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죽은자를 위한 종교, 병주고 약주는 종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8. 12:33

  

죽은자를 위한 종교, 병주고 약주는 종교

 

 

 

 

 

 

컴퓨터의 갑작스런 사망

 

컴퓨터를 포멧한지 1년이 채 안되어서 또 포멧하게 되었다. 포멧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민다고 한다. 민 가까운 원인은 윈도우가 부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 원인은 시스템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좀 더 먼 원인은 상실된 기능을 복원 시키는 과정에서 일어 났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원하지 않는 프로그램의 유입에 따른  것이다. 이른바 불청객 프로그램을 제거 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가 결국 컴퓨터를 포멧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그런데 그 후유증이 너무 크다. 그동안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였던 일부 자료가 상실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소록이 날아간 것은 두고 두고 통탄할 일이다.

 

이제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지인과 고객들의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처럼 손쓸 겨를도 없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가 컴퓨터 뿐일까.

 

웹상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급작 스럽게 사망한 경우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다행히 삶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급작스런 죽음은 아무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아이디어 일지라도 복구 할 수 없다. 마치 컴퓨터가 포멧이라는 재생의 과정을 거쳤을 경우 C방에 있는 주소록이나 메일, 보관자료가 모두 날아 가 버리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D방에 보관 되어 있는 자료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더구나 웹상에 보관 되어 있는 자료 역시 건재하다. 그래서 예로 부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나 보다.

 

그런데 하드디스크가 깨져 D방에 있는 정보도 사라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경우 종이나 문서에 보관된 자료에 의지 하여야 한다. 종이가 달아져 없어 지지 않는한 상당히 오랫동안 보존을 유지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지자들은 책을 남겼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생각을 정리하여 다른 이들과 공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을 남겼다면 그는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고전을 읽다보면 비록 수백년 수천년전에 지은이들하고 대화 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자신의 생각을 남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웹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인터넷의 특징중의 하나가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주고 받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흔적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가 다 날라갔을지라도 웹상에서 흔적을 발견한다면 일부나마 복구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패턴을 발견하고

 

최근 몇년간 컴퓨터를 포멧하고 다시 까는 과정에서 공통적인 패턴을 발견 하였다. 그 시발은 항상 불법소프트웨어 있었다. 이른바 돈 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바이러스 치료제와 원치 않는 프로그램을 실어서 디스플레이하는 불청객소프트웨어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들 프로그램을 제거 하는 과정에서 컴퓨터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프로그램을 건드려 기능상에 문제가 발생 한다. 이 경우 지식등의 사이트에 물어보기를 활용하려 해결 하려 하나 결국 컴퓨터 사망으로 귀결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 하는 주된 목적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 목적으로 종교를 찾았는데 마음의 안정과 평화는 커녕 마음의 불안과 근심을 느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더구나 잘못된 믿음을 전달하여 물적 심적으로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면 그 종교를 다시 믿지 않게 될지 모른다.

 

죽은자에 대한 배려

 

컴퓨터의 예를 든다면 컴퓨터의 기능상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하여 검색을 하였는데, 어느 사이트에서 올려진 처방대로 하였더니 컴퓨터가 망가졌다면 잘 못된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잘못된 방법이 계속 올려져 있다면 컴퓨터가 망가지는 현상은 계속 발생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을 49재와 천도재에서 본다.

 

동아시아 불교전통과 초기불교는 다르다. 출발부터 다르니 목적지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중유(中有)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는냐이다.

 

중유는 죽은 다음에 다음생을 받을 때 까지 머무는 존재를 말한다. 동아시아불교 전통에서는 예로 부터 중유를 인정해 왔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49일동안 중유상태로 머문다고 하여 이 기간동안 재를 지내주면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믿었다.

 

죽은자에 대한 배려는 아름다운 전통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 처음부터 끝까지 방편으로 일관한다면 불교의 본질에서 크게 어긋나게 된다. 불교가 온통 기복과 방편으로 치우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한참 멀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더우기 유일신교와 공존하고 있는 특수상황에서 그들로 부터 미신행위나 하는 우상숭배의 종교로 공격당하기 딱 알맞다는 것이다.

 

스님인가 사제인가

 

최근 불교TV에서 49재에 관한 인터넷동영상 법문을 들었다. 이 법회를 주관하고 있는 스님은 49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새로운 몸이 확정 되기 이전에 우리가 염부시왕님에게 일생동안 7식작용에 의해서 지어 놓은 선업은 남김없이 염라대왕 업경대에 다 비추어져가지고 미래생으로 전해지게 하고, 나쁜업이 좀 있다 하더라도 잘 봐 주셔가지고 좋은데로 잘 보내 주십시요하고 염부시왕님에게 부탁드리고 청탁하는 것이 49재입니다.

(49재 특강, 23 49재란무엇인가,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5&PID=P529&DPID=59086)

 

 

불교tv의 자막에  12세에 득도하는 것으로 나오는 스님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일생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업에 대하여 일곱번의 심판이 있게 되는데, 새로운 몸을 받기 전에 염부시왕에게 좋은대로 잘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청탁하는 것이 49재라 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스님이고, 자식들의 마지막 효도가 49재라고 한다.

 

이 말을 듣다 보면 스님이 마치 가톨릭의 사제처럼 보인다. 제사를 주관하고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사제인데, 죽은자에 대한 재를 주관하며 염부시왕에게 잘 보아 달라고 청탁한다면  사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인과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부모님 생전에 지은 악업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참회하게 하여 좋은 곳으로 가게 한다는 취지는 좋으나 염부시왕에게 부탁하고 청하는 역할을 스님들이 한다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을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위배 된다.

 

우리나라 불교전통에서 죽은자를 위하여 재를 지내는 것은 49재 뿐만 아니라 죽은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재가 있고 무주고혼을 천도하는 수륙제, 음력 7 15일의 우란분재, 매달 음력 18일의 지장재도 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재를 지내는 재가 유행하다 보니 불교tv에 가사 장삼을 수한 스님이 재의 필요성과 자식의 효도에 대하여 광고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웃의 유일신 종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남방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수행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병주고 약주는 종교

 

컴퓨터를 포맷하게 되는 먼 원인은 불법프로그램의 유입 때문이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다운 하는 과정에서 끼워넣기로 들어 오는 불청객이다. 주로 바이러스퇴치 프로그램인데 문제는 바이러스롤 심어 놓고 바이러스를 치료하라고 하는 케이스가 가장 악질이다.

 

이른바 병주고 약주고식의 프로그램은 제거하려 해도 잘 제거 되지 않는다. 용케 제거 하였다 하더라도 곱게 물러 가지 않는다. 어딘가 망가뜨려 놓고 가기 때문에 결국 컴퓨터를 포맷하기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요즘 컴퓨터 수리하는 곳이 성행한다.

 

한쪽에서 컴퓨터를 망가뜨려 놓으면 또 한쪽에서 수리하며 공생하는 구조가 형성 된 것이다. 이렇게 병주고 약주고 식의 방법이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에만 있을까. 그런 현상을 종교에서도 본다.

 

유일신교 종교는 모든 인간들에게 원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른바 원죄론이다. 원죄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 세상을 창조주가 창조했다고 믿는 것에서 비롯된다.

 

창조론부터 시작하여 원죄론, 대속론, 구원론, 종말론등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학문적 차원에서 계통적인 진리체게로 나타낸것이 조직신학이다. 이와 같은 신학을 체계화한 사람중의 하나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약 악()이 하나도 없다면, 하느님[]도 없다. 왜냐하면 선()[美德]의 질서가 사라진다면 악도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만약 하느님[]이 세상에 악()을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하셨다면, 수많은 선한 것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공기가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불이 나지 않을 것이고, 당나귀가 죽임을 당하지 않는 한 사자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호주의 담미까 스님이 쓴 글로서 2008 7 1일 부디스트채널 (http://www.buddhistchannel.tv/index.php?id=8,6572,0,0,1,0)에 발표된 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악을 방조한 것은 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불교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다른 사람이 착한 일을 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다. 담미까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반박하였다.

 

 

-의사에게 치료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암()이 있어도 좋다.

-준법 시민이 되기 위해서 죄를 저지르는 범법자들도 있어야 한다.

-평화와 휴전협상을 펼칠 수 있도록 때때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병을 고치기 위에서 암이 있어야하고, 법죄자가 있어야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때때로 전쟁이 일어나야 평화의 고마움도 알게 된다는 논리가 아니냐는 식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병주고 약주고’가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너는 죄인이다라고 못 박고 난 뒤에 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말이다.

 

유일신교에서 일단 믿고 나면 그 다음 단계는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가슴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응어리를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우선 천지창조와 같은 말을 믿어야 하고, 한 번 믿었으면 의심을 해서는 안된다. 설령 그것이 천지창조와 같은 거짓말일지라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믿기지 않아도 믿어야 하는데, 믿지 않는 다면 화를 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늘 자신을 지켜 보는 하나님이 있어서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고 가슴은 타들어가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가슴에 큰 응어리를 안고 살아 가는 것이다.

 

백년동안 제사 지내는 것 보다

 

종교를 가지는 목적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임에 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종교로 인하여 고통받고 마음이 안정이 깨진다면 종교를 빙자한 사교(邪敎)에 가깝다. 그럴 경우 차라리 종교를 갖지 않는 것이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신이 없어도 인간은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병주고 약주는 종교는 최악의 종교이다. 컴퓨터에서 바이러스를 유포 하고 그 바이러스를 치료하라고 번쩍 번쩍 플레시를 터 뜨리는 프로그램과 다름 없다.

 

또 죽은자를 대상으로 사제 역할을 하는 것 역시 바람직 하지 않다. 잘 못된 정보를 가르쳐 주어 컴퓨터를 망가뜨리게 하는 요인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할까. 불교에서는 붓다와 담마와 상가를 믿고 의지하라고 한다. 이중 상가를 의지처로 삼는 다는 것은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성자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사쌍팔배의 성자란 무엇을 말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쌍은 네쌍의 인간들을 말하는데, 쌍으로서 첫번째 도에 선 자와 과에 선 자를 한쌍으로 만들어 네쌍의 인간들이 있는 것을 말한다.

 

팔배는 여덟단계의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인간으로서 첫 번째 도에 선자를 하나로 만들고 또 과에 선자를 하나로 만들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덟사람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바르게 도를 닦고, 참되게 도를 닦고, 합당하게 도를 닦는 수행자에게 공양할 만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Yo ca vassasata jantu          요 짜 와싸사땀 잔뚜

aggi paricare vane               악깅 빠리짜레 완네

ekañca bhāvitattāna             에깐짜 바위땃따남

muhuttamapi pūjaye                무훗따무삐 뿌자예

sā yeva pūjanā seyyo             사 예와 뿌자나 세이요

yañce vassasata hua        얀쩨 와싸사땀 후땀.

 

사람이 숲 속에서 백 년 동안 불을 섬길지라도

닦은 자들에게 단 한 순간이라도 예배하면

이 예배는 백 년의 제사를 능가하리.

(법구경 107)

 

 

매달마다 백년에 걸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공양받아 마땅한 자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백년동안 제사 지내는 것 보다 훨씬 낫고, 더구나 보다 큰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201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