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무사안일의 한국불교, 스리랑카불교에서 배워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0. 7. 27. 12:23

 

무사안일의 한국불교, 스리랑카불교에서 배워라

 

 

 

 

 

 

 

의미 있는 기사를 발견하고

 

최근 교계신문에서 의미 있는 기사를 읽었다. 제목은 한국불교 중흥하려면 도시로 나가라라는 도발적인 기사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시행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스리랑카 수만길라 승정은 시몽스님과 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의 스님들이 산에만 살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제안합니다. 부디 한국불교가 대도시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유력한 사람들, 부자들, 여론지배층은 다 대도시에 삽니다. 교육받은 스님들이 대도시로 가서 봉사하고 교화해야 합니다.

 

(한국불교 중흥하려면 도시로 나가라 ,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043&thread=23r04) 

 

 

이 한마디에 한국불교의 모든 문제점을 다 지적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사는 곳에 나가서 교화를 해야 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님들의 교육이 필수적이라 말한다.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스님들의 교학수준은 세계최고 수준이라 한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을 2300년간 지속 하고 있는 스리랑카는 스님들이 설법할 때 부처님당시의 언어인 빠알리어를 사용 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스님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빠알리어를 알기 때문에 빠알리어로 법문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스리랑카인가

 

스리랑카를 흔히 교학의 나라라고 한다. 남방불교국가에서 미얀마를 수행의 나라, 태국을 계율의 나라라고 보통 말한다. 이에 대비하여 북방불교 국가에서 일본을 교학의 나라, 한국을 수행의 나라, 중국을 계율의 나라라고 비교 하여 말하기도 한다.

 

교학의 나라 스리랑카는 부처님당시의 테라와다불교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울 것이었다. 마성스님의 스리랑카 법난사를 보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BC3세기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법난과 불교탄압이 있었는데, 오늘날 잘 지켜 낸 것은 오로지 부처님 법이 오래 동안 지속 될 수 있도록 몸을 바친 승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이 훼손되지 않고 후대에 잘 전승시켜서 법의 바퀴가 끊임없이 굴러 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는 BC3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아소카대왕당시 3차결집이 있었는데, 그 때 당시 비정통파승려와 비불교적인 요소를 추방하고 테라와다불교를 정통으로 인정히였는데, 이 때 경장과 율장과 논장으로 구성된 빠알리삼장이 완성 되었고, 아소카대왕은 세계각지의 10군데에 대규모 전도단을 파견하여 불법을 홍보 하였다. 그중 한 곳이 스리랑카이었다.

 

세계최고의 정신문화유산

 

특히 스리랑카는 아소카대왕의 아들인 마힌다장로가 직접 전도 하였는데 이 때 당시 공인불교인 테라와다의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를 함께 가져 왔다. 이들 경전을 지켜 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청정도론의 해제에 실려 있다.

 

청정도론의 해제에 따르면 인도대륙에서 성립된 마하야나(대승불교)와 같은 새로운 사조의 불교로 부터 공인된 불교를 지켜 내기 위하여 빠알리삼장과 주석서를 싱할리 문자로 가두어 전승 한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부처님의 원음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사조의 불교를 일종의 불교의 타락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려 육칠백년동안 싱할리문자로 가두어 지킨 공인불교는 5세기에 다시 빠알리어로 옮겨져서 오늘날 원음의 손상없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도올 김용옥은 어느 인터넷 강의에서 ‘21세기의 정신문화를 주도할 세계최고의 정신문화유산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실제로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확산 되고 있고 또한 위빠사나 수행법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인도양의 진주와 눈물

 

스리랑카를 인도양의 진주 또는 인도의 눈물이라 불리운다. 부처님의 원음을 2300년동안 훼손없이 잘 보존 하였다는 사실은 진주와 같고, 근대에 이르러 불법의 맥이 끊길 뻔한 법난이 있었던 것은 눈물과 같다.

 

역사적으로 스리랑카가 국권을 빼았기고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간 때가 16세기 부터이다. 1505년부터 1658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658년부터 1796년까지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며, 1815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48년 독립했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는 440년간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불교문화와 전통은 무참하게 파괴되고 짓밟혔다.

 

이런 와중에 한 때 상가의 맥이 끊기기도 하였다. 이를 복구 한 것이 태국과 미얀마를 통해서이다. 1753년에 태국의 스님을 초청하여 비구계를 받아 복구하였는데 스리랑카 최대종파인 태국의 명칭을 딴 씨암파의 시작이라 한다. 1802년에 미얀마로부터 비구계를 받아 복구한 종파가 라만냐파라 한다.

 

이처럼 단절된 법맥을 같은 상좌불교 국가로부터 복원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스리랑카가 440년간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단절된  불교의 법맥을 유지하고 21세기 정신문화를 주도할 빠알리 삼장을 잘 지켜 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스리랑카의 불자는 얼마나 될까.

 

스리랑카의 인구는 2천만명이다. 그 중 불교도가 70%정도로서 1400만명이다. 우리나라 불자인구 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는 불교도 뿐만 아니라 힌두교도가 15%에 달하고, 이슬람교가 7.6%, 식민지 시절의 영향으로 인한 기독교도 6.2%에 달한다.

 

이처럼 다종교국가이지만 스리랑카는 모든 상좌불교도 국가가 그렇듯이 불교국가나 다름없다. 국가에서 불교를 적극 지원하고 있고, 또한 전세계에 테라와다불교를 전파 하는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큰일난 한국불교

 

한국과 스리랑카는 과거 식민통치를 받았다는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가 무려 440년간의 식민통치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맥을 이어가 오늘날 세계불교를 주도 하는 불교국가가 되었지만, 한국불교는 그렇지 못하였다는데 있어서 차이가 있다.

 

440년에 비하여 불과 36년간 식민통치를 받은 한국불교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불자수24%에 지나지 않고, 불과 10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기독교에 정치, 경제, 사회등 전분야에 걸쳐서 주도권이 상실된 듯한 느낌이다. 더구나 도시에서 불교는 찾아 볼 수 없고, 산중에 가야만 불교를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없다보니 국민들은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드믈다. 동네에서 주민총회를 할 때 교회에서 하는가 하면, 교회 투표소가 생겨 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가 형성 되어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 기자, 조계종 큰일 났어요. 한 자리 맡아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은 거의 3무로 통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식과 무위도식과 무사안일 이 세 가지로. 공부 안해 무식하고, 전혀 생산적 일을 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 사니 무위도식이고 무사안일이지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대로 가면 안 망하면 더 이상한 것이지….

 

(이학종기자의 칼럼, http://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886&thread=24r24)

 

 

조계종의 중진스님이 한국불교에 대하여 3무라고 평가한 것이다. 스님들의 무식과 무위도식과 무사안일한 현상에 대하여 질책한 것이다. 한국불교 스님들의 3무 현상에 대하여 더 살펴 보았다.

 

왜 무식할까

 

첫째로 스님들이 무식하다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니 사람 사는 곳에 나가서 설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설법을 한다 해도 일회성 내지 특별법회 위주이고 정기적인 설법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한국불교의 강원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저의 주장은 수백 년 내려온 서당식 현 강원 교육은 스님들을 무능력자로 배출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의 한도 내에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유물관에나 있어야 할 그런 구태의연한 서당식 교육이 강원에서 아직도 그대로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강원교육은 현장에서 즉각 써 먹을 수 있는 필요한 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고 써 먹을 데가 없는 죽은 교육입니다. 지금 한문으로 된 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일아스님)

 

 

마치 암호문은 해독하는 것 같은 한문경전은 난자(難字)를 익히는데 노력이 들 뿐만 아니라 지도강사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단 한 줄도 진도를 나 갈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더구나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300년간 서당식 강원교육을 유지해 온 결과 무능력자들만 배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어떻게 시대와 소통을 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이다.

 

왜 무위도식할까

 

둘째, 스님들이 무위도식한다는 것이다. 중진스님의 이야기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으니 무위도식한다고 표현 하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여로모로 교회와 비교 된다.

 

도시에서 교회는 많지만 절 구경하기가 힘들다. 불교와 기독교세가 대략 일대일 정도라고 하지만 도시에서 느끼는 체감은 항상 10 1이다.

 

교회가 10개 된다면 절은 1개정도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101의 법칙은 헌금대 시주금이나 츨석률에도 적용 된다. 그러나 피부로 느끼기에 101이 넘는다.

 

사는 동네에 교회만 있고 절이 없는 경우가 수두룩 하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동네에도 3000여가구에 교회가 14개이지만 절은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없고 오로지 산에 가야 불교를 볼 수 있는 현실은 종단과 스님들의 책임이 크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은 살아 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유치원을 만들고, 청소년을 위하여 공부방을 만든다. 또 노인들을 위하여 노인방을 만들고 점심도 제공한다. 이처럼 지역에서 지역과 함께 하는 지역공동체를 지향하다 보니 교회끼리 생존경쟁에 나선다.

 

이렇게 죽기살기로나서는 교회와 달리 스님들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입산 하였는데 다시 세상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맞지 않아서일까 사람사는 곳에 절과 스님을 보기 힘들다.

 

스님이 5만명이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에 스님은 무척많다. 중앙승가대 김응철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종교별 교역자

  

교역자

 

불교

49,408

승려(조계종은 13,860)

개신교

94,615

목사(58,404개의 교회)

가톨릭

14,597

신부, 수녀, 수사(1,511개 교당)

자료: 문화체육관광부, 2008년 말 현재

(포교와 신행, 구태를 벗어라 / 김응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40)

 

 

김응철교수의 논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스님들은 거의 5만명 가까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이 70%를 차지 한다고 하는데 조계종 스님은 1,3860명으로서 전체의 28%밖에 차지 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목사가 9만명으로서 사람사는 곳이라면 교회천지인데, 스님의 숫자가 5만명 가까이 되는 불교의 절은 왜 찾아 보기 힘들까. 그 많은 스님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길레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없을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우리나라 스님들이 너무 쉽게 살아 가는 것이 아닌가 대한 기사를 보았다.

 

 

스님이 된 것 자체가 마치 누굴 위한 것처럼 승복 입은 자체를 대단한 일처럼 여깁니다. “난 스님이오하는 스님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스님상이란 것이 하나 더 추가 되지요, 삭발하고 잿빛 옷을 입은 외양만 갖추고 부처님 얼굴에 먹칠하는 스님들을 너무 자주 보았습니다.

 

(취재 후그 뒷이야기, 김나미기자, http://blog.naver.com/kimnami57?Redirect=Log&logNo=120042304055)

 

 

이렇든 승복만 입으면 누군가 보시하고 도와 주기 때문에 굳이 사람사는 도시에 나가 죽기 살기로 포교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포교당을 내서 포교활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갈등과 재정문제에 봉착 하면 바랑하나 매고 훌쩍 떠나 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도시는 공동화 되고 그 무주 공산에 교회의 십자가만 올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어 불교는 오로지 산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시대가 된것이다.

 

왜 무사안일할까

 

셋째, 스님들이 무사안일 하다는 것이다. 공부를 안하니 아는 것이 없어서 설법도 못해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더구나 전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승가라면 무사안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다 트위터다 하여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시대는 변화 하는데, 여기에 적응하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니 국민들의 평균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각계각층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불교는 더욱 더 고립되고, 불교는 낡고 오래된 것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젊은이들에게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까지 불교가 우리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란 꿈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이 인터넷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았다.

 

 

“사찰 안에 있으면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의 고위층, 부유층이 살고 있는 강남, 서초, 송파, 강동과 같은 곳은 이미 불교가 제3의 종교로 전락했다.

 

지금이야 수치상으로 최대종교니까 고개 숙일 뿐이다. 거품 빠지고 나면 그런거도 없어질 것은 뻔하다. 지금은 썩은 도끼자루 잡고 있는 꼴이다.

 

(불교는 썩은 도끼자루 잡고 있는 꼴, 법안스님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9516)

 

 

이 글이 나온 때가 2010 2월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개월전의 이야기인데 법안스님의 말대로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최근 기독교단체들이 잇따라 불교를 폄하 하는 광고를 일간지에 게제하고 있다. 특히 문화재 보존과 이용을 위한 정당한 예산집행을 문제삼는가하면 마치 불교 재산이 친일로 그저 얻은 불로소득인 것처람 표현해 국고에 환수하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마저 펼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템플스테이 같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사업도 문제삼고 있는데 이런 광고를 주도 하는 단체는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한국장로회총연합회, 한국교회평싱도단체협의회, 한국교회언론회, 민주복음화부흥협의회 등 5개 단체이다.

 

이제까지 산발적으로 개인이나 교회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한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특히 장로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에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인 태클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안스님이 지적한대로 그들은 불교의 거품을 본 것일까. 더구나 무사안일로 일관하고 있는 스님들이 썩은 도끼 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님들이 도시로 진출해야

 

불자들은 불교가 더욱 더 발전하기를 원하고 이나라가 불국토가 되어 부처님법이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 달리 승가사회는 어느 조계종 중진스님의 지적과도 같이 무식과 무위도식과 무사안일로 일관 하고 있다.

 

그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의 거품을 이야기 하는 스님은 불교의 스님들이 썩은 도끼자루를 들고 있는 형국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초래된 것은 종단과 스님들의 책임이 크다. 좀 더 엄밀히 말한다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은 수행과 더불어 포교활동을 해야 한다. 수행만 있고 포교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도시에 불교를 찾아 볼 수 없다. 더구나 기독교의 본격적인 반격도 시작 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태평하게 보이는 것이 한국불교의 모습이다.

 

앞서 언급한 스리랑카의 수만길라승정도 스님들이 도시로 진출할 것을 강력하며 다음과 같이 권한다.

 

 

대도시에 가서 봉사에 주력하고, 직업교육도 시키고, 복지활동에 앞장서는 등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입니다. 사실 스님들의 절대 다수는 이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부류는 메디테이션, 즉 명상수행에 전념하는 스님입니다. 이 스님들은 오직 풀타임 명상수행만을 합니다. 이들은 숲속에 살며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는 200∼3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수만길라 종정, 한국불교 중흥하려면 도시로 나가라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043&thread=23r04)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절대다수가 대도시에 살면서 포교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에 25천개의 사원이 있고, 각 사원은  불교학교를 가지고 있는데 사원마다 6세부터 18세까지의 1200명정도 된다고 한다. 사원을 중심으로 신행생활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사원을 중심으로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어서 마치 우리나라의 교회공동체를 보는 듯 하다.

 

그런 스리랑카에 숲속에서 수행하는 스님은 불과 2003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와 정반대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외국스님 모셔오기

 

스스로 개혁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공무원연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무무원들에게 맡겨 놓으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듯이 한국불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 개혁하지 못한다면 외부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 수만길라승정과 대담한 시몽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불교의 변화는 한국 승려만 가지고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 스님들에게는 불편한 말이겠지만, 우리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한편으로는 보다 우수한 스리랑카 스님들이 한국에 와서 불교를 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시몽스님,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043&thread=23r04)

 

 

우수한 외국스님을 모셔와서 불교를 전파는 하는 것도 고려해 보자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외국의 훌륭한 문화룰도입하면 된다. 불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1700년전통보다 2600년 전통을

 

흔히 한국불교의 역사를 1700년이라 하지만, 지금처럼 낡고 오래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한 이미지로 각인 되어 있다면 젋은세대에게 결코 감명을 주지 못할 것이다. 아쉽게도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지금까지 이런 인식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불교 1700년 전통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불교전체 역사인 2600년전통을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 전통 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더구나 부처님의 원음이 훼손없이 전승되어온 불교를 이제 접하게 된 것은 이시대의 행운이다.

 

더구나 한국불교가 현재와 같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외도들의 간섭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한국불교가 커다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2600년 전통의 불교가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0-07-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