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비는 대승불교의 전유물일까, 대승기신론의 지관쌍운과 위빠사나 대비심

담마다사 이병욱 2010. 9. 2. 14:37

 

 

 

자비는 대승불교의 전유물일까, 대승기신론에서 본 지관쌍운과 위빠사나 대비심

 

 

 

 

 

 

 

우리나라에 초기불교가 도입되어 들어 온 이래 가장 생소한 단어가 위빠사나라는 용어일 것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위빠사나는 순수한 빠알리어 용어이다. 이를 영문표기 그대로 읽으면 비파사나(vipassana)’가 된다. 그런데 위빠사나라는 말이 많이 보급 되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아직도 비파사나라는 발음그대로의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게 대승불교을 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위빠사나로 깨달을 수 없다는데

 

대승불교를 연구 하는 학자는 스님 또는 일반인들은 빠알리어 보다 범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런 예로 담마나 빤냐에서도 볼 수 있다. 법을 빠알리어로 담마(dhamma)라 하는데, 이를 범어로 표기 하면  다르마(dharma)가 된다. 또 통찰지를 빠알리어로 빤냐(paññā) 라 하고, 범어로는 프라즈냐 (Prajñā)라고 표기 한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위빠사나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비파사나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마음으로 부터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와 같다. 실제로 유명한 선사중에 한 분은 위빠사나로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 하기 까지 한다.

 

지난 8월에 간화선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는데 대구의 유명한 사찰의 조실스님은  간화선 공부만이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지 위빠사나 같은 수행법으로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자신의 법어집에 수록해 놓고 있다고 한다. 이런 류의 말은 한문경전으로 공부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지 영어경전으로 공부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이 말은 불자들에게 잘 알려진 눈푸른 외국스님인 현각스님이 우리나라에 와서 유명선사와 대화 하는 과정에서 들었다는 한문경전 우월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한문제일주의와 간화선 제일주의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불자들이 흔히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대승불교는 자비의 불교이고, 소승불교는 자기자신의 해탈과 열반만을 추구하는 불교라고 말한다. 따라서 중생구제에 관심이 없고 자비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대승불교의 일부 선사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위빠사나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소승불교는 자비사상이 결여 되어 있다는 주장은 깨졌다. 그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대승불교의 이론서라 불리우는 대승기신론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상식을 깨 버린 것일까.

 

대승기신론을 알게 된 것은 2005년이다. 그 때 당시 대승불교만 알고 있던 터라 대승불교의 이론서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사 본 책이 서광스님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불광출판사)’이다. 사경을 두번하고 보았다.

 

그러다 잊고 있다 지난 여름 bbs불교방송에서 경전공부시간에 성정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본 결과 그 동안 놓치고 있었던 놀라운 두가지 사실을 발견 하게 되었다. 그 두가지는 지관(止觀)수행대비심(大悲心)’에 관한 것이다.

 

대승기신론은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대승논사이자 시인인 아슈바고샤(Asvaghosa. 마명)가 저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산스크리트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한역 된 것은 550년 무렵인데 원전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대하여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아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승기신론은 일심사상과 여래장 사상, 삼신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자연이나 인류가 출현하기 전에 절대적인 정신의식(일심)이 존재하였다고 하면서 그것은 일체 사물의 본원이며 모든 현상에 내재하는 본질이므로 사람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은 다 여기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一心, 眞如)을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눠, 심생멸은 진여의 체와 동일하나, 무명으로 인해 불생멸에서 생멸의 상태를 따른다고 한다.

 

그러나 진여 자체를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진과 망이 화합한 상태이므로, 이것을 아뢰야식 즉 여래장(如來藏)으로 본다. 한편 유식설에서는 아뢰야식을 미망(迷妄)의 근원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여래장설과 차이가 나지만, 대승기신론에서는 유식설에서 미망의 근원이라고 본 아뢰야식과 자성청정심인 여래장을 서로 대립되면서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기신론에서 본 비발사나(毘鉢舍那)’

 

이처럼 여래장사상의 이론서이자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대승기신론에서 위빠사나라는 말이 나온다. 책의 거의 끝 무렵에 지관문(止觀門)에 보여 지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

운하수행지관문 소언지자 위지일체경계상 수순사마타관의고 소언관자 위분별인연생

滅相 順毘鉢舍那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 雙現前故

멸상 순비발사나관의고 운하수순 이차이의점점수습 불상사리 상현전고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말했던 지()란 이른바 일체 경계의 현상을 그치는 것이다. 사마타란 관의 의미를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말했던 관()이란 이른바 인연으로 생멸하는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란 관찰의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해야 하는가? 이는 두 의미로써 차츰차츰 수습하여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두 가지가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장 중에 비발사나(毘鉢舍那)’가 위빠사나를 의미한다. 범어를 한역할 때 위빠사나를 비발사나로 표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위빠사나를 한자어로 관이라 하는데, 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 無得久停須臾變壞 一切心行念念生滅 以是故苦 應觀

수습관자 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무득구정수유변괴 일체심행염념생멸 이시고고 응관

 

()을 수습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잠시 사이에 변하고 무너지며, 일체 마음의 진행이 생각 생각에 생멸한다.

 

 

법상관에 나오는 문구인데, 마음이 생멸하는 것으로 정확하게 표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승기신론에서는 위빠사나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관쌍운(止觀雙運)과 깨달음

 

그 이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 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음에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승기신론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是止觀二門 共相助成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시치관이문 홍상조성불상사리 약지관불구 즉무능입보리지도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지관의 두 문은 공통으로 서로가 돕고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만일 지관을 갖추지 않는다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사마타)와 관(위빠사나)를 갖추지 않는다면 보리의 도 즉,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다. 이 말은 앞서 언급한 대구의 유명선사가 위빠사나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을 정면으로 뒤집는 말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지와 관을 병행수행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간화선만 가지고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들의 칼럼을 보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깨달음에 대한 견해가 많다는 것은 깨달음에 대하여 정의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하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이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도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생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만일 마음을 생멸이 아닌 연속적인 한 마음으로 본다면 결코 열반을 실현 할 수 없을 것이다.

 

열반이란 마음이 더 이상 일어 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데 마음이 계속 남아 있다면 열반이라고 볼 수 없다. 대표적으로 사마타 수행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간화선과 같은 사마타 수행방법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할 수 없어서 열반을 성취 할 수 없을 것이다.

 

위빠사나와 대비심

 

대승기신론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대비심이 생겨 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상식으로 대승불교는 보살사상으로서 자비의 불교로 알려져 왔고, 소승불교는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 하는 이기적인 불교로 알고 있었으나 완전히 뒤집는 말이다. 이와 관련되 문구는 다음과 같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부차약인유수어지 즉심침몰 혹기해태 불락중선 원리대비 시고수관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름을 일으키어 뭇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 그러므로 관()을 닦아야만 한다.

 

 

이 문구에서 사마타()만 닦는 수행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삼매에 들어 가는 것만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나태해지고 선행을 즐기지 않게 되거 대비심심을 잃게 되기 때문에 위빠사나()을 닦아야 된다고 분명히말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현대심리학으로 풀어 본 대승기신론(불광출판부)의 저자 서광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지금까지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은 주로 남방불교, 즉 소승불교의 전통에서 하는 수행방법이고, 참선수행은 그야말로 보살이 중생의 깨달음과 이익을 돕기 위해서 수행하는 대승불교의 수행전통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승불교의 핵심과 요체를 잘 설명하고 있는 대승기신론에서 참선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병행해야 할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타인을 향한 선행과 보살의 자비심이 길러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광스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현대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비구니스님인 서광스님의 솔직한 고백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과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이론서라 불리우는 대승기신론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병행 수행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는 가 하면, 대승불교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자비심 또한 참선을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나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대비심의 문제에 대하여 스님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화두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처음 부터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대상인 너를 한꺼번에 무조건 망각하고 떠남으로써 곧바로 삼매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에, 중생이면서도 중생심의 생멸현상을 세밀하게 알거나 이해 하지 못할 수 있다.

(서광스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이렇게 참선 수행에만 몰두 하는 것은 중생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비심도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라고 스님은 보고 있다.

 

반면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하여 중생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어서 대비심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스님들은 왜 차가운 인상일까

 

스님들의 인상은 대체적으로 차가운 느낌이다. 타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불자들이느끼는 스님들의 이미지는 냉철해 보인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가 화두참선 때문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처럼 보이는 좋은 예를 각묵스님의 글에서 발견하였다.

 

 

한국수행자들은 힘으로 밀어붙여 화두가 핵폭발하는 것처럼 펑하고 터지면 그 즉시 도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너무 긴장되고 날카로워져 있어 자비심이나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맹수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각묵스님, 선우논강(대표 철오스님) 7차 토론회 '간화선과 위파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스님들이 화두에 너무 몰두 하다 보니 냉철하고 차가워 보이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화두참선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오로지 일념으로 몰두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무르익었을 때 외부적 기연(機緣)’으로 인하여 화두가 터지는데,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베어버리듯이 항상 화두의 끈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보았을 때 긴장되고 날카로워 자비심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승기시론에서 오직 사마타만 닦는다면(若人唯修於止)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遠離大悲)”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반면에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대상과 일체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분리 하여 관찰 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본다. 거기에다 예쁘다든가 밉다든가 하는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단지 있는 그대로 그렇네” “그렇구나” “그러려니하면서 지켜 볼 뿐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차이가 사마타와 비교하여 자비심이 있고 없고의 차이 일 것이다.

 

관용자애지혜인가

 

대승기신론을 통하여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수행을 겸해서 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이 대비심을 내는 수행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이제까지 대승불교에서 들어 보지 못하였던 말이다. 오히려 간화선만이 최상승선으로서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심지어 어떤 선사는 위빠사나수행으로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승불교 특히 여래장 사상의 불교의 이론서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만일 지관을 갖추지 않는다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런 대승기신론의 논리대로라면 현재의 간화선 만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사마타 없이 위빠사나로 깨달음은 가능하다. 이 경우 삼매와 같은 근본집중이 없이도 찰나집중을 통하여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대비심이 나오게 되어 있다. 사마타 수행과 달리 법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 함으로 인하여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슬픈 것이고 무아인 것을 안다면 마음 속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같은 오염원을 내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욕이 나간 자리에 관용이 채워 질 것이고, 성냄이 나간 자리에 자애, 어리석음이 나간 자리에 지혜가 넘쳐 나게 될 것이다. 결국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속의 탐진치를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채워 넣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자비심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2010-09-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