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원각경 해제(解題)방송을 듣고, 성불(成佛)의 길과 종불(從佛)의 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17. 12:21

 

원각경 해제(解題)방송을 듣고, 성불(成佛)의 길과 종불(從佛)의 길

 

 

 

 

 

 

아침에 매일 ‘bbs 불교방송을 듣는다. 주로 불교강좌를 듣기 위하여 라디오를 켜지만 항상 아침예불방송부터 듣게 된다. 예불방송이 끝나면 곧바로 이어지는 프로가 경전공부시간이다. 결국 두개의 불교강좌를 듣게 되는데, 두 프로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불교강좌가 불교일반에 대한 강좌라면, 경전공부는 주로 대승경전 위주이기 때문이다. 현재 불교강좌에서는 위빠사나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경전공부는 이제 막 원각경 강의가 시작 되었다.

 

아직도 즐겨사용 하는 소승

 

원각경강의를 진행하는 분은 바로 전에 대승기신론을 강의 하였던 스님이다. 그런데 원각경에 대한 해제강의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래서 요의경이라 하는 것은 대승경전을 의미하고, 불요의경이라 하는 것은 소승경전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불요의경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최상의 뜻을 다 설하지 못하여여서 끝 마치지 못한 소승경전을 말하고, ‘요의경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최상의 뜻을 전부 알수 있도록 요달했다라는 뜻의 대승경전을 말한다. 그래서 소승경전은 미완성이고, 대승경전은 완전한 경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소승과 대승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소승이라는 말은 초기불교 내지 테라와다불교를 폄하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로서 공식적으로 사용을 자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공부 강의 시간에 아무런 구애 없이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여 소승폄하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한국불교가 대소승 편가르기를 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즐겨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불교를 소승불교라고 지칭하는 것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니까야을 부정하는말이다.  대승경전 즉, 반야경의 우월성을 들어냄으로서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폄훼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발언은 대승경전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법에 대한 무지때문에

 

다음으로 스님은 유와 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소승경전을 설 하실때 모든 것이 일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유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그 다음에 가가지고 반야경에서는 없다라는 이야기 즉, 공했다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법에 대하여 잘 모르면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된 원인은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달 하다 보니 나온 현상일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대승불교에서 소승을 비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 아공법유(我空法有)’라는 말이다. 특히 아비담마교학을 비판 할 때 주로 사용 하는 말이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이라고 주장 한다. 그렇다면 아공법유와 아공법공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공법유라는 말은 ()는 공하지만 법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반면에 아공법공은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는 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법도 공()한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에 소승불교는 법이 유()하다고 공격한다. 따라서 대승불교가 소승불교가 더 수승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소승이 아공법유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다. 법의 성질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법의 실상을 알면 아공법유가 아니라 실은 아공법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그럴까.

 

대승에서 법공을 주장하면서 소승은 법이 있는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럴까.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법은 존재 하는 것이라고 주장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제법이 무아인데 법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할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아공법유라고 주장 하는 것은 인도불교의 중국불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인도의 초기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해체 하여 본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나 영혼같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나라고 하는 개념(paññatti, 빤냐띠)과 수 없이 많은 단위의 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법은 찰라적 존재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고배율의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이 보면, 법은 찰라적으로 존재 하는 최소의 단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의 시간 단위가 찰라라는 말이다. 따라서 법은 찰라적 존재이면서 흐름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법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앞의 조건으로 일어났다 머물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연속 함으로서 상속 되어 흘러 가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별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나 조건지워져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이다.

 

 

이것이 법의 특징이다. 구경법 82법중에 열반과 추상물질 10가지를 제외한 71법이 이와 같이 고유의 성질(탐욕, 성냄...)을 가지고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조건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생멸상속의 흐름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인 것이다.

 

법이 생멸하는 현상에 대하여 법이 있다라는 아공법유를 주장 한다면 그 것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개념의 차이라 볼 수 있다.

 

인도의 초기불교에서 나는 개념이고 나를 이루는 최소의 단위를 법이라고 하지만, 이런 이론이 중국으로 넘어가면 개념이 달라진다. 중국불교에서는 주체객체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 능소법이라 한다. 따라서 나를 인식하는 주체로 보고, 법을 인식대상으로서 객체로 보았을 때 법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공법유를 주장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능소법으로 보았을 때, 법에 대한 개념이 없는 한국불교에서 혼란이 일어나 예전에 들은 이야기를 답습하는 것이다.

 

죽어야 완성되는 종교

 

다음으로 스님은 소승과 대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승과 대승이 무엇이 다르냐. 소승은 우리들이나 부처님 당시에 법문을 직접 들었을때 우리기 어떻게 감히 부처님의 경계를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소승과의 아라한과만이 우리의 최상의 구경의 목적이고 구경각이지 우리가 그 이상은 우라가 가기가 어렵다이렇게 해서 우리는 필경에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소승불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법화경에서 이야기 했듯이 구원성불이라 하여 지금 당장 성불 할 수 없지만, 세월이 많이 걸려서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 할 수 있다이렇게 최상의 말씀을 해 놓으신 겁니다.”

 

 

소승불교에서는 부처의 위치에 올라 가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반면에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부처가 된다는 희망을 갖자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죽어서 완성된다. 기독교의 경우 죽어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산다고 한다. 대승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처가 되려면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 과정도 지난(至難)하기 그지 없다.

 

부처가 되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부터 언제 어떤 이름으로 정득각자가 되리라는 수기를 직접받아야 하고 4아승지와 10만 대겁이라는 무량한 세월동안 바라밀행을 해야 한다. 인간도 부처 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모든 유정중생과 산천초목의 무정중생도 언젠가 성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이 바라던 것은

 

성불은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생에서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 이루어진다면 누구든지 어떤 말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말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살아서 보여 주셨다.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성취하고 그 길을 제시 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살아 있을 때 현생에서 열반을 실현하여 부처님이 그렇게 하였듯이, 다른 이들을  또한 그 길로 인도하여 지혜와 자비의 삶을 살아 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바라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루어 놓은 성과를 부정할 뿐만아니라, 따로 경전을 결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난 길을 가기 시작 한 것이다. 그들은 또 부처님이 설한 적도 없는 불성, 여래장, 법성, 한마음, 원각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 놓고 무량한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성불하리라는 희망에 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라면 부처님이 이미 개척해 놓은 길로 가면 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굳이 부처가 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빈주먹을 보는 것 만큼이나 공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010-08-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