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팔정도와 야타부따냐나, 아상가교수의 사성제 강의 도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19. 22:01

 

 팔정도와 야타부따냐나, 아상가교수의 사성제 강의 도성제

 

 

이웃블로그에서 본 내용이다. 인도에서 돌아와 간화선 국제학술세미나에 참관한 후박나무님의 블로그(http://blog.daum.net/whoami555/13742015)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하였다.

 

혜국스님의 발표중에

 

발표자중에 혜국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은 간화선에 관심있는 불자라면 누구나잘 아는 유명한 대선사이다. 특히 불교tv 등에서 법문을 잘 하기로 유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 간화선 옹호론자로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은 발표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정견이 바로서지 않은 상태에서 주로 번뇌 망상과 싸우느라  공부가 순일하지 못했다. ...그 화두가 반야공성을 일러준 一句라는 것을 모르고 잘못 생각하여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각자 따로 있는 걸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혜국스님의 인터넷 법문을 듣다 보면, 젊은 시절 도를 깨닫기 위한 고뇌의 흔적을 여기 저기 엿볼 수 있다. 스님은 13살이라는 어린나이에 동진출가 하여 유명선사들을 시봉하며 공부를 하였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 손가락을 소지(燒指)공양한 사건이 있었다. 젊은 시절 공부를 더욱 더 열심히 하기 위하여 스스로 손가락을 태운 것이라 한다. 또 참선공부가 안되어 저녁에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와 1년간 무문관 수행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이처럼 간화선 옹호론자이자 간화선 지상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던 스님이 이 날 발언에서 정견이 서지 않아 번뇌망상과 싸우느라 공부가 순탄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 이유중의 하나로서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고 또한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여기서 소소영영이란 무엇일까.

 

소소영영이란 무엇일까

 

소소영영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소소영영(昭昭暎映)이란 또렷하고도 신령스런 마음바탕이 있어서, 보고 듣고 하면서 오온의 육신 속에서 주인공이 된다라거나, “사람은 누구나 근본마음자리는 소소영영(맑고 깨끗)한 것이다등의 의미로 풀이 되고 있다. ,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이 소소영영과 같다는 것이다.

 

누구나 소소영영의 마음의 태어 났는데, 살다보니 마음에 먼지가 끼고 쌓인 것은 그때 그때 닦아 내지 않거나 털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거울을 맑게 유지하려면 매일매일 닦듯이, 근본마음인 소소영영을 유지하는 것도 매일 매일 닦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간화선의 대선사인 스님은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견이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정견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스님은 정견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허공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본래 허공이다. 고로 본래 부처다. 허공을 만들 수 없듯이 부처도 닦아서 새로 만드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견이 바로서야 되고 정견에서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일어나야 한다.

 

 

허공을 내가 따로 만들어서 허공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허공이었듯이, 마찬가지로 따로 부처도 마음을 닦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매우 혁명적인 말이다.

 

초기불교와 니까야의 영향력

 

이제까지 대부분의 선사들이 불성을 이야기 하면서 각자 중생의 내면에 있는 불성, 다른 말로 참나, 진아, 본마음, 주인공, 법성, 일심, 한마음, 원각등으로 표현된 소소영영한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마음공부를 하였는데 이를 부정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결국 법이란 중도 연기를 달리 표현할 뿐 그 근본 뜻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결론이다.

 

 

법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다. 법이라는 것이 중도와 연기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법을 찰라생 찰라멸하며 조건지워져 상속되는 연기적 흐름으로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떻게 간화선 선사의 말에서 초기불교에서 주장하는 법의 이론이 나오게 되었을까. 그 것도 소소영영한 불성과 같은 마음속의 주인공을 부정하면서 나온 이런 발언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참관하고 난 다음에 다음과 같은 글을 블로그에 남겼다.

 

 

초기경전에서 정견을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대승경전이나 선어록에서 나타나는 정견은 언어표현에서나 내용면에서 자세하지 않기 때문이다“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걸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라는 혜국스님의 설명처럼 한문 어록만을 보게 되면 초기경전에서 연기무아로 설명되는 정견의 의미를 놓치게 될 수 도있다. 정견이 연기무아임을 강조하는 선사스님들이 많아진 것을 보며 초기불교와 니까야의 영향력이 무시하지 못 할 정도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을 공부하는 스님들이 초기불교를 몰랐기 때문에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으로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사들이 이제 무아와 연기로 설명되는 정견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은 바로 초기불교의 영향때문이라고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정견과 사성제

 

혜국스님이 언급한 정견은 바른 견해를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정견은 팔정도의 여덟개의 길 중의 하나이다. 또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말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각묵스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른 견해(正見)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각묵스님의  중도란 무엇인가중에서)

 

 

사성제의 도성제가 팔정도이고, 팔정도의 정견이 사성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항상 페어(Pair. 한쌍)로 움직이고, 이는 부처님이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초전법륜경에서도 잘 표현 되고 있다.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제법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고정불변한 자아나 영혼 또는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생멸하는 법을 바로 아는 것이 정견일 것이다.

 

정견으로 표현되는 사성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도로 설명하였다. 정견을 가져서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무아와 연기를 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도를 닦아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도란 무엇이냐또는 도 닦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그다지 명쾌한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도는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스님들이나 닦는 것으로 생각하고, 도 닦는 것 또한 상근기의 수행자가 수행이 무르익었을 때 어떤 기연(機緣)으로 인하여 득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아상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누구나 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도라는 말은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도와 초기불교의 전통에서 말하는 도가 서로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도와 도 닦음은 팔정도를 말한다. 도가 팔정도를 말한다면어느 누가 물어 보아도 자신 있게 도란 팔정도이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팔정도는 부처님이 설하신 성스런 여덟가지 도의 길이다. 팔정도를 빠알리어로 표기하면 ‘아리요 앗땅기꼬 막고(Ariyo aṭṭhagiko maggo)’이고, 영어로 표현 할 때는 노블 에잇폴드 패스(Noble Eightfold Path)’라 표현한다.

 

우리를 고귀하게 만드는 길

 

사성제와 마찬가지로 팔정도 역시 닦는 수행자가 스스로 고귀하게 되는 윤리적인 길이다. 그렇다면 그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은 무엇일까. 표로 만들어 보았다.

 

 

 

팔정도

 

우리말

빠알리어

영 어

구 분

팔정도

(八正道)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의 각지

Ariyo aṭṭhagiko maggo

Noble Eightfold Path

계정혜 3

정견

(正見)

바르게 보기

sammā-diṭṭhi

Right view

()

Paññā(Pali)

Wisdom()

정사유

(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

samma sankappa

Right Intentions(concepts)

정어

(正語)

바르게 말하기

sammā-vācā

Right Speech(word)

()

Sīla(Pali)

Virtue()

정업

(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sammā-kammanta

Right action

정명

(正命)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기

sammā-ājīva

Right livelihood

정정진

(正精進)

바르게 정진하기

sammā-vāyāma

Right effort

()

Samādhi(Pali)

Concentration()

정념

(正念)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생각하기

sammā-sati

Right mindfulness

정정

(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sammā-samādhi

Right concentration

 

 

 

Noble Eightfold Path:

사진 www.wrdz.com/tag/dhamma

 

 

 

 

팔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렇게 8가지인데, 이를 계정혜 3학으로 나눌 수 있다.

 

삼학의 전통적인 순서는 계정혜이다. 그러나 팔정도에서는 혜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계와 정이 뒤따른다. 그래서 팔정도에서는 삼학의 순서가 혜계정이다.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말씀 하실 때 8개의 길의 측면을 가르칠 때 길을 매우 광범위하게 이야기 하였다. 특정의 설법이 특정한 개인들에게 맞춘 것임을 감안 할 때 좀 더 깊은 심리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가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방식이 많은 이유는 부처님이 누구에게 말씀 하셨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팔정도는 매우 일반적인 질의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이 말은 역으로 팔정도 하나 하나에도 매우 깊이 들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예를 들어 정념을 빠알리어로 삼마사띠(sammā-sati)라 하는데, 여기서 사띠는 바로 깨어있음 즉, 알아차림을 말한다. 바르게 알아차리게 하는데는 방법만 해도 4개나 된다. 4념처가 깨달음의 완전한 길을 구성하는 것이다.

 

정념을 발전 시키는 방법은 매우 상세히 나와 있는데, 이 정념을 발전시키려면 그 안에 팔정도의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부처님은 길을 전반적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개개의 측면을 들여다 보면 좀 더 깊은 심리적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 팔정도에서는 혜부터 시작 되었을까

 

정견과 정사유는 혜에 속하고,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에 속한 것으로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말하고,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마음의 개발을 말한다. 이런 팔정도를 닦는데 있어서 부처님은 도의 길을 점진적이라 말씀 하셨다.

 

점진적인 길은 삶의 기본윤리인 계로 부터 시작된다. 그런 다음 정과 혜로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팔정도에서는 혜부터 시작 되었을까.

 

사실 혜에는 두 단계의 지혜가 있다. 먼저 지혜는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종의 이해이다.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지혜이고 이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길에서는 지혜가 정점을 이룬다. 이렇게 지혜의 정상측면과 시작측면이 두단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믿음(Saddha, )’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것이 지혜의 정점이 아니고 또 지혜가 발전한 최종적인 모습도 아니다. 그 것은 그 다음에 와야 한다. 그래서 지혜에서 시작하여 계율로 가고 선정으로 갔다가 다시 지혜로 오는 것이다. 이를 다시 한번 표현 하면 다음과 같다.

 

 

믿음(Saddha, 기본적인 지혜 또는 모종의 이해)à(Sīla, 바른말과 바른행동) à(Samādhi, 마음의 개발)à(Paññā, 위빠사나 통찰, 여실지견)

 

 

계정혜 삼학과 관련하여 초기경전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담마딘나(Dhammadinnā)라는 비구니와 그녀의 전남편인 위사카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이다.

 

아나함과를 성취한 전남편이 승원으로 아라한이 된 그녀를 찾아가 교리에 대한 질문을 몇가지 한다. 질문중의 하나는 이 계정혜 삼학이 팔정도에 속하는지 아니면 팔정도가 삼학에 속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 삼학이 팔정도 안에 있느냐 아니면 팔정도가 삼학안에 있느냐는 것이다.

 

담마딘나는 이 팔정도가 삼학에 속한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고 맞게 대답하였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정혜 삼학은 훨씬 더 넓은 범주라는 것이다. 그 범주안에 팔정도가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계정혜를 말할 때는 팔정도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팔정도의 시작과 행동과 마음의 개발

 

팔정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여덟개의 개념이 있다. 시작은 정견과 정사유에서 한다. 정견은 바른 생각으로서 사물을 보는 바른 방식을 말하고, 정사유는 개념과 사상을 의미한다. 무해의 개념, 자비, 초연의 개념 같은 것이다. 이것은 수행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자세를 말한다.

 

정어, 정업, 정명은 행동방식을 말한다.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재가자의 경우 살생, 도둑질, 음행을 삼가야 하며, 출가자의 경우 성행위를 삼가야 한다. 이것이 정업이다.

 

정어는 거짓말, 거친말, 무의미한 말, 가십을 삼가는 것이다. 정명은 생계를 위하여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고 순수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재가자의 경우 하지말아야 할 것 몇가지는 무기나 술, 독을 팔거나 인간을 노예로 파는 것이다. 이것이 도의 길을 따르는데 필요한 순수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정진에서는 알아차림과 집중이 깊어져 마음이 발전 되는 단계이다. 정정진 즉, 바른 노력을 하려면 바른이해와 바른 알아차림을 가지고 해야한다.

 

누군가 수행처에 다닌다면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훨씬 더 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알아차림명상은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알아차림 명상을 할 때 알아차림을 발전시키는 측면이 4가지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신수심법을 말한다. 이것이 알아차림과 집중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불교에서 도의 길이 점진적이라 할 때 우리는 기본적인 윤리부터 시작한다. 윤리를 삶속에 확고히 한 후에 마음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마음의 발전,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것은 단지 불교수행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많은 종교전통에서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 사람들은 올바르지 않은 이유로 그런 일들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강도나 절도 행위를 하려면 집중을 잘 하여야 한다. 이렇게 마음의 힘이 오용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덕이 있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그런 다음에 마음을 발전시키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닦는 것이다.

 

야타부따냐나 (Yathā-bhūta-ñāna)

 

다음으로 지혜에 관한 것이다. 이 것을 빠알리어로 위빠사나(Vipassana)라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비다르샤나(Vidarshana)라 하는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다.

 

마음이 집중되고, 고요하고, 조용해지면 그 사람은 통찰명상(Insight Meditation)단계로 갈 수 있다. 지혜가 실지로 통찰명상이다. 통찰명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상, 슬픔이고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 오는 모든 것에 대한 실체가 없고, 영혼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관점을 발전시켰을 때,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일컬어 진다. 다시 말해 그것이 의미 하는 바는 우리가 사물을 보고 들을 때 우리에게 집착도 혐오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감각, 인지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는다. 마음이 청정하게 되면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이고, 있는 그대로 들리고 더 이상 이어지는 것이 없다. 그것이 아름다우면 그냥 아름다운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그것이 추하면 추한 것이다. 하지만 분노나 혐오는 일어 나지 않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은 경전에서 매우 중요한 말로 지칭되었다.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ñāna)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식을 말한다. 이것이 지혜 또는 빤냐가 의미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길은 점진적인 길이다. 계정에서 시작하여 혜로 가는 것이다. 또한 계에서 시작하여 정으로 갈 때 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덕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정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사물을 그대로 보고 통찰명상을 발전시킨다. 계와 정이 있는 것에서 정을 발전시킬 때 계를 포기하고 다음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음 상태로 가져 가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통찰명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집중된 마음가짐을 가진 덕성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고통을 끝내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누구나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이상 아상가교수의 사성제중 도성제강의 즉, 팔정도를  보면 두가지 사항을 주목한다.

 

첫번째로  팔정도에 있어서 계정혜삼학의 순서는이 실은 ààà로서 점진적인 4단계의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혜를 두가지로 해석 하였는데 첫번째 혜는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종의 이해로서 지혜의 시작측면인데, 이것을 삿다(saddha, )로 본 것이다.

 

삿다는 유일신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말한다. ,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에서 고통과 고통의 소멸및 해탈로 가는 길과 같이 이길로 가면 해탈열반 하리라는 미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바탕하에 바른 행동()과 마음의 개발()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 보아 위빠사나 통찰로 지혜를 완성하여, 지혜의 정상측면으로 보는 것이 두번째 혜의 설명이다.

 

두번째로 누구나 성스런 팔정도를 닦으면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출가수행자만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라하면 재가불자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예가 앞서 인용된 담마딘나 비구니 이야기일 것이다. 누구든지 도를 닦아서 열매를 맺으면 승가로 여겨지는것이다. 반드시 출가자에 국한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2010-08-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