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영원에 대한 집착과 죽음의 본능,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집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7. 17:39

 

 

영원에 대한 집착과 죽음의 본능,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집성제

 

 

 

 

 

 

 

나이 40이상 되면 무슨 낙으로

 

우리 민요의 대부분이 한에 관한 것이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삶에 대한 한풀이의 성격이 짙다. 그런 민요중에 한 대목이 있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젊고 힘있을 때 즐기자는 것이다. 늙어지면 놀힘도 없고, 쭈굴쭈굴한 얼굴과 망가진 몸매를 누가 보아 주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60년대 다음과 같은 노래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에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청춘은 다시 오지 않고 피었다가 시들어지는 꽃과 같기 때문에 마시고 또 마시고, 취하고 또 취해서 이밤이 새도록 춤을 추자는 것이다.

 

현대라고 해서 청춘예찬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 방송과 매스컴에서는 연일 노래와 광고로 젊음의 찬가를 부른다. 노래의 가사나 상업광고를 보면 젊음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놀고 즐기는 것을 젊음과 청춘의 특권으로 생각 한다면,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것을 용인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과 같이 화려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더 받아 들일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런 그들에게 늙음은 상상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처럼 생각 한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있다. 나이 40이상 되면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느냐 것에 대한 회의감이다. 젊음도 가고, 힘도 없고, 매력도 없는데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럴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특히 인기를 먹고 사는 화려한 연예인들이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피어 나는 꽃처럼 젊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 이처럼 변함 없는 진리를 거슬러서 이 밤이 새이도록 취하고 또 취해서 춤을 추어 보지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고통과 슬픔의 실질적 요인은

 

부처님은 사성제를 발견 하였다. 부처님이 발견한 사성제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진리임을 말하는 1성제와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2성제, 그리고 그 고통의 소멸에 관한 3성제, 마지막으로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인 4성제를 설하셨다.

 

고통과 슬픔은 왜 일어날까.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명확하게 갈증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갈증을 빠알리어로 딴하(Tanha)’라 한다. 딴하의 문자적 의미는 갈증을 뜻하지만 12연기에서는 ()’ 또는 갈애로 표현 된다. 이런 갈애의 실질적 의미는 갈망욕망때문이다. 우리가 고통받고 슬퍼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갈망과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의 요인이 오로지 갈망하나만 있을까. 실은 그렇지 않다. 분노도 있고, 질투도 있고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주된 요인이 갈망이라는 것이다.

 

주된 요인으로서 갈망이 왜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깊이 분석해 보면 무지는 지성적측면이 강하고, 갈망은 감성적측면이 강하다. 사성제에서 부처님은 정서적 측면으로 갈망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다.

 

멸할 만한 자아도 영원히 지속할 만한 자아도

 

고통의 기본적 원인은 인간존재에 만연된 깊은 불만족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영혼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에 생성 되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나 또는 나 자신이 있다라는 개념에 따라 야기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나가 있다고 생각 하기 때문에 갈망을 추구 한다이런 갈망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 평범한 형태의 갈망이다.

둘째, 존재에 대한 갈망이다.

셋째, 비존재에 대한 갈망이다.

 

 

평범한 형태의 갈망은 눈 코 입등 기본 감각기관을 통하여 우리는 사물을 받아 들이게 되는데, 이런 감각기관을 통하여 쉼 없이 즐거운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형태의 갈망이다. 

 

존재에 대한 갈망은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지금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젊음, 이 건강 또한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런 영원에 대한 집착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변치 않는 정신이나 영혼이 있어서 몸뚱아리만 바꾸어 환생한다고 믿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비존재에 대한 갈망 역시 나 자신에 근거한다.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망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다 물질이고 물질적 존재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오면 삶은 끝나는 것이고, 죽음과 함께 모든것이 끝난다는 관점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런 관점은 내생을 부정 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윤리적 행위도 믿지 않는다. 이런 파괴적 갈망에 대하여 프로이드는 죽음의 본능(Thanatos)’이라고 불렀다.

 

존재에 대한 갈망과 비존재에 대한 갈망 모두 나 자신에 근거 하고 있다.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 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살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비존재의 갈망은 자신을 완전히 멸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갈망과 비존재에 대한 갈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삶과 죽음은 항상 같이 있는 것처럼, 존재에 대한 갈망과 비존재에 대한 갈망 역시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양극단을 거부 하였다. 자아가 없다거나 자아가 영원하다는 개념을 모두 거부 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 양극단을 거부 한 것은 멸할 만한 자아도 영원히 지속할 만한 자아도 궁극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케세라세라와 갈망

 

우리 민요중에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60년대 가요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에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라는 노래는 전형적인 케세라세라이다.

 

될대로 되라는 듯한 이런 노래가사를 보면 인간의 세가지 갈망을 보는 것 같다. 항상 즐거움만 추구하는 나 자신이 있어서, 그 젊음과 청춘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나가 늙어지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멸하고픈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자신이 있다고 생각 하여 갈망만을 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슬픔과 고통으로 귀착 될 것이다. 

 

 

본 글은 불교tv의 아상가교수의 사성제중 집성제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2010-08-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