the Buddha uttered Verses (13) and (14) of this book, with reference to Thera Nanda, a cousin of the Buddha.
Once the Buddha was residing at the Veluvana monastery in Rajagaha when his father King Suddhodana repeatedly sent messengers to the Buddha requesting him to visit the city of
On the third day, there was the marriage ceremony of Prince Nanda, a cousin of the Buddha. The Buddha went there for alms and handed over the alms bowl to Prince Nanda. The Buddha then departed without taking back the bowl. So the prince, holding the bowl, had to follow the Buddha. The bride, Princess Janapadakalyani, seeing the prince following the Buddha rushed forth and cried out to the prince to come back soon. At the monastery, the prince was admitted into the Order as a bhikkhu.
Later, the Buddha moved into the monastery built by Anathapindika, at
Knowing this, the Buddha, by supernormal power, showed Nanda, the beautiful female devas of the Tavatimsa world who were far prettier than Princess Janapadakalyani. He promised to get them for Nanda, if the latter strove hard in the practice of the Dhamma. Other bhikkhus ridiculed Nanda by saying that he was like a hireling who practised the Dhamma for the sake of beautiful women, etc. Nanda felt very much tormented and ashamed. So, in seclusion, he tried very hard in the practice of the Dhamma and eventually attained arahatship. As an arahat his mind was totally released from all attachments, and the Buddha was also released from his promise to Nanda. All this had been foreseen by the Buddha right from the very beginning.
Other bhikkhus, having known that Nanda was not happy in the life of a bhikkhu, again asked him how he was faring. When he answered that he had no more attachments to the life of a householder, they thought Nanda was not speaking the truth. So they informed the Buddha about the matter, at the same time expressing their doubts. The Buddha then explained to them that, previously, the nature of Nanda was like that of an ill-roofed house, but now, it had grown to be like a well-roofed one.
Then the Buddha spoke in verse as follows:
Verse 13:
Just as rain penetrates a badly-roofed house,
so also, passion (raga) penetrates a mind not cultivated in
Tranquillity and Insight Development (Samatha and Vipassana).
Verse 14:
Just as rain cannot penetrate a well-roofed house,
so also, passion (raga) cannot penetrate a mind well-cultivated in
Tranquillity and Insight Development (Samatha and Vipassana).
* Sakadagami Fruition: Sakadagami Phala, 'fruit or 'fruition'. This immediately follows Sakadagami Magga which is the second Magga or the second stage of Enlightenment attained by one who has practised Insight Meditation.
2)우리말 인연담(진흙속의연꽃)
난다장로 이야기
부처님이 사왓티의 제따와나 승원에 머무르실 때, 부처님의 사촌인 난다(Nanda)장로에 대한 게송 13번과 14번을 읊으시었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벨루와나승원에 머무르실 때, 부처님의 아버지인 숫도다나(Suddhodana)왕은 연속해서 사자를 보냈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2만명에 이르는 아라한들과 함께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까삘라왓투에 도착하자 부처님은 친척들에게 웻산따라 자따까(Vessantara Jataka)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두 번째 날, 부처님은 시내로 갔었는데 “웃띠테 납빠맛제이야(Uttitthe Nappamajjeyya..., one should arise and should not be unmindful.. )”로 시작 되는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숫도다나왕은 수다원과를 얻었다.
궁전에 되돌아 오자 부처님은 “담맘 짜레 수짜리땀(Dhammam care sucaritam..., one should practise the Dhamma...)”으로 시작 되는 게송을 읊었는데, 이 게송을 듣고 부왕은 사다함과를 얻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라훌라의 어머니의 노고에 감사하여 짠다낀나리 자따까(Candakinnari Jataka)를 설하였다.
3일째 되는 날, 난다왕자의 결혼식이 있었다. 난다는 부처님과 사촌사이이었다. 그날 부처님은 탁발하러 나갔는데 난다에게 탁발용 발우를 떠 넘겼다. 그런데 그 발우를 되 가져 가지 않으채 출발 하였다. 그러자 왕자는 발우를 들고 부처님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자나빠다까랴니(Janapadakalyani)공주는 왕자가 부처님을 따라가는 광경을 보고서 왕자앞으로 달려가, 다시 되돌아 올 것을 요청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을 따라 승원에 온 왕자는 비구가 되기로 결심 하였다.
후에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가 사왓티의 제따공원에 건설한 새로운 승원으로 옮겼다. 난다도 그곳에서 머물렀지만 만족 스러워 하지 않았고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여 비구가 된 것이 그다지 즐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그 곳에는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자나빠다까랴니공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난다에게 삼십삼천의 아름다운 여성을 보여 주었다. 그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자나빠다까랴니공주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처님은 난다에게 열심히 담마를 공부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 하였다.
다른 비구들은 난다가 단지 아름다운 여성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담마를 공부 한다고 비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난다는 매우 난처 해졌고 또 부끄러워 했다.
그래서 난다는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담마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다. 아라한과를 얻은 결과 그의 마음은 완전히 모든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운 난다에게 약속하였던 사항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부처님은 내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난다가 비구생활을 만족스럽지 않게 보낸 것을 안 비구들이 어떻게 그가 극복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난다는 더 이상 속세의 가장이 되고자 하는 집착이 사라졌다고 대답 하였다.
이말을 들은 비구들은 난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동시에 그들이 난다에 품었던 의심도 말하였다.
부처님은 그 말을 듣고, 자연인으로서의 난다는 지붕이 새는 집과 같았는데, 지금은 잘 역어진 지붕과 같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시었다.
마치 성글 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 듯이
굳게 수행되지 않은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든다.
마치 튼튼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쉽게 스며들지 못하듯이
굳게 수행된 마음에
탐욕과 갈망은 쉽게 스며들지 못한다.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로서 출가하여, 최초의 동진출가(童眞出家) 라훌라 존자 이야기 (0) | 2010.07.22 |
---|---|
자신의 악행을 되새겨 본다는 것, 법구경15 쭌다수까리까 이야기 (0) | 2010.07.16 |
불교와 진검승부, 청정도론에서 보는 갈애의 그믈과 위빠사나 통찰지의 검(劍) (0) | 2010.07.10 |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경(Mangala sutta, 망갈라숫따,길상경)에서 (0) | 2010.07.07 |
“제 속에 욕망의 괴물이…”성폭행 시대에, 불교적 해법과 무인작용심 (0) | 2010.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