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이유, 무분별지와 무분별후득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28. 10:31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이유, 무분별지와 무분별후득지

 

 

 

 

 

 

세번 부르고 세번 대꾸한 까닭은?” 금년 하안거 해제를 앞두고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이 내린 법어이다. 해제후 길거리에서도 국사가 시자를 부른 뜻을 잘 참구 해 보기 바란다는 화두를 내린 것이다.

 

교계신문에 발표된 화두를 보면 일반재가불자들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다. 한 번도 화두를 들어 본 적도 없고, 한 번도 참선을 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은 마치 암호문같이 어려워 보이기만 한다. 따라서 화두는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조주(趙州)의 무자(無字)화두

 

불교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84천가지 법문이 있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고, 말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니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다. 더구나 한자로 된 한문경전은 난해 하기 그지 없다. 설령 해석해 놓은 책을 보아도 인내를 가지지 않는다면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어려워 보이는 것은 화두이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이 참구 하여야 하는 화두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조주(趙州)의 무자(無字)화두이다.

 

 

조주 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역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했다.

없다()!”

 

 

이 것이 그 유명한 무자 화두이다. 대승경전중에 열반경에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 하였는데, 개에개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어 보면 당연히 있다라고 말을 해야 하나 없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말을 부정 하는 것과 같다. 왜 그렇게 대답하였을까. 여기에서 부터 화두는 시작 된다.

 

무자화두의 체험의 경지

 

조주는 이 무자 화두가 가장 으뜸가는 화두라고 하였다. 이 것 하나만 타파 하면 깨달음의 관문을 뚫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밤낮없이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하나의 의심덩어리로 뭉쳐서 이 무자만 참구 하면 안과 밖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에 들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 체험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그것은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다만 스스로만 알고 다른 이에게는 말해 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 홀연히 이 무자가 폭발하면 하늘도 놀라고 땅도 진동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관우 장군의 큰 칼을 자신이 뺏어 쥔듯, 부처를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대자재를 얻고 육도와 사생의 미혹한 세상에 있으면서 유유히 자재하는 유희삼매에 노닐 것이다.

 

 

참으로 매력있는 말이다. 꿀먹은 벙어리가 그 꿀맛을 표현하지 못하듯이 화두가 타파한 체험을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과 같은 대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자유란 무엇일까.  바로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40일이면 화두타파 할 수 있다

 

그 사량분별의 무분별지가 최종목적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화선을 주창하였던 대혜종고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무를 깨달으려면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되고, 도리로서 알려고 해도 안되며, 의식으로 사량하여 헤아려도 안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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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하루종일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생활 그 가운데서 한결 같이 공안을 들고 바짝 정신을 차려 참구하여야 한다.

 

 

무자 화두를 타파 하기 위하여 공부를 한다거나 생각을 한다거나 도리나 이치로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깨어 있을 때나 심지어 잠잘 때도 그 의심이 잠시도 떠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하다 보면 한달 열흘 즉, 40일이면 화두를 타파 할 수 있다고 한다.

 

분별지, 무분별지, 무분별후득지

 

40일 정도면 화두가 타파 되는 그 경지는 어떤 경지일까. 그 경지를 무분별지라말하는데, 이에 대하여 무문관 강설의 저자 무산본각님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구분

인식상태

  

분별지

대상을 사량분별하여 인식하는 일상의 의식상태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인식하는 범부의 경계

무분별지

사량분별을 초월한 삼매의 의식상태

산도 물도 공하여 산도 없고 물도 없고 나아가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경계

무분별후득지

인식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상태

산을 보면 산으로, 물을 보면 물로 명명백백 인식하는 경계

 

 

 

책의 저자 무산본각님은 무자화두를 타파하여 맛 보는 경지가 삼매의 상태에서 사량분별을 초월한 의식의 변성상태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불완전한 방편이라 주장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수행법을 알지 못하였던 중국적 특수상황에서 나왔고, 선종이 발견한 우연에 의한 요행법이라는 것이다.

 

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산이라 부르는 경계는 분별지로서 범부의 경계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하였을 때 범부는 '불성이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량 분별없이 보았을 때 모두 하나가 되는 경계가 무분별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수승한 경계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위빠사나의 통찰지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왜 평생 동안 해도 안되는 것일까

 

책이나 TV에서 선사를 소개 할 때 득도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득도 했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선가에서 득도했다는 뜻은 견성성불을 말한다. 그 방법은 화두를 들어 은산철벽과 같았던 화두가 타파 되면 득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경계는 대게 삼매의 무분별지일 것이다. 또 그 경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깨끗하고 맑은 본마음 자리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 화두가 대혜종고 스님에 따르면 40일 정도면 타파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노비구니 스님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될 것도 같으면서도 안되곤 하여 여기까지 왔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일까 결제철이면 수천명이 선방에서 화두참선에 들어간다. 밤낮으로 참구하면 40일이면 족하다는데 왜 평생 동안 해도 안되는 것일까.

 

그런데 안거 횟수가 높으면 높을 수록 더 대접을 받는 경우가 한국불교라 한다. 몇 안거를 했느냐에 따라 모든 공적인 자리의 후보자로 결정이되고 존경 받는 풍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안거가 많은 것이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고 교계신문에서 말하였다. 이를 고시원 폐인에 비유하여 선방폐인으로 비유하였다.

 

선가의 도, 위빠사나의 도와 과

 

선사를 소개 할 때 득도라는 말이 본래의 성품을 보았다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지만 그 과(열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도(magga, 막가)와 과(phala, 팔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렇다면 도와 과는 무엇일까.

 

초기불교에서 도는 닙바나(열반)을 지향한다. 또는 닙바나에 이르는 것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도가 있으면 반드시 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과는 닙바나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열반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와 과를 성취한 성자를 수다원, 사다람, 아나함, 아라한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 도는 닙바나에 들어 가는 것을 말하고, 과는 닙바나를 성취하여 나오는 것을 말한다면, 선가의 득도라는 것은 도만 언급될 뿐이고 과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단지 들어갔을 뿐 그 열매가 없어서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법을 보는 눈이 달라서 일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모든 법을 생멸로 보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할 수 있다. 마치 점에서 점으로 연결 된 듯한 마음의 연속에서 어느 지점에서인가 끊어진 다면 바로 그 상태가 닙바나(열반)인데, 선가의 삼매는 연속된 마음이기 때문에 결코 닙바나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선가에서 득도하였다는 말은 있어도 열반을 성취했다는 말은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무분별후득지와 알아차림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구원이나 영생을 얻는 것 보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 때문이라 한다. 그 것이 이유라면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렇게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덜어 주고자 시작 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 초전법륜경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고귀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 가르침대로만 따르면 누구나 수다원이상의 성자가 될 수 있고, 영원히 고통을 끝내 줄 수 있기 때문이다.그 핵심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이를 한자어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하고, 빠알리어로는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ñāna)’라 한다. 앞서 언급한 무분별후득지가 여기에 해당 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란 다른 말로 알아차림이다. 그런데 이 알아차림이라는 말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제까지 한국불교는 모두 마음으로 통하였으나 초기불교가 소개 된 후에 알아차림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다.

 

부처님의 84천 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 되고, 여기서 더 줄이면 8정도가 되고 더 줄이면 계정혜 3학이 되는데, 이를 한 단어로 줄이면 알아차림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이 알아차림은 선가의 마음과 달리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알아차리면 된다.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고통은 사라진다.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났다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미움이 사라지고, 지금 어딘가 매우 아프다면 그 곳을 주시하여 아픈 줄 알면 고통은 일어 났다가 사라진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고통이 사라지는 이유는 일어나고 사라짐의 법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고 그대로 있다면 고통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변치 않는 것이라면 미운 사람을 영원히 미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통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은 생멸의 연속이므로 고통을 느꼈을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먼저 느꼈던 고통은 사라지고 그 대신 아는 마음이 대신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부처님이 설한 있는 그대로 지켜 보기 일 것이다.

 

 

 

2010-08-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