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열반은 이 생에서 이루어야,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멸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9. 23:07

 

 

열반은 이 생에서 이루어야,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멸성제

 

 

 

 

 

 

불만족 스럽고 슬픈 사람이 되는 이유

 

어느 존재이든지 태어나면 언젠가 죽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죽는다고 생각 하면 왜 슬퍼질까. 그 것은 어떤 시점에서 모든 것을 놓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것이 죽음을 회피 하기 위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좋아 하는 음악에 심취하고 하는 것들이 늙어 가고 병들고 죽는 것을 잊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다. 좋아하는 것은 무지하게 좋아 하지만, 싥어 하는 것은 무척 싫어 한다. 이렇게 편파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내 감각기관에 들어 오는 모든 것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는 것등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과 연결 된다. 그런데 그런 반응은 매우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은 것 두가지 중의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상이 마음안에 들어 올 때 그들을 좋아 하지도 싫어 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과 슬픔이 일어 나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대상에 대하여 갈애와 욕망이 일어 날 때 우리는 매우 불만족스러워한다. 일생에 걸쳐서 그렇게 고투 하면서 무언가 얻으려고 하고, 또 얻곤한다. 그러나 하나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렇게 평생동안 우리는 만족을 얻으려 애쓰지만 결국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 결과 불만족 스럽고 슬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상황으로 부터 벗어 나야 한다. 이런 것들로 부터 놓여 날 때 그 사람은 아라한이나 깨달은 사람으로서 해탈된 마음으로 살아 가게 된다. 그럴 때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너무나 단순 명료한 3

 

사성제에서 1제는 고통이고, 2제는 고통의 근원이라고 말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은 삶의 현실이고, 고통의 근원은 갈애이다. 3제는 고통의 소멸이고, 4제는 고통의 소멸로 가는 도닦음의 길이다.

 

여기에서 3제와 2제는 연결 되어 있다. 갈애와 욕망이 고통이 일어남의 근원이라면, 3제인 고통의 소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갈애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치는 것, 포기하고 단념하고 보내고 놓아 버리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다. 만약 고통의 근원이 갈애라면, 고통의 소멸이라는 것은 그 갈애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 또한 그치게 하는 것이 일관적인 논리를 가지는 설명이 될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고통의 소멸을 갈애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갈애, 욕망, 갈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데, 이들을 놓아 버리면 고통도 끝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3제는 너무나 단순 명료하다. 그러나 이를 좀 더 깊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불어서 끈다는 것

 

불교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불교를 공부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열반이다. 열반은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이자 궁극적 목적지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통의 소멸, 바로 그것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열반을 증득 하면 고통은 그친다. 그렇다면 열반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열반을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Nirvana)라고 하고, 빠알리어로 닙바나(Nibbāna)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불어서 끈다라는 뜻이다. 촛불이나 불을 불어서 끄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불어서 끈다는 것일까. 불이다. 불은 무엇일까. 인간의 삶에 번뇌를 가져 오는 것들로서 갈애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열반이란 번뇌의 불을 불어 끄는 것을 말한다. 이런 불은 어디에 있을까.

 

번뇌의 불 중의 하나인 갈애는 우리 내면 즉, 마음속에 있다. 무지 역시 내면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마음속의 그것을 제거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예를 들어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그 것은 아름답다라고 해석 하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대로 있을 뿐인데, 어떤 것은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떤 것은 추하다고 이름 붙이는 것은 우리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할까. 바로 그것이 우리의 갈애이기 때문이다.

 

예쁘고 아름답고 귀여운 것을 보면 가지고 싶어 하고, 가지기 위하여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런 갈애가 우리내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갈애는 안에서 제거해야 한다. 열반의 실현은 바로 이런 번뇌들을 내면에서 내 보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이고, 열반은 어디에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열반은 사성제가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열반은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우리가 얻는 상태를 말한다. ,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열반은 이 생에서 이루어야

 

고래로 부터 지구상에 나타나고 사라진 수 많은 종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죽은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열반은 우리가 이 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다. 그래서 부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닙바나(열반) 또는 빠리닙바나(Parinibbna, 般涅槃, 반열반, 무여열반, 완전한 열반)라 한다.

 

열반이나 반열반은 우리가 바로 이생에서 이루는 것이다. 불교문헌 중에 테라가타(Theragatha, 장로게)와 테리가타(Therigatha, 장로니게)가 있다. 5부 니까야중의 하나인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에 속해 있는 경전으로서, 테라가타는 비구들의 열반체험을 이룬 사례의 이야기이고, 테리가타는 비구니들의 열반체험을 담은 것으로 비구와 비구니 수백명의 열반체험을 알려 주는 문헌이다.

 

이들 문헌이 죽음을 담은 것이 아니라 다만 열반을 성취한 데서 오는 청정해탈의 성과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체험 후에 그들은 자비지혜의 삶을 살아 갔는데, 남을 돕는다든가 하는 평범한삶을 살아 간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고 난후에

 

열반을 성취 하였다고 해서 그들이 결혼을 했다거나 가정을 이루었다고나 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비심과 지혜를 가지고 삶을 살아 간 것이다. 좋은 예가 부처님일 것이다.

 

부처님은 35세에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80세까지 살았는데, 45년간 무엇을 하였을까. 부처님은 깨달았을 때 열반 또는 반열반에 들었다. 그러나 그 후 45년간 부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사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은 또 무엇을 하였을까. 역시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라한 역시 깨닫고 나서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에서 가르치고 인도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 생에서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깨달음을 얻도록 도우며 살아 가는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열반을 이루기 위하여 죽을 때 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성격을 바로 이 생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淸淨, Visuddhi)이란

 

불교문헌에서는 이런 상태를 묘사하기 위하여 두가지의 중요한 용어를 사용한다. 비런 그 것은 청정(淸淨)과 해탈(解脫)이다. 청정을 빠알리어로 위숫디(Visuddhi)라하고, 해탈을 위뭇띠(Vimutti)라 한다.

 

청정은 열반의 유사어로 사용 되어 왔는데, 이는 갈애나 욕망이 마음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욕망을 제거하면 그것이 바로 마음이 청정해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번뇌라 불리는 것들이다.

 

마음속에 번뇌는 불교에서 탐욕(Ra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라 하여 삼독이라 말한다. 이런 번뇌등을 제거 하면 마음은 청정을 얻는 다는 것이 기본 개념이다.

 

해탈(解脫, Vimutti)이란

 

해탈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해탈은 빠알리어로 위뭇띠(Vimutti)라 하는데,  마음을 해탈 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해탈을 시사 한다. 마음을 무엇으로 부터 해탈 한다는 말일까.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청정의 측면으로 번뇌가 있고, 중생의 삶 안에는 인간을 속박 하는 요소도 있다. 이런 것들로 부터 마음을 해탈 하는 것이다. 열반을 성취한 비구들의 이야기에서 항상 빠알리어 아사와(Asawa)’를 거론 한다.

 

아사와는 궤양이나 유입등으로 번역 된다. , 우리의 마음속에 깊숙히 뿌리 박은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탐진치와 같은 것들이 마음 깊이 뿌리 박고 있는 것이다.

 

오염과 속박에서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마음을 오염원으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청정이 되기도 하고, 마음의 해탈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것을 놓고 2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청정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마음이 오염되었다고 보고, 그래서 오염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청정이라고 말한다. 해탈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마음이 속박되었거나 무언가에 묶여 있다고 본다. 그래서 마음을 그런 것들로 부터 놓여 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열반은 궁극적으로 이런 것들로 부터 마음을 닦아 해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열반은 일종의 마음의 변화이고, 청정하고, 해탈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였듯이

 

마음이 오염되고 속박되어 있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은 세상에 한가지 방식으로만 반응한다. 언제나 세상을 애착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혐오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내 쪽으로 끌어오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한 마디로 좋아하거나 싫어 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양극단이다.

 

세상을 언제나 편파적으로 받아 들이다보니 사물을 그대로 지켜 보지 못한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갈애와 욕망으로 일생을 고투 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그 결과 불만족하고 슬프게 살아 간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한다. 그렇게 하여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함으로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런데 그런 열반은 이 생에서 우리의 성격과 마음을 변화시켜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되나 불교에서는 이 생에서 열반을 성취 하는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고 나서 어떻게 하는가. 부처님의 45년간 가르치고 인도하셨듯이, 그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아직 열반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지혜와 자비로서 그들을 열반으로 이끄는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이 글은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인 멸성제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5&PID=P518&DPID=46787) 를 바탕으로 작성 된 것이다.

 

 

 

2010-08-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