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아날로그 종교에서 디지털 종교로, 디지털시대와 초기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20. 17:13

 

 

아날로그 종교에서 디지털 종교로, 디지털시대와 초기불교

 

 

 

 

 

 

좀처럼 잠을 못 이룰 때

 

잠은 쏟아 지는데 좀처럼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있다. 잠을 잘듯 하면서 기어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을 때 느끼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보통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밥을 먹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모두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잠자려할 때이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여도 조건이 맞으면 잠을 이룬다. 이 것은 나의 의지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매우 피곤한다든지 긴장이 풀려서 몸과 마음이 나른 해 졌을 때 나도 모르게 스스르 잠이 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단 잠만 그런 것일까.

 

설령 잠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꿈을 꾸는 것 또한 내 의지 대로 되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제 멋대로이고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 할 수 없다. 그런 꿈속의 나는 무엇이고 꿈꾸는 나는 또 무엇일까.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어떤 이는 꿈꾸는 나는 진짜 나이고, 꿈속의 나는 가짜 나라고 주장한다. 꿈속의 나는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낸 것 중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 꿈을 깨는 것과 같은 이치라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증거로서 선사들의 임종게중에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우리 모두 꿈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 와 같은 구절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세계는 한바탕 꿈에 불과한 것일까.

 

현실세계에서 현실의 내가 존재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대상이 존재한다. 내가 있으니 너도 있고, 산도고 있고, 물도 있고, 하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세계가 꿈속의 세계에서와 같이 꿈속의 나와 같은 것이라면, 꿈속의 기세간이 꿈꾸는 자가 만들어 낸 것이듯이 지금 보는 산하대지 역시 만들어낸 자가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이 기세간을 만들어 낸 자는 누구일까.

 

꿈속에서 꿈꾸는 자와 꿈속의 세계를 만들어 낸 꿈꾸는 자가 있듯이, 이 현실에서 나와 너와 모든 사람들 그리고 기세간을 만들어 내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한자경 교수는 그녀의 강연에서 이를 한마음이라고 표현 하였다.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일심을 말한다.

 

그 한마음의 다른 표현이 불성, 법계, 주인공, 진아, 원각, 여래장과 같은 말인데 이는 또 한울님, 하느님, 하나님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스노우(snow)라 부르듯이 같은 내용을 두고 서로 달리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꿈의 비유와 범아일여(梵俄一如)

 

그런데 이런 설명이 놀라우리만치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俄一如) 사상과 닮았다는 것이다. 범아일여사상은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서로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트만(atman)이란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이 사변을 거듭하여 도달한 최고의 원리로서 사물에 내재하고, 내부에서 사물을 주재하며 영원성을 가지는데, 이는 절대의 브라흐만(brahman)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개인에 내재한 통일의 원리인 아트만(個我)은 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것이어서 우주의 근본원리인 브라흐만과 동일시 하였을 때 최고의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이 아트만이 전변하여 환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범아일여사상은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꿈꾸는 나가 아트만이고 꿈꾸는 나가 브라흐만이라면, 이 세상을 한 바탕 꿈으로 보고 꿈속의 사람들로 묘사한 선사의 임종게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통적인 현상은 꿈속에서 나를 포함한 꿈속의 사람들은 모두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개아들 역시 꿈꾸는 자가 기세간과 함께 만들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현실로 가져 왔을 때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각자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현실을 꿈꾸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누군가 꾸는 꿈에 불과한 것일까.

 

그 누군가를 브라흐만이고 일심이고, 하늘님이고 하느님이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 누군가는 하나만 있을까. 여럿이 있다면 그들을 꿈꾸는 자가 또 있는 것일까. 이렇게 중중무진 꿈을 꾸듯이 중첩되어 있는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꿈속의 나이든 현실의 나이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내 자신도 콘트롤 하지 못하는데

 

아트만과 같은 고정된 자아나 영원히 불변하는 영혼이 있다면 무엇이 든지 자신의 의지대로 되어야한다. 잠은 쏟아 지는데 잠을 잘 수 없다면 과연 아트만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내 자신도 콘트롤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내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오온 속에 또렷하고 신령스런 마음바탕이 있어서 보고 듣고 하는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있다는데 그 주인공은 잠이 든 상태에서는 왜 소소영영한 상태가 되지 않는 것일까. 깜박 잠이 든 상태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 또 잠드는 것 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면 그 자를 나라고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이웃블로거 사띠현정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영겁불여'의 아트만이 있다면야 왜 내가, 내 마음이나 내 몸조차 제대로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가 이다. 이렇게 '논파' 된것으로 특히, 상좌부 불교에서 해석한다.

(http://blog.daum.net/leesc314/5522824)

 

 

내 몸과 내 마음 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나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아트만과 같은 나가 있다면, 졸릴 때 마음대로 잘 수 있어야 하고, 꿈속에서도 나를 잊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 죽음마저 극복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졸릴 때 마음대로 잘 수 없고, 꿈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고, 더구나 죽음마저 내마음대로 죽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나를 고정된 자아와 영혼을 가진 나로 볼 수 있을까.

 

제법을 디지털과 같은 생멸로 보면

 

이렇듯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를 초기불교에서는 조건 지워진 나로 본다. 순간 순간 생멸하는 마음의 조건이 상속 되어 흐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고정된 자아나 변치 않는 영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범아일여사상을 극복 하면서 성립되었다. 특히 고정된 자아나 변치 않는 영혼이 내재해 있다는 아트만(atman)’을 부정 하면서 무아(anatman)’를 주장하였다.

 

이런 무아사상은 생멸법에 근거한다. 모든 현상이 고정된 실체가 없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고정된 자아나 변치 않는 영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이웃 블로거 사띠현정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법은 디지털처럼 생멸할 따름인데 대체 어디에 '영겁불여' ''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모든 현상을 마치 디지털 논리와 같은 생멸로 보면, 내것이니 네것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이 세상은 한바탕 꿈이라는 것은 아날로그적 발상이다.

 

변치 않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가정하에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 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범아일여와 같은 합일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처럼 0 1, 있음과 없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하나의 점의 연속일 것이다.

 

각 점은 전의 점과 같지 않고, 단지 조건지워져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것이다. 졸리지도 않는 잘 수 없다면 거기에 이미 고정된 자아는 없다. 따라서 잘 만한 조건이 성숙 되었기 때문에 자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

 

현대는 디지털시대이다. 0 1의 이진법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기술은 우리생활에매우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컴퓨터, 휴대폰을 비롯하여 각종 기기가 디지털로 작동하고, 인터넷 또한 디지털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단 하루도 디지털기기가 없으면 생활을 할 수 없다. 사람들 또한 이제 디지털 기기에 무척 익숙하다.

 

그런데 그런 디지털 기술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생멸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어남은 1이고, 사라짐은 0라는 2진의 원리는 이미 2500년 부처님이 발견한 생멸법과 개념이 같다.

 

부처님은 이 생멸법으로 제현상을 파악하여 아트만을 부정함으로서 무아를 주장하여 고통의 문제를 해결 해 주었다. 그리고 불사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렇다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는 불교라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아날로그 방식의 불교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아날로그 방식은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이 세상은 한 바탕 꿈과 같은 것이라는  범아일여사상과 같은 논리와 같다. 반면에 제 현상을 생멸로 보고 조건 지워져 상속 하는 흐름으로 보는 연기법은 현대의 디지털시대와 디지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 가장 잘 어울린다.

 

한국불교가 근대에 나라가 망한 후에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극복의 대상의 이미지로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한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오래되고 낡고 고리타분하여 전근대적 이미지와 아날로그적 냄새를 풍긴다면 오늘날과 같은 젊은 세대들이 여존히 극복의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디지털세대들에 어필하려면 디지털 마인드로 접근 하여야 한다. 바로 그런 불교가 초기불교라 본다. 초기불교의 모든 면을 뜯어 보면 철저하게 디지털마인드이다. 그 대표적 이미지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법이라는 것이다. 

 

 

 

 

201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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