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법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 범천의 권청과 이광수의 청법가(請法歌)

담마다사 이병욱 2010. 7. 31. 12:13

 

법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 범천의 권청과 이광수의 청법가(請法歌)

 

 

 

지옥에 갈것이 뻔한데

 

길거리나 전촐에서 열심히 전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전도사라고 불리우는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 있다. 자신이 느낀 벅찬 감동을 아직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만 한다고 하는 의무감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불신자들은 모두 불쌍해 보일 뿐이다. 그냥 그대로내버려 두면 모두 지옥에 갈것이 뻔한데 그렇게 손 놓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하고 툭 던진다거나, 전철에서 모든 사람들이 듣던 말던 자신이 하고 싶은 설교 아닌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여서 타인에게 무례하게 보일지라도 믿어라하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전혀 무례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법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깨닫게 되면 이를 전달 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이다. 그래서 진리라고 생각 하는 바를 알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도리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귀한 진리일지라도 받아 들이는 사람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하여 bbs불교강좌의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리는 지혜가 있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법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고귀한 법이라도 그것이 괴로움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정법을 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서로가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주는 자의 입장에서는 받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받는 자는 원하지 않는데도 강요한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서로가 정법을 훼손한 과보가 따릅니다.

그래서 법은 원하지 않는 자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법이 있어도 그것은 아는 자의 것입니다.

 

(붓다의 수행법 - 위빠사나. 7 17일 법문 녹취,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4uuU/77  )

 

 

원하지 않는 자에게 진리를 설해 보았자 오히려 그에게 괴로움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진리는 원하는 자에게 설해야 하고, 법을 청하는 자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진리라는 것이 유일신교와 같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여 무차별적으로 듣건 말건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법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내지 진리를 찾는 자가 법을 설해 주기를 요청 하면 그 때 법을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항상 있는 것이지만, 이처럼 진리는 원하는 자 또는 지혜있는지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빅뉴스를 접하고

 

법이나 진리는 청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나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좋은 예가 초기경전에서 보여 지는 범천의 권청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성취하고 난 후에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깨달은 이 법을 누가 알아 줄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추구 하는 식욕, 색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과 같은 오욕락을 떠나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류도(逆流道)’에 대하여 누가 이해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법을 설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 때 이런 사실을 신통으로 알게 된 색계초선천의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梵天)이 부처님 앞에 나타나 법을 설하시도록 간청하였다. 이렇게 법을 청하게 된 배경은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불사의 문을 여는 위없는 깨달음이었기 때문이다.

 

 

 

 

범천 사함빠띠(Brahma-sahampati)의 권청

사진 www.sintoniasaintgermain.com.br/...ca2.html

 

 

 

부처님의 무상정득각이 있기 전까지 세상에는 오로지 선정 수행만 있었다. 이 선정수행한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수명대로 사는 존재들에 있어서 나고 죽기를 거듭하는 한량없는 윤회를 벗어 날 수 없었다.

 

그런데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불사의 진리를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그들의 신통으로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빅뉴스이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안 범천 사함빠띠가 세상에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도가 세상의 흐름과 완저히 거꾸로 가는 역류도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 줄리가 없다고 생각 하고 그 대로 열반에 들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범천이 부처님 앞에 신통으로 나타나 깨달은 법을 설해달라고 간청한 것이 범천의 권청이다.

 

첫번째 권청과 나만 피곤할 뿐..”

 

그래서 범천은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뒤에 세존을 향해서 합장을 하며 다음과 같이 간청 하였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해주소서.

선서께서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나,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사함빠띠는 다시 게송으로 간청 하였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들이 설해져있으니

때 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입니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게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루어진 누각에 올라서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범천은 부처님이 깨달은 법으로 고통의 바다인 윤회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불사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한다. 법을 설하면 누군가 알아 듣는 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런 범천의 간곡한 부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법은 깊고, 보기가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가 다한 경지,

집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른 경지,

그리고 열반의 도리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과 고통을 소멸에 이른 경지,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 하지 못한다면 설한 사람만 피곤할 뿐이라고 사함빠띠의 첫번째 권청을 거절한다.

 

두번째 권청과 역류도인데..”

 

첫번째 권청에서 거절당한 사함빠띠는 포기 하지 않고 다시 법을 설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두번째 권청이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게송으로 간청 하였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이 설해져있으니

때 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도록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루어진 누각위에 올라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범천 사함빠띠는 첫번째 권청에서 하였던 말을 두번째 권청에서도 반복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법은 깊고, 보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한 부처님은 다시 똑 같은 게송을 반복하였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집착과 분노에 억눌린 자들은 이법을 원만하게 깨달을 수 없다.

 

흐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섬세하니,

집착에 물든 자들이 어떻게 이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부처님 역시 첫번째 권청에 대한 거절의 내용과 거의 같은 의미의 말을 반복 한 것이다. 거절의 이유는 부처님이 설한 법이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역류도(逆流道)이기 때문에 누가 이법을 알 수 있을것인지 의문하는 것이다.

 

세번째 권청과 죽은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말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번째 거절 당하고 두번째 마저 거절 당하면 단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보통이 아님을 안 범천은 세번째 권청하기에 이른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도 쇠퇴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번째와 두번째 권청하였던 내용과 똑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범천의 청이 지극함에 감동 받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 불안(佛眼)으로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부처님이 본 세상에는 여러 중생들이 있음을 알았다. 먼지가 적은 중생, 먼지가 많은 중생, 감각기관이 날카로운 중생, 감각기관이 무딘 중생, 자질이 좋은 중생, 자질이 나쁜 중생, 가르치기 쉬운 중생, 가르치기 어려운 중생등 실로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저세상의 두려움을 의식하며 지내는 중생이 있는가 하면, 저세상의 두려움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중생도 있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세상에는 다양한 중생들이 있는 것을 알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사함빠띠에게 게송으로 말하였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 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기로 하였음을 알고 범천 사함빠띠는 공손히 절을 한 다음에 부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돈다음 물러 갔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부처님이 사함빠띠에게 하였던 말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펴는 조건으로 죽은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말것을 당부 하였기 때문이다. 이 것은 부처님이 펴는 조건으로 모든 생멸들에게 내건 약속이자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원하신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교 전통의 제사를 지낼 때 수백 마리의 소, , 돼지 따위를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의 참된 삶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살생을 금하는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지 말 것을 요청하였지만 또 한가지 간과해서 안될 사항이 있다. 죽은 자는 이미 새로운 생을 받아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권청, 이광수의 청법가

 

이렇게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법을 청하지 않았는데 법을 일방적으로 설한 다면 법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법은 세번 청해야 설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런 전통은 지금의 불교법회에서도 볼 수 있다. 법회를 시작 하기 전에 법을 청하는 청법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청법가는 누가 만들었을까.

 

마성스님의 인터넷 강의(불광법회, http://www.bulkwangsa.org/movie/?sdir=recom_movie&tfile=view&SID=20)에 따르면 청법가는 춘원 광수가 만들었다고 한다.

 

불교전통에서 법을 설하기를 간청하는 청법게가 있었는데 이 청법게를 바탕으로 이광수가 작사 하고, 이찬우씨가 곡을 붙인 것이 요즘 법회에서 부르는 청법가인것이다.

 

그렇다면 청법게는 어떤 내용을 구성 되어 있을까. 마성스님의 글 옛인연을 잊도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청법게(請法偈)

차경심심의(此經甚深意)          이 경의 깊고 깊은 뜻을
대중심갈앙(大衆心渴仰)          대중들은 목마르게 갈구합니다.
유원대법사(唯願大法師)          오직 원컨대 대법사님께서는
광위중생설(廣爲衆生說)          중생들을 위해 널리 법을 설해주소서."

 

 

다음으로 춘원 이광수가 작사한 청법가 1절은 다음과 같다.

 

 

청법가(1)

덕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
옛인연을 잊도록 새인연을 맺도록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하옵소서.

 

 

우리나라의 대문호 이광수가 불교로 개종한 후에 효봉스님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는데, 재래 불가의 청법게를 본받아 청법가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청법가가 청법게 보다 더 잘 다듬어진 훌륭한 글이라 보는 것이다. 이를 두고 마성스님은 앞으로 이광수의 청법가만한 것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

남양주시 봉선사에 있다

 

 

 

 

옛인연을 이을 것인가 잊을 것인가

 

그런데 청법가에서 문제 되고 있는 것이 누군가 가사 내용을 일부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부분이 옛인연을 이어서 새인연을 맺도록 하는 구절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청법가를 부를 때 옛인연을 이어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부르기에 표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임의로 고친 것인데 크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옛인연을 이어서~가 아니라 옛인연을 잊도록~하고 바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법구경의 칠불통계게의 예를 들어 옛인연을 이어서~가 잘 못 되었음을 지적 한다.

 

 

 諸惡莫作(제악막작)              일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衆善奉行(중선봉행)              착한 공덕을 힘껏 행하며

 自淨基意(자정기의)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법구경 183게송)

 

 

칠불통계게에서 제악막작(諸惡莫作)은 옛인연을, 2구 중선봉행(衆善奉行)은 새인연에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옛인연은 잊어야 하는 것이고, 새인연은 맺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옛인연을 이어서가 아니라 옛인연을 잊도록 하는 것이 바른 것이고 이광수의 원래 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옛인연을 잊는 다는 표현은 경전 도처에서 발견 되고 있다. 그 두가지 예를 더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원단일체악(願斷一切惡)          일체의 악은 모두 끊기 원이며,
원수일체선(願修一切善)          일체의 선은 모두 닦기 원합니다.
원공제중생(願共諸衆生)          원컨대 모든 중생이 다함께
동성무상도(同成無上道)          위없는 도를 함께 이루어지이다.

 <소심경(小心經)에 나오는 삼시게(三匙偈)>

 

 

이 게송에서 일체의 악을 끊는다는 것은 곧 옛인연을 끊는다는 것을 말하고, 일체의 선을 닦는다는 것은 새인연을 맺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예는 다음과 같다.

 

 

신막념과거(愼莫念過去)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역물원미래(亦勿願未來)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사이멸(過去事已滅)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복미지(未來復未至)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中阿含經, 온천림천경(溫泉林天經)>

 

 

이 게송에서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능한 빨리 잊어 버리고, 또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바라지 말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좋은 인연이든 나쁜인연이든 과거를 잊도록 하는 것이 이광수의 청법가의 내용이다.

 

불교는 품격높은 종교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크게 두가지 의미가 있다. 빠알리어로 법을 담마라 하는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일체현상으로서의 법이 있다. 이 경우 영어권에서는 담마를 대문자와 소문자로 써서 구분 한다.

 

부처님이 설한 84천법문의 경우 대문자를 써서 Dhamma라 하고, 일체현상을 나타낼 경우는 소문자를 써서 dhamma로 표기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법이리고 말할 때 진리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뜻하는 법을 설할 때 반드시 청법이라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아무나 붙잡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전달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법을 청해 줄 것을 요청 하는 자에게 법을 전달 해 주어야 법이 제대로 전달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 법을 주는 자의 경우 받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받는 자는 원하지 않는데도 강요한다고 화를 낼 것이다.

 

법과 진리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달 해야 한다. 진리가 항상 있지만 그 진리는 원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의 청법과 설법이 유일신 종교의 막무가내식 전도행위와 비교 되고,  또한 불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매우 품격높은 종교임을 알 수 있다.

 

 

2010-07-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