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하여 ‘배신행위’를 하는 사람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15. 13:05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하여 배신행위를 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가장 오해를 많이 하는 것이 무아(無我)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불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절에 수십년을 다녔어도 무아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드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제대로 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사꺄무니 부처님은 무아에 대하여 경전에서 수도 없이 설하였다. 또 경전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이론화한 아비담마논장이나, 경전의 내용을 주석하여 만든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에 상세히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불자들은 이를 접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아에 대하여 오해 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글로벌시대에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동안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사람들

 

무아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초기불교를 전법하고 있는 각묵스님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순히 ‘내가 없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 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조건에 따라 발생되어 ‘찰라생 찰라멸’하는 연기적 흐름일 뿐이다.

 

 

무아가 단지 내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라는 뜻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단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조건지워져 상속되기 때문에 연기적 흐름으로 본 것이다.

 

육근이 육경에 부딪칠 때 마다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마음이 사라질 때 조건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것을 다른 말로 업()이라고 한다. 이렇게 조건지워져 다음 마음이 일어나 끊임없이 생멸하므로 고정된 나영원히 변치 않는 영혼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사꺄무니 부처님이 직접설한 내용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본다면 자아라든가 영혼같은 것은 모두 개념(빤냐띠)’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무아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을 보는 눈이다. 모든 법을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본다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법이고 이 법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진리중의 진리인 사성제로 잘 요약된다. 그런데 고통과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을 소멸로 이끄는 도는 모두 생멸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는 2지연기가 고통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를 더 확장한 것이 8지연기, 10지연기, 12연기가 된다.

 

이 중 12연기는 조건 지워져 일어나고 사라짐 현상을 12단계로 설명 하였는데, 이는 윤회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게송을 남기거나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 오도송을 보면 대체로 합일과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사꺄무니 부처님의 오도송은 이와 다르다.

 

다음게송은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오도송이다.

 

 

한량없는 세월의 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법구경 153-154)

 

 

부처님의 원음이 충실하게 담겨져 있다는 법구경에 나온 부처님의 오도송이다.

 

내면의 오염원과 속박을 내어 보냈으므로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과보로 남겨진 마음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태어 날일이 없을 것이다. 태어남은 과보를 대상으로 하여 알음알이(, 재생연결식)가 일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모든 욕망이 파괴 되었다면 다음 생의 표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알음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태어남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열반에 관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마음의 청정과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야 하는데, 초기불교에서는 그런 마음의 오염요소에 대하여 분명이 법으로 정의 해 놓았다. 이를 해로운 마음의 작용(마음부수, 심소)라 하는데 그 것들은 다음과 같다.

 

 

탐욕, 사견, 미혹, 성냄, 의심, 자만, 들뜸, 해태, 후회, 혼침,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질투, 인색

 

 

이렇게 초기불교는 무엇이든지 명확하다. 두리뭉실하게 넘어 가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은 14가지해로운 마음의 작용 중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특별히 3독이라 하여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할 것으로 본다. 탐진치 3독이 남아 있다면 결코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

 

화내는 것을 자비행의 방편이라는데

 

우리나라 고승 중에 불같이 를 잘 내는 스님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불교방송을 듣다 보면 스님이 야단을 쳐 신도가 다른 절로 갔다든가 하는 말을 듣는다.

 

화를 잘내서 모두들 호랑이 스님이라고 하고, 야단을 잘쳐서 야단치는 스님이라 하는데, 이는 화를 잘 내었다는 것은 결국 성냄을 뿌리 뽑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탐진치 3독중에 가장 겉으로 가장 드러나기 쉬운 것이 성냄이라 한다. 따라서 그사람이 인격적으로 된사람인지 또는 깨달은 사람인지는 화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탐욕과 어리석음은 잘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화내는 것은 금방 드러나 보인다. 따라서 성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얼마나 탐욕이 많은지 어리석은지 함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스님들이 화를 내거나 야단치는 행위에 대하여 자비행이라고 한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까지 자비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또 스님이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는 것에 대하여 모두 자비행으로 본다면, 덜 성숙된 스님들의 화내는 행위도 자비행으로 보아야 할까.

 

일반적으로 성내는 행위는 탐진치가 드러나 보인 것이다. 성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을 자주 낸다는 것은 그 만큼 탐욕도 많고 어리석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탐진치의 소멸을 깨달음의 조건으로 본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다. 깨달은 사람들은 자애로 넘쳐 나야 한다. 성냄이 소멸되면 그 자리에 자애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또 탐욕이 소멸되면 그 자리에 관용, 어리석음이 소멸되면 지혜가 나올 것이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관용자애지혜로 넘치는 사람이 진정하게 깨달은 사람이 아닐까.

 

수행자가 화를 자주 낸다는 것은

 

수행자가 화를 자주 낸다는 것은 아직 유신견(有身見, 사까야딧띠,sakkāya-ditthi)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유신견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자아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윤회 하는 것이다. 그런 자아를 자꾸 강화 하다 보면 영원에 대한 집착이 일어난다. 그런 집착의 산물이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개념이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결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수다원이상 성자가 되는 조건 중의 가장 첫번째 조건이 유신견의 타파이다. 수다원이 되려면 1)유신견, 2)법에 대한 의심, 3)잘못된 수행 이세가지 조건을 타파 해야 한다.

 

깨달음은 누가 인가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득도 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행동과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다.

 

마구 화를 낸다든가 매우 탐욕스럽다든가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그를 깨달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또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사람을 깨달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족쇄를 타파한 사람을 깨달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인가가 필요 없는 것이다. 중생을 붙들어 매는 그 10가지 족쇄는 다음과 같다.

 

 

1)유신견

2)법에 대한 의심

3)잘못된 수행

4)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탐심)

5)악의(진심)

6)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7)무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8)들뜸

9)아만

10)무지(어리석음)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사까무니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회의 하는 사람, 그리고 잘못된 수행방법을 가지고 있는 수행자들은 결코 성자가 될 수 없다.

 

설령 그가 1)유신견과 2)법에 대한 의심과 3)잘못된 수행 을 극복하였을 지라도 화를 낸다면, 그는 5)악의(진심, 성냄)4)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탐심)9)무지(어리석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깨달았는지 아는 방법 또 한가지

 

이렇게 화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 파악 할 수 있는데 또 한가지 방법이 있다.

 

깔라야나미따 (http://cafe.daum.net/kalyanamitta) 선원의 아눌라스님에 따르면 도와 과는 순간에 일어난다고 한다.

 

칠청정과 16단계의 수행과정 중에 도의 지혜 (magga ñāna) 와 과의 지혜(phala ñāna)에서 도와 과를 얻고 나면 그 때 부터 모든 현상이 사성제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모든것이 연기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깨달았는지 알려면 이야기 할 때

얼마나 연기에 달통해 있느냐로 알 수 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연기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가 이야기 할 때 연기적으로 이야기 하는지 아닌지로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연기는 바로 사성제를 말한다. 사성제에 달통해야 깨달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무언가 보았다는 사람들

 

우리나라 불자중에 무언가를 보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느니 부처님을 친견했다느니 하는 말들이다. 이런 류의 말은 유일신교에서도 많이 한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를 보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모든 말은 모두 환시환청일 뿐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고 자신이 들여다 보는 것이다. 이를 환화(幻化)’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 현상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는 불교tv의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환화(幻化)는 실체가 없는 것을 현재에 있는 것처럼 환술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화가가 그럴듯한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구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화가가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자주 들여다 보다 자신의 마음을 그 그림속의 귀신에 구속 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신에게 철저하게 거기에 종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비도(非道)라 한다.

 

도가 아닌데 도처럼 보이는 것들

 

마치 도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면 도가 아닌 것을 비도라 한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에서 명확하게 규정 되어 있다.

 

참고로 그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2010-05-09 진흙속의연꽃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구별하는 지혜가 칠청정에서는 5번째 단계에 있고, 16단계 지혜에서는 3번째에 위치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처럼 보이는 비도는 무엇일까. 보통 10가지로 본다. 이를 10가지 마라(mara, 마구니)라 하는데,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를 10경계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광명, 지혜, 희열, 경안, 행복, 믿음, 분발, 마음챙김, 평온, 미세한 집착

 

 

수행중에 빛을 보고, 담마를 근거로 한 지혜가 일어나고, 환희심이 일어나고,고요함이 찾아 오고, 행복감이 일어나고, 굳센 믿음이 일어나고, 대분발심이 일어나고, 담마에 대한 확신이 일어나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평정심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애착이 일어난다면 이는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 빠져 버리면 다음 단계를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도와 과를 얻는 것은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칠청정의 마지막 단계인 지와 견의 청정과 16단계 지혜의 도의 지혜(magga ñāna), 과의 지혜(phala ñāna),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를 통해서이다.

 

이처럼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하는데, 이는 담마가 생멸하는 현상을 무상’ ‘’ ‘무아로 통찰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발견한 사성제도 그와 같은 통찰을 통해서이었다.

 

모든 현상을 사성제와 같이 연기법으로 보지 않으면, 빛을 보고서 , 내가 깨달았구나라고 오해 할 수 있고, 또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면 현상을 바르게 알지 못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커다란 혼란기에 처해 있는 한국불교

 

현재 한국불교는 커다란 혼란기에 처해 있다. 내부 적으로는 최근 도입된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의 수행법과 교학의 도입 때문이고, 외부적으로는 독선적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한 마치 전투집단과 같은 유일신교와 공존하고 있는 한국적 특수상황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를 고수 하려는 불자들의 입장은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확산 되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불교상식을 뒤집어 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불교가 구태의연하고 낡고 오래되고 더구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한 참 벗어나 있다고 생각 하는 불자들은 초기불교의 도입을 적극 환영한다.

 

한 동안 이런 대립과 충돌은 불가피할 것 같다. 종교라는 것이 보수적이라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 들이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고 경계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반발하고 배척하려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알게 되면 중생이니 자아니 하는 것들이 모두 법이 아닌 개념(paññatti, 빤냐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초기불교를 하는 목적은

 

초기불교는 무조건 믿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믿을 만 하기 때문에 믿는 법의 종교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초기불교를 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법을 배우고 연구하여(pariyatti, 빠리얐띠, 교학),

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켜 도를 닦고(patipatti, 빠띠빳띠, 도닦음),

그래서 무상 고 무아의 법의 실상을 꿰뚫고 통찰하여(pativedha, 빠띠웨다, 통찰),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실현한다.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에 매여 있는 불자들은 초기불교가 확산 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마치 자신들의 권위가 훼손이라도 되는 양 적극적으로 그들이 배운 불교를 옹호 하지만 대세는 초기불교로 기울고 있다.

 

유일신교와 같은 이교도와 공존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교도는 항상 그분이 다른 방법으로도, 인류의 선한 유산을 통해서도 계시하시고 있읍니다라고 주장할 때 이에 대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기존 한국불교로는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로 본다면 모두 개념에 불과한 이야기인데,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극락과 같은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또한 이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면 유일신교에 주장하는 그분이 다른 방법으로도...”라는 주장에 반박할 논리가 부족한 것이다.

 

비록 모든 것을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를 들먹이기도 하지만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과 똑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배신행위

 

초기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한국불교에서는 평상시에는 관세음보살을 찾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찾는다. 그 결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항상 3등일 수 밖에 없다.

 

또 마치 극락에 태어나는 것이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이 세상 보다 저 세상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이 세상을 부정하고 저 세상만을 바라는 것은 허무주의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온 12 18계의 이 세상을 이야기 하였지 극락과 같은 저 세상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다른 분의 가르침을 우선하거나 개념에 불과한 사상을 거론 한다면 이는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볼 수 있다.

 

 

2010-08-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