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법구경17 데와닷따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16. 13:54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법구경17 데와닷따이야기

 

 

 

바꿀 수 없는 축적된 성향

 

한 번 형성된 성향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이를 내 뜻대로바꾸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탐내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계속 탐내는 마음을 낼 것이고, 화내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화를 낼 만한 상황에 처하면 화 부터 낼 것이다. 양심없고 수치심 없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지 물불 가리지 않고 실행 할 것이다.

 

이렇게 한번 형성된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각자 형성된 성향이나 기질을 축적된 성형이라 말하고 이는 과거 전생의 축적된 성향의 산물로 본다.

 

한 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몸을 유지 한 채 일생을 살아 간다. 만약 개로 태어 났다면 죽을 때 까지 개의 모습을 유지한 채 살아 갈것이다.

 

성향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번 내향적성격으로 태어났다면 외향적 성격으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내향적 성격은 죽을 때 까지 지속 된다.

 

사람이 죽어서 재생하게 되면 이전의 몸과 마음이 아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업의 과보에 따라 전혀 다른 몸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한번 사람으로 태어 났다고 해서 다음 번 생에도 사람몸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일 소로 태어 났다면 죽을 때까지 소의 몸을 유지 해야 할 것이다. 성향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바왕가(bhavanga)이론으로 설명한다.

 

결정적으로 작용 하는 신업(身業)

 

 그런데 사람이 소가 된다거나 하는 극적인 변화는 드믈다는 것이다. 성향이나 기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사 집안안에서 의사 나고 음악가 집안에서 음악가가 나오듯이,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내생이 시작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 열심히 봉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 간다면 내생도 그렇게 살아 갈 확률이 매우 높다. 반면에 지금 방탕하고 되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 마음이 다음생으로 전해져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 나는 것으로 본다.

 

만일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살인을 저지른 마음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 다는 것이다. 도둑질을 밥 먹듯이 몰래 하였다면 그 역시 그 몰래 하는 마음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 날 것이다. 삿된 짓을 수치심 없이 일상적으로 행하였다면 그 마음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 날 것이다.

 

이렇게 몸으로 지은 신업(身業)은 다음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구업이나 의업 보다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그 중 살생업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 날 수 없는 무거운 죄(重罪)’인데 그 것도 살생의 대상에 따라 다르다.

 

아비담바논장에서 업의 분류를 보면

 

스님들 뿐만 아니라 불자들도 업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선인선과라거나 악인악과라는 말과 함께 인과론을 말하는데, 이 업을 바르게 이해 하지 못하면 지혜가 나지 않을 뿐만아니라, 자칫 지나치게 업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 들이는 숙명론자운명론자가 되기 쉽다.

 

초기불교에서는 업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 하고 있다.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업은 기능과 순서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발생하는 업을 16가지 경우의 수를 들고 있다. 그 것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업의 기능에 따른 분류표

기능에 따라

By way of funtion

과보가 발생하는 순서에 따라

By order of Ripening

성숙하는 시간

따라

By time of Ripening

과보가 발생하는 장소에 따라

By place of Ripening

1. 발생하는 업

Productive

1. 무거운 업

Weighty

1. 현생에 받는 업

Immediately effective

1. 선하지 않은 업

Unwholesome

2. 돕는 업

Supportive

2. 죽음에 가까운 업

Death-proximate

2. 다음 생에 받아야 할 업

Subsequently effective

2. 욕계의 선한 업

Sense-sphere wholesome

3. 방해하는 업

Obstructive

3. 실행된 업

Habitual

3. 연속적으로 받는 업

Indefinitely effective

3. 색계의 선한 업

Fine-material -sphere wholesome

4. 해치는 업

Destructive

4. 이미 지은 업

Reserve

4. 잠재적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업

Defunct

4. 무색계의 선한 업

Immaterial-sphere wholesome

 

 

 

 

무거운 업이란

 

여러가지 업중에 무거운 업이 있다. 무거운 업이란 그 자체의 힘이 너무 강해서 다른 어떤 업도 이 업을 없애고 재생연결식이 될 수 없는 업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선정수행을 한 사람들은 그 선업에 따라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고, 살인업을 저지른 사람들은 지옥에 태어 날 수 밖에 없는 업을 말한다.

 

선정수행도 무거운 업이다. 다만 선업이기 때문에 사소한 악업의 힘보다 무거워 다음 생에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정수행을 하였더라도 살인을 하게 되면 중죄를 짓게 된다. 그런데 살인도 살인 나름이라는 것이다.

 

살생을 할 때는 불선(不善)의 마음이 일어난다. 죽이려는 마음이 일어 났을 때 그 대상이 반드시 사람만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살생은 곤충을 포함하여 동물, 사람등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식물은 제외된다.

 

식물도 살생의 대상에 포함될까

 

식물은 파장만 있지 마음이 없다. 이렇게 마음이 없는 것을 무정물(無情物)이라 한다. 반면에 마음이 있는 생명체를 유정물(有情物)이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중생은 바로 이 유정물을 말한다.

 

식물과 같은 무정물을 살생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이유는 잘라도 또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있는 유정물은 한 번 잘리면 다시는 살아나지 않는다. 살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죽일 의도를 가지고, 실제로 죽였을 때 살생업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살도 포함된다.

 

자살도 일종의 타살로 본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바로 살생이라는 무거운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살생도 죽이려는 의도가 없이 불가피 한 사고로 죽었다면 이는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니다. 벌레를 무심코 밟아 죽였다든가 하는 것등이다. 또 살생을 해도 우발적으로 하였다면 그 과보도 적다.

 

살생도 직접적인 것과 간적접인 것이 있다. 직접적인 것은 직접 죽이는 행위를 말하고, 간접적인 것은 직접죽이지는 않았지만 상대를 고의적으로 해치거나 괴롭혀 죽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이가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구업을 지었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 죽음으로 몰아 갔다면 살인업을 저지른 신업으로 보는 것이다.

 

가장 무거운 살생업은

 

살생도 살생의 대상에 따라, 동기에 따라, 노력에 따라 각각 과보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짐승을 죽이는 것에 따라 과보가 다르고, 짐승도 큰짐승과 작은짐승에 따라 과보가 차이가 난다. 또 낮은 의식수준의 중생과 높은 의식의 성자를 죽이는 것도 과보가 다르다. 그 중 가장 큰 과보를 받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첫째, 아버지를 살해 하는 것

둘째, 어머니를 살해 하는 

셋째, 아라한을 살해 하는 것

넷째,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

다섯째, 승가를 분열 하게 하는 것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살해 하거나, 아라한과 같은 성자을 살해하는 행위는 그 어떤 살생과보 보다 가장 무겁다. 또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거나 승가를 분열하게 하는 행위 역시 가장 무거운 중죄로 본다. 이와 같이 5가지 경우의 죄를 오역죄 (五逆罪)라 하여 불교에서 가장 무거운 죄로 간주한다.

 

무간업(anantariya kamma)을 지은 자들이 가는 곳

 

오역죄를 저지르는 자는 지옥에 막 바로 가게 되는데, 그 과보가 너무 무겁다 보니 지옥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무간지옥에 간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란 어떤 곳일까.

 

 

무간은 ‘틈이 없는’ 이라는 뜻으로서 무간지옥은 행복과 즐거움은 없고,

오로지 고통과 괴로움만 있는 세상이다.

 

 

무간자옥을 빠알리어로 아위찌(avici)라 한다. 이의 한자어가 아비지옥(阿鼻地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여덟가지 지옥 중에 가장 아래에 있는 무간지옥은 아비지옥과 동의어로서, 무간업(anantariya kamma)을 지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법구경의 게송17번은 데와닷따와 관련된 인연담에 관한 것이다. 데와닷따는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고, 상가를 분열시켰으므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무간업을 지은 자들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고통스러워 한다. “나는 악행을 저질렀구나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지옥에 태어나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이렇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양 세상에서 모두 고통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화만 내고 살다가 저 세상에 간 사람, 이 세상에서 아귀처럼 인색하게 살다가 저 세상에 간 사람들 역시 저 세상에 가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보람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은 저 세상에서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 갈 것이다. 그렇다면 저 세상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내 행위의 연장선상이 저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공격하는 데와닷따

Devadatta attacking Buddha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Devadatta_attacking_Buddha.jpg

 

 

 

 

1. 빠알리어 법구경

 

 

1-17

Idha tappati pecca tappati               이다 땁빠띠 뺏짜 땁빠띠

pāpakāri ubhayattha tappati             빠아빠까아리 우바얏타 땁빠띠

pāpa me katanti tappati                빠빰 메 까딴띠 땁빠띠

bhiyyo tappati duggati gato.         비이오 땁빠띠 둑가띵 가또.

 

 

2. 우리말 법구경

 

 

1) 거해스님

 

1-17

이 세상에서도 그는 고통당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고통당한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고통을 겪는다.

나는 악행을 저질렀구나 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지옥에 태어나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2) 석지현스님

 

1-17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저 악을 행한 사람은 이 양쪽에서 모두 슬퍼하고 있다.

나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비탄해 하며

그는 슬픔의 정글 속을 헤매고 있다.

 

 

3. 영어 법구경

 

 

1) Acharya Buddharakkhita

 

1-17

The evil-doer suffers here and hereafter; he suffers in both the worlds. The thought, "Evil have I done," torments him, and he suffers even more when gone to realms of woe.

 

 

2) Thanissaro Bhikkhu

 

1-17

Here  he's tormented

          he's tormented  hereafter.

In both worlds

the wrong-doer's tormented.

He's tormented at the thought,

       'I've done wrong.'

Having gone to a bad destination,

he's tormented

       all the more.

 

 

5. 한문 법구경(法增比丘)

 

1-17

今世悲苦受,來世悲苦受,

造作惡業者,兩處悲苦受,

念己造惡業,心中更悲苦,

趣向惡道時(Duggati惡趣。地獄,餓鬼,畜生,阿修羅四惡趣),忍受巨大苦。

 

 

6. 일어 법구경(西津紘一)

 

1-17

いことをする人は
  二つの所で
  苦しむよ
  この世で苦しみ
  地獄で
み苦しむよ

 

7. 법구경 인연담

 

 

1) 영어 인연담(Daw Mya Tin)

 

 

Verse 17

 

I (12) The Story of Devadatta

 

While residing at the Jetavana monastery in Savatthi, the Buddha uttered Verse (17) of this book, with reference to Devadatta.

Devadatta was at one time residing with the Buddha in Kosambi. While staying there he realized that the Buddha was receiving much respect and honour as well as offerings. He envied the Buddha and aspired to head the Order of the bhikkhus. one day, while the Buddha was preaching at the Veluvana monastery in Rajagaha, he approached the Buddha and on the ground that the Buddha was getting old, he suggested that the Order be entrusted to his care. The Buddha rejected his offer and rebuked him, saying that he was a swallower of other people's spittle. The Buddha next asked the Samgha to carry out an act of proclamation (Pakasaniya kamma*) regarding Devadatta.

Devadatta felt aggrieved and vowed vengeance against the Buddha. Three times, he attempted to kill the Buddha: first, by employing some archers; secondly, by climbing up the Gijjhakuta hill and rolling down a big piece of rock on to the Buddha; and thirdly, by causing the elephant Nalagiri to attack the Buddha. The hired assassins returned after being established in Sotapatti Fruition, without harming the Buddha. The big piece of rock rolled down by Devadatta hurt the big toe of the Buddha just a little, and when the Nalagiri elephant rushed at the Buddha, it was made docile by the Buddha. Thus Devadatta failed to kill the Buddha, and he tried another tactic. He tried to break up the Order of the bhikkhus by taking away some newly admitted bhikkhus with him to Gayasisa; however, most of them were brought back by Thera Sariputta and Thera Maha Moggallana.

Later, Devadatta fell ill. He had been ill for nine months when he asked his pupils to take him to the Buddha, and subsequently made the trip to the Jetavana monastery. Hearing that Devadatta was coming, the Buddha told his disciples that Devadatta would never get the opportunity to see him.

When Devadatta and his party reached the pond in the Jetavana monastery compound the carriers put down the couch on the bank of the pond and went to take a bath. Devadatta also rose from his couch and placed both his feet on the ground. Immediately, his feet sank into the earth and he was gradually swallowed up, Devadatta did not have the opportunity to see the Buddha because of the wicked deeds he had done to the Buddha. After his death, he was reborn in Avici Niraya, a place of intense and continuous torment.

* Pakasaniya kamma: An act of Proclamation carried out by the Order of the Samgha regarding a member declaring that as his conduct was of' one kind before and is of another kind now, henceforth all his physical and verbal actions are only his and have nothing to do with the Buddha, the Dhamma and the Samgha.

 

Then the Buddha spoke in verse as follows:

 

Verse 17: Here he is tormented, hereafter he is tormented; the evil-doer is tormented in both existences. He is tormented, and he laments: "Evil have I done." He is even more tormented when he is reborn in one of the lower worlds (Apaya).

 

 

 

2)우리말 인연담(진흙속의연꽃)

 

 

데와닷따 이야기

 

부처님이 사왓띠의 제따와나승원에 머물고 계셨을 때, 데와닷따에 대한 게송 17번을 읊으시었다.

 

데와닷따는 언젠가 부처님과 함께 꼬삼비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 그는 부처님이 공양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존경과 명예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부처님을 시기하였고, 비구들의 공동체에서 우두머리가 되려는 열망을 품었다.

 

어느 날,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벨루와나승원에서 법문하였을때 나이가 든 부처님에게 다가가 머리를 땅에 대고 부처님을 돌보아 드릴테니 자신에게 승가를 위임해 줄 것을 제안 하였다.

 

부처님은 그가 사람들에게 알랑거리는 제비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면서 그런 제안을 거절하고 그를 꾸짖었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데와닷따와 관련하여 상가에서 조치(Pakasaniya kamma)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 데와닷따는 기분이 매우 상했고 부처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였다. 그는 세번에 걸쳐서 부처님을 죽이려 시도 하였다.

 

첫번째로 자객을 고용하였고, 두번째는 깃자꾸따(Gijjhakuta)언덕에 올라가 큰 바위를 부처님에게 굴린 것이었고, 세번째는 코끼리 날라기리(Nalagiri)로 하여금 부처님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고용된 암살자는 부처님을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수다원과를 증득한 후에 돌아왔다. 데와닷따에 의해 굴려진 큰 바위는 부처님의 발끝에 약간의 상처만 주었을 뿐이다. 코끼리 날라기리가 부처님을 향하여 돌진하여 왔을 때 부처님의 의해 온순하게 변했다. 그래서 부처님을 죽이려는 데와닷따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 갔는데, 그는 또 다른 모사를 꾸몄다.

 

그는 승가를 분열시키기 위하여 그를 따르는 비구들을 데리고 가야시아(Gayasisa)로 데려가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장로에 의해 되돌아 왔다.

 

후에 데와닷따는 병에 걸렸다. 그는 9개월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그는 그의 제자에게 그를 부처님에게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고, 제따와나 승원으로 여행을 하였다. 데와닷따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부처님은 그의 제자에게 그가 다시는 부처님을 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데와닷따와 그의 일행이 제따와나승원의 연못에 도착하자 구내의 운송인들이 연못의 둑 위에있는 그의 소파를 밑으로 내려 놓고 하나의 욕조를 가져 왔다. 데와닷따는 그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서 그의 발을 땅에 내딛었다. 그러자 즉시 그의 발은 땅안으로 가라 앉았고, 그는 점차적으로 빨려 들어갔다.

 

데와닷따는 그가 부처님께 저지른 사악한 행위로 인하여 두번 다시 부처님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죽어서 격렬하고 끊임없는 고통만 있는 아위찌 니라야(Avici Niraya, 무간지옥)에 재생되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시었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고통당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고통당한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고통을 겪는다.

나는 악행을 저질렀구나 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지옥에 태어나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법구경17 데와닷따이야기.docx

 

 

2010-08-16

진흙속의연꽃

 

법구경17 데와닷따이야기.docx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