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누가 죽음이후를 걱정하는가, 오온의 상호작용과 영혼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14. 12:37

 

누가 죽음이후를 걱정하는가, 오온의 상호작용과 영혼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 하는 최대의 관심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굳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것이 나와 무관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여겨 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주변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뉴스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항상 보도 하는 것을 보면 남의 일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기 싫어 한다. 그런 반면에 모든 것이 이대로 다 끝나 버렸으면하고 바래기도 한다. 이렇게 죽음은 사람에 따라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죽기 싫어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죽기 싫어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이대로 놓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동안 피 땀 흘려 이루어 놓은 재산, 그리고 공들여 쌓아 올린 성과등을 그대로 놓고 간다는 것은 너무나 아쉽고 억울한 일일 것이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오래 살아 보기 위하여 갖은 수명연장 방법을 다 쓰기도 하고, 공들여 쌓은 놓은 성과물이 있디면 그 것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죽음이 들이 닥쳤을 때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한다. 그런 아쉬움이 있어서일까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이루어지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유일신교 종교라면 구원을 얻아 천국에서 영원히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야기 할 것이고, 아미타불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천상이 아닌 극락에 태어나 그 곳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다가 열반에 들기를 바랄 것이다.

 

죽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반면에 죽음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뿐이다. 밤의 문화가 번성하고 향락산업이 발전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직 한 번 뿐인 이 생을 즐겁게 살다가 가면 그 뿐,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생각 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생각 하는 그들은 그 어떤 윤리적 도덕적 가르침도 의미가 없다.

 

하다 안되면 자살하는 것 역시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결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양극단을 배척한 이유는

 

이렇게 죽음을 놓고 극단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하나는 죽음이후에도 삶이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는 상견(常見)이고, 또 하나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단견(斷見)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아를 더욱 더 강화 하게 된다. 그 결과 영원에대한 집착이 일어나고 그 때 만들어진 개념이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개념이다. 반면에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소멸 된다는 것 역시 자아에 기반한다. 따라서 자아에 기반한 상견과 단견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자아나 영혼이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상견과 단견과 같은 극단적인 생각 역시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부처님은 이런 양극단을 배척 하였다. 멸할만한 자아도 영원히 지속할 만한 자아도 없다고 강조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예를 우리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로 분해하여 설명 하였다.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아(無我)사상은 불교사상 중에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무아를 벗어난 상락아정과 같은 유아사상을 주장한다면 더 이상 불교라 볼 수 없다.

 

불교는 고대인도에사 수백년간에 걸쳐 형성된 고도의 철학체계인 브라만교의 범아일여 사상을 부정하면서 성립 되었다. 그래서 불교는 고도의 철학적인 종교일 수 밖에 없다. 이점은 철학적 기반이 없이 성립된 유일신 종교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죽었을 때 몸뚱아리만 바꾸어 나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점은 유일신 종교나 죽어서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종교가 변치 않는 영혼을 기반으로 하여 죽음이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정 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살아 있는 이생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강조 하였다. 바로 그것이 열반의 성취이다.

 

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않은, 결정하지 못하는

 

열반을 성취한자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대승불교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아()가 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열반으로 보기 어렵다.

 

부처님은 열반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무기(無記)라하고 빠알리어로 Avyākata라 하는데, 이는 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않은, 결정하지 못하는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열반에 들면 대상이 사라져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온 12 18계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열반의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사라지고 세상이 없는데 어떻게 열반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 하고 대승경전의 열반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고 설명한다

 

누가 죽음이후를 걱정하는가

 

불교의 목표인 열반을 이 생에서의 성취한자가 죽어서 어떻게 될까에 대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스리랑카의 아상가 교수는 죽음이후의 삶의 관심사 보다 왜 현실에서 바른 인식이 중요한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들려 준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탐진치가 소멸 되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죽으면 빠리닙바나(Parinibbāna, 완전한 열반, 무여열반)에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이후에 아라한에게 무엇이 일어나는가. 또 부처님은 입멸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아라한의 죽음을 빠리닙바나라 부르지만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후 어떤 일이 일어 나는가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불교문헌을 보면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전혀 걱정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걱정을 하게 되었을까. 그 것은 보통사람들, 이 세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사람들이다.

 

자아나 영혼이 없는 이유

 

우리는 죽음이후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대단히 궁금해 한다. 열반을 얻기 전에 흔히 아라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재생하는가? 그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죽은 아라한이나 열반을 증득한 아라한에 대하여 네가지 즉,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와 같은 말은 모두 적용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 하셧다.

 

분명한 것은 만약 아라한이 즉음후에도 존재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면 불멸론자 즉, 사람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입장이 되고, 죽음이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소멸론자 즉, 사람은 존재하지만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는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러한 불멸론(상견)과 소멸론(단견)을 모두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진리는 아라한뿐만 아니라 범부에게도 해당되다.

 

부처님은 그가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씀 하지 았았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온이 기능하고 상호작용하여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의 다섯무더기가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오온의 상호작용

 

불교에서는 이 오온의 상호작용 외에 영혼이나 아트만은 없다고 분명히 말하며, 인간은 이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반열반이나 죽음이 올 때 아라한에게 무슨일이 일어날까. 그 결과는 아라한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아라한은 소멸된 것일까. 그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이렇다.

 

 

아니, 아무것도 소멸되지 않는다. 소멸될 무언가가 없다.”

 

 

지금 현재도 소멸될 것은 전혀없다. 우리가 또는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교에 의하면 허상이고, 이 허상이 열반을 이룬 사람에게서 사라진 것이다.

 

열반을 증득한 사람,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완전한 열반(빠리닙바나)후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문제가 안된다. 그래서 불교문헌에는 아라한이 이런 문제에 대하여 걱정한 경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이런 것을 걱정한 이들은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바차고타 (Vacchagotta)이야기

 

불교문헌에 보면 방랑자(Parivrajaka)’ 불리던 종단에 속한 바차고타 (Vacchagotta)의 일화가 있다.

 

그가 부처님을 찾아 문의 하였는데, 처음 거론한 것이 바로 이 존재의 문제이었다.

 

처음에 부처님은 다만 침묵을 지켰고, 바차고타는 그냥 일어서서 돌아갔다. 그가 떠난 후 아난다가 왜 침묵을 지키셨는지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바차고타는 이미 많이 혼란 되어 있다. 만약 내가 아라한은 죽은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지금 존재하는 이 사람이 죽을 때 멸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건 소멸론의 입장이 된다. 만약 아라한이 사망후에도 존재한다고 말해 준다면 존재가 영원하다고 믿을 것이기에 그런 대답을 하여 잘못된 관념을 주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아라한의 본성과 완전한 열반후에 일어나는 일에 관해 부처님은 평범하게 있다없다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묘사를 따른다면 열반의 체험은 한 사람이 이 생을 살아가면서 즐기는 체험인 것이다. 그가 갈애의 욕망을 완전히 근절 했기에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 범부로 태어나는 이유는 갈애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에히빠씨까(ehipassika)!

 

이처럼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좋다. 이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고도 말한다. 이말의 진정한 의미는 설하게 된 동기로서 처음이 좋고, 제도하려는자들의 근기에 따라 원인과 비유가 적절하기 때문에 중간이 좋고, 경청하는 자들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끝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처님 말씀은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알아야 하는 것으로 설명 된다. 여기서 와서 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와서 보라는 것을 빠알리로 에히빠씨까(ehipassika)’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와서 보라고 하는 이유는 초대할 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권(師拳)이라는 말이 있다. 스승의 주먹이라는 말인데 나중에 펴보니 빈주먹이더라는 말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빈주먹이라면 와서 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와서 보라고 해서 와서 보았는데 대변이었다면 냄새만 풍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법은 와서 보라고 초대할 만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실제로 있고 청정한 것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가르침이 있지만 실제로 보여 주지 않는다. 죽은 다음의 일이라거나 실제하지 않은 개념으로만 설명한다.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냄새가 난다면 풀이나 나뭇잎으로 가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 법은 어느 법이든지 단 하나의 게송이라도 감탄을 자아 내게 된다. 또 부처님법은 실제로 거기에 있고 또 청정한 법이기 때문에 와서 보라!(ehipassika, 에히빠씨까)”고 초대할 만 하다는  것이다.

 

 

 

2010-08-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