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님인가 상가(Sangha)인가, 삼보와 삼귀의(三歸依)에서 진정한 귀의 대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29. 18:41

 

스님인가 상가(Sangha)인가, 삼보와 삼귀의(三歸依)에서 진정한 귀의의 대상은

 

 

 

 

 

 

 

 

스님과 신도

 

법회를 하면 반드시 하는 의례중의 하나가 삼귀의(三歸依)이다. 불법승 삼보에 헌신을 다짐 하는 이 의식에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중의 하나가 승()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불법승 삼보라 말할 때, 승을 스님으로 부른다. 그래서 거룩한 스님께 귀의 합니다라고 말한다. 과연 불법승 삼보 중에 승이 스님만을 지칭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재가불자들을 신도라 불리우는데, 이 말도 타당한 것일까.

 

한편에서는 귀의할 대상으로 스님이라 부르고, 이런 스님을 따르는 신도로 이원화 되어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은 초기불교의 전통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불교tv의 아상가(Asanga Tilakaratne)교수의 강의(불교영어도서관 특강-근본불교의 가르침, 불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5&PID=P518&DPID=46589 )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하였다. 아상가 교수는 스리랑카 출신 불교학자이다.

 

빅쿠, 빅쿠니, 우빠사까, 우빠시까

 

부처님께서 온전히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 종교적 스승으로서 삶을 시작 하셨다. 다섯명의 옛 동료에게 최초로 설법을 하신후, 이 다섯 수행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다. 그들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깨닫게 되고,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부처님의 인기가 높아지자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이 되었다. 이 공동체는 빨리 성장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남자승려와 여자승려를 기본으로 한 상가(Sangha)가 형성되었다.

 

불교에서 남자승려들을 빠알리어로 빅쿠스(bikkhus, 비구)라 하고, 여자승려들을 빅쿠니스(bikkhunis, 비구니)라 부른다. 또 산스크리트어로는 빅슈스, 빅슈스니스라 부른다. 반면에 재가불자들을 우빠사까(upasaka, 우바새, 남자불제자)와 우빠시까(upasika, 우바이, 여자불제자)라 부른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는 빅쿠, 빅쿠니,우빠사까, 우빠씨까의 네가지 용어를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빅쿠와 빅쿠니는 기본적으로 탁발하는 사람들이라는 빅쿠에서 기인한다. 반면에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좀 다른 의미이다.

 

재가불자에 대하여 잘 못 알고 있는 것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를 단지 속인(俗人)’으로 생각 하는 것이다. 이 것은 전적으로 영어의 래이(lay)’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영어로 재가불자를 래이부디스트(lay buddhist)’또는 래이피플(lay people)’로 표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래이(lay)라는 말은 그다지 지식이 없거나 내부자가 아닌 것으로 사용된다. 우리식으로 표현 하면 단지 따르는 신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유일신종교에서 말하는 그저 믿고 따르는 신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는 빅쿠와 빅쿠니 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접하지 않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출가자 못지 않은 승가의 일원이었다.

 

이런 재가불자들을 지칭하는 또 다른 용어가 기히(gihi)’이다. 이 말은 출가수행자를 아나가리까(annagarika)’ , 집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과 대조 되는 말이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의 구분은 단지 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일 뿐이지 일반적으로 부르는 속인과 다른 것이다.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는 집을 유지 하거나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불교전통의 초창기 부터 존재하여 발전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을 특히 강조 하는 이유는 불교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불교가 단지 비구나 비구니 즉,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깨달음(열반)의 즉각적인 실현을 위하여 수행하려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처음 부터 아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아주 초기부터 재가불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은 상가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재가자의 지원 없이는 비구와 비구니들은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존재 할 수 없었음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이렇게 초기불교의 승가는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4부 공동채로 구성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 부처님의 제가가 되는 것일까.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입회의식 같은 것이 있었을까.

 

부처님께서 온전히 깨달은신후 자연스럽게 가르침을 펴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가르칠 불자가 없었다. 따라서 이미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어떤 종교적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깨달은 바를 바로 말씀 하셨다.

 

그 때 당시에 사람들은 있었지만 부처님만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불자들은 없었다. ‘열린 청중열린사람들만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가르침을 받았던 다섯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이후에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새로운 메세지 이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자 마음을 내어 따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종교를 바꾸기도 하고 고수 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어떤 등록절차를 밟기도 하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나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행동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이고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왜 삶에 있어서 그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어떤 이가 부처님의 제자가 될 때, 그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함을 말한다.

 

삼보의 진정한 의미

 

여기서 귀의한다라는 뜻은 영어로 ‘taking refuge’를 말하며, 빠알리어로 사라나 가마나(sarana-gamana)’이다.

 

귀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 한다는 것은 붓다는 스승을, 담마는 가르침을, 그리고 상가는 기본적으로 출가제자들을 말한다. 이렇게 붓다와 담마와 상가를 삼보(Triple Gem)라 하는데 이것을 좀 더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부처님을 찾아 가면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사람은 주변에 명상중에 있거나 가르침을 들으며 부처님 주변에 앉아 있는 상가의 일원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변상황에 미래에 제자가 될 이 사람은 자극받아 고무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한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을 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던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부처님과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가란 명백하게 깨달음을 성취한 이 종교적 지도자를 따르는 종교적 사람들의 그룹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스승과 그 분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실현시키고 열매를 맺도록 애쓰는 살아 있는 본보기(48배의 성자)’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삼보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정한 삼보의 의미

삼 보

부처님 당시

현재

붓다()

사꺄무니 부처님

스승으로서의 부처님

안내자로서의 부처님

담마()

부처님의 가르침(담마)

부처님의 가르침(담마)

상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도와 과를 성취한 살아 있는 본보기(사쌍팔배의 성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도와 과를 성취한 살아 있는 본보기(사쌍팔배의 성자)

 

 

 

부처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붓다가 부처님 당시에는 사꺄무니 붓다를 의미 하였지만, 지금은 반열반하여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마이고, 그 가르침으로 부처님이 이루었던 것과 똑같은 열반을 성취하여 도와 과를 이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 같은 살아 있는 성자들을 진정한 귀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불교에서 단지 모든 스님을 귀의의 대상으로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우리들은 스승이신 부처님, 가르침인 법, 본보기인 승가에 의지 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 하면 부처님은 의사와 같다. 가르침은 약에 비유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삼보에 의지 하는 것은 우리가 의사에게 가서 약을 타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귀의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할까. 귀의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점은 현대를 사는 불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부처님은 반열반(Parinibbana, 빠린닙바나)’에 드셨고, 역사적으로 실재 하셨던 부처님은 더 이상 지금 존재 하지 않는다. 오직 개념이나 생각으로만 남아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부처님에게 귀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처님이 지금 한 사람으로서 ,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펴시고 계신다면 그 분에게 가서 귀의함을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더 이상 계시지 않은 이 시점에서 귀의함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불교의 전통에서 귀의함의 본질은 스승과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 하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우리들이 매우 진지하게 또 매우 깊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이 때 우리들은 가르침을 통해 어떤 고귀한 행동들을 듣게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삶과 친구들을 떠나 상가의 일원이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상황이다. 모든 소유와 가족간의 인연을 멀리하고 완전히 무소유로 부처님을 따르기 시작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무언가 잘 못 되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이라고 느낌이 든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런면 어떤 일이 일어 날까. 물론 되돌아 갈 수 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처음 부터 다시 시작 해야 한다. 따라서 출가를 결행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 그래서 귀의한다는 것은 스승께 온전히 의지 하거나, 스승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를 키워 간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스승을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스승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의미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승의 선택기준

 

부처님이 실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승의 선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스승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어떤 점을 고려 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어느 경전에 근거 하고 있는가.

둘째, 어느 주석서에 근거 하고 있는가.

셋째, 어느 스승으로 부터 전수 받았는가.

넷째, 언행이 일치 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법맥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어느 스승으로 부터 전수 받아서 법의 맥이 이어 왔느냐에 대한 사항 이다.

 

만일 스승이 남종선의 시조인 육조 혜능선사의 법맥을 이었다면 혜능의 제자인 혜자(慧子)’가 될 것이다. 한편 스승이 사꺄무니 부처님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면 부처님의 제자인 불자(佛子)’가 될 것이다.

 

스승을 선택할 때 혜자가 될 것인지 불자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어느 스승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고 스승 없이 혼자 깨쳤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스승이 될 것이다.

 

상가는 출가자의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타당하고 실질적으로 느낀 다면 당연히 따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귀의 한다는 것은 이주 중요한 일이고 바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첫번째 단계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 불자 또는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기본적으로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 함으로서 불자가 된다고 하겠다. 이를 달리 말하면  부처님을 고통으로 부터 해탈키 위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통에서 해탈로 가는 정확한 과정으로 받아 들이며, 출가제자들을 결과로 이룬 사람들로 받아 들인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여기서 상가는 매우 보편적인 용어이다. 애초에 모든 사부대중을 함께 지칭하는 용어 이었다. 왜냐하면 상가는 공동체 또는 부처님 제자들의 공동체를 의미로 이해 하였기 때문이다.

 

좀 더 면밀히 말하면 상가는 일반 제자 누구나가 아닌 궁극적 목표의 열매를 거둔 제자(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를 성취하고 열매를 거두는 것이 오직 출가자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물론 출가자들이 수행하기에 더 적합한 환경에 있지만 도를 이룬 재가자들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귀의(歸依)의 대상은 스님이 아니라 상가

 

이처럼 재가불자도 얼마든지 도와 과를 이루어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현상이다.

 

따라서 상가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정신적 해탈의 높은 경지에 이른 누구에게나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깨달음을 위해 더욱 더 매진 하는 이들이 출가자들이기 때문에 상가는 출가자들, 즉 비구와 비구니를 지칭 하게 되었고, 상가는 다만 출가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든 도를 이루어 열매를 거둔이는 상가로 여겨지니 출가자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안내자로서의 상가에 의지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함은 고통으로 부터 해탈을 위하여 삼보에 의지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번 반복한다.

 

 

Buddha saraa gacchāmi.

(붓당 사라낭 갓차아미,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Dhamma saraa gacchāmi.

(담망 사라낭 갓차아미,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Sagha saraa gacchāmi.

(상강 사라낭 갓차아미, 상가에 귀의 합니다)

 

 

 

 

빠알리어 삼귀의 음악

三皈依 依靠 无尘4专辑 mp3试听 

http://buddha.goodweb.cn/...wnload17/依靠.wma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세번째의 귀의의 대상은 상가이다. 우리나라처럼 스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상가라는 것은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로 이루어진 4부 대중의 상가를 말하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귀의 대상이 우리나라처럼 모든 스님이 아니라, ‘도와 과를 이루신 분들이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본보기로서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열매를 거둔 이들이 귀의의 대상인 것이다.

 

보석경(Ratana-sutta, 라따나숫따)에서도

 

그런 예는 초기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예불문으로도 사용 되고 있는 보석경(Ratana-sutta, 라따나숫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닙바나를 성취(게송 7)

 

부처님 가르침 실천하고 수행하여

감각적 쾌락 대신 마음의 안정 얻고

굴레에서 벗어나 죽음을 초월하고

지극한 평화를 누리는 성인들,

상가는 이 세상 으뜸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그대들 행복하길!

 

 

네가지 성스런 진리를 실현함(게송 8-9)

 

땅속에 단단히 뿌리박은 말뚝처럼

사방(四方)의 바람에 동요조차 없는

참으로 탁월하게 뛰어나신 분들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

상가는 이 세상 으뜸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그대들 행복하길!

 

부처님의 깊은 지혜 훌륭히 설해진

성스러운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니

설사 그들에게 방일함이 있더라도

여덟 번째 입태는 갖지 않으리.

상가는 이 세상 으뜸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그대들 행복하길!

 

 

세가지 족쇄를 풀음(게송 10)

 

수행으로 통찰지혜 얻게 된 이들은

‘유아견(有我見), (에 대한) 의심,

의식(儀式)에의 집착‘인

세 가지 사견이 단번에 제거된다.

이로써 여섯 악행 범할 일 없으니

사악도 수렁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4)

상가는 이 세상 으뜸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그대들 행복하길!

 

 

보석경은 부처님의 원음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Sutta Nipata, Sn 2.1)와 쿳다까빠따(Khuddakapatha, Khp 7)에서 발견된 부처님과 불교도들의 이야기이다.

 

영문판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Ratana_Sutta)의 설명에 따르면 귀의처로서의 상가는 닙바나(열반)을 성취한 성자들이 사성제를 실현하고, 윤회의 속박으로 묶어 놓고 있는 유신견(有身見)’등을 비롯한 세가지 족쇄를 푼 성스런 성자공동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청정도론의 승수념(僧隨念)에서도

 

또 남방테라와다 불교의 부동의 준거틀이자 최고의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을 보면 상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승수념)’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사쌍) 여덟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 팔배)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

(청정도론 1, 519p)

 

 

부처님의 제자들이 반드시 출가수행자 이어야 한다는 말이 없을 뿐 더러 도와 과를 성취한 성자들(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공양의 대상이고 복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불상앞에 놓여 있는 복전함은 응당 살아 있는 본보기인 성자들 앞으로 옮겨 놓아야 할 것이다.

 

길의 안내자로서의 부처님

 

불교의식에 있어서 삼귀의는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서 삼보에 대한 헌신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반열반에 드셔서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부처님으로 부터 어떤 종류의 특별한 도움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길의 안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오직 길을 가르칠 뿐, 그것을 따르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렇게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 하셨다고 한다. 이런 메세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보여 주시고 안내 할 수 있지만 궁극적 차원에서 그 길을 따르는 것은 개개인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조차도 안내자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살아 계신 부처님

 

부처님은 길의 안내자이었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들어 안 계신 이 때,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 부처님 살아 있을 때 조차도 부처님의 말씀이 가르침이었고, 부처님이 안내자 이었다는 점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음에는 물론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다만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왜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 해야 하는가. 그 것은 궁극적으로 이 길은 부처님께서 깨닫고 몸소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 분의 가르침과 수행을 통해 살아 계신다. 우리들이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그 해탈과 열반의 길을 수행하여 열매(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를 맺는 다면 부처님은 항상 우리 곁에 살아 계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도 살아 있고, 승가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붓다와 담마와 상가의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은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2010-08-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