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돌에 새긴 인간의 정념, 금강경의 무주상보시공덕의 가르침이 무색한 현장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22. 10:42

 

돌에 새긴 인간의 정념(情捻), 금강경의 무주상보시공덕의 가르침이 무색한 현장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렇게 이름 석자를 남기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현장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천년 만년 자신이 살다가 간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자연의 훼손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데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책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도 시간이 지나면 무사하지 못하다. 온도와 습도등의 영향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자료가 100년 이내로 소실된다. 또 도난이나 화재등에 취약하여 영원히 보존할 수 없다. 한편 CD등과 같은 저장매체를 사용해 보지만 이 또한 수백년이다. 더구나 이를 볼 수 있는 기계장치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도 전기가 들어 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고, 실수로 조작을 잘 못 하면 한 순간에 날라 가게 되어 있다.

 

가장 훌륭한 저장매체는

 

이처럼 종이를 비롯한 각종저장 방법은 그 한계가 있어서 기록물을 영원히 보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수천년간 저장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가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라고 보는 점토판이나 석판같은 것이다. 현대문명시대에 아이러니컬 하게도 반 영구적으로 보전 할 수 있는 방법이 돌에 글을 새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그 돌이 풍화에 따라 문드러져 사라지지 않는 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훌륭한 저장매체는 바로 점토판이나 석판, 바위등과 같이 썩지도 않고 전기도 필요 없는 원시적인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원시적인 저장매체 때문에 지나간 역사를 알 수 있었고, 누가 살다가 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르의 점토판

인류가 발견한 반영구적인 가장 훌륭한 저장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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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함무라비 법전이 점토판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누가 그 때 당시의 사회와 정치제도, 그리고 함무라비라는 왕에 대하여 알 수 있었을까. 또 전륜성왕이라 불리우는 아소까 대왕이 인도전역에 석주를 남기지 않았다면 아소까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 수 있었을까.

 

이처럼 인류는 자신의 업적을 돌에 새기려 노력 하였고, 또한 이름을 남기고자 하였다. 이런 현상을 요즘에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덤에 돌비석을 세운다든가 기념물에 이름석자를 남기는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

 

돌에 이름을 새겨 한 존재가 살다가 간 흔적을 남기려 하는 것은 본능처럼 느껴진다. 그 사람이 삶의 과정에서 수 많은 행위로 인하여 영원히 기억할 만한 가치 있는 업적을 쌓은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석자만 남겼을 때 과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 선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그런 모습을 사찰에서 볼 수 있다.

 

사찰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중의 하나는 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공덕비를 볼 수 있다. 절에 보시를 하여 불사가 완성 되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덕비를 세워 주는데, 자신의 생년과 이름 석자를 새겨 넣는다.

 

보시를 많이 한 대 공덕주의 이름은 손바닥만큼 큼지막하게 새겨 넣고, 그렇지 않은 경우 조그마하게 새겨 넣어 영원히 보존 되도록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옛날에도 불사를 많이 했을 것이다. 수백년전에 지은 국보급 대웅전의 뒷 편에 공덕주들의 명단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명단이 보일락 말락한 것이었다. 목판에 써진 명단을 보면 가까이 가야 볼 수 있는 매우 작은 글씨이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글씨를 새겨도 한 쪽 구석에 보일락 말락하게 넣었다.

 

 

 

 청룡사 대웅전의 시주자 명단

대웅전 뒷편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다.

안성 청룡사 대웅전은 17세기 이전에 건립된 보물824호이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절의 바깥이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공덕비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절의 가장 자리가 좋은 곳에 공덕비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불사 공덕비

시주한 이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종도 마찬가지이다. 국보급 동종을 보면 좀처럼 시주자의 이름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진 동종을 보면 불사를 한 시주자의 명단이 빼곡히 양각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원사 동종

신라 성덕왕24(725)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으로 국보 36호이다.

종의 그 어디에도 시주자 명단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 만들어진 동종

시주자 명단이 빼곡하고, 시주자에 따라 글자 크기도 다르다.

 

 

 

자연을 훼손하면서 까지

 

신심있는 재가신자를 지칭하는 청신사와 청신녀의 공덕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예 바위에 새겨 자연의 일부가 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어디서나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천연의 바위에 시주자의 이름을 새기는 현상은 자연파괴의 행위일 뿐만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바위에 새겨진 사람은 커다란 선업의 공덕을 지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국립공원의 암반에 조성하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불자들이 불사를 하여 여법한 가람을 만들고 후대에 남겨 주어 블교가 번창하게 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에 틀림없다. 그런 과정에서 시주자의 이름을 남겨 놓음으로서 자신의 공덕을 만천하에 알리려 하는데, 너무 지나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대부분 커다란 공덕비를 만든다든가, 이 것도 안심이 되지 않으면 커다란 바위에 이름을 새겨 넣어 천년 만년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과 같은 네가지의 상을 버리라고 말하고, 또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에 대하여 여러차례 강조 하였건만 시주자들은 기여코 자신의 이름석자를 남기고자 한다.

 

돌에 새겨진 인간의 정념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이 방법은 그 사찰이 없어지지 않는 한 유효 하고, 더구나 오가는 모든 사람이 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새겨 놓았다. 아마도 이 방법이 자신의 생년과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것이다.

 

강남에 있는 전통사찰로서 세칭 부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절이다. 그 절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중에 하나가 전각을 지탱하고 있는 석주에 시주자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이다. 누구든지 오가면서 시주자의 이름을 한 번씩 보지 않을 수 없게끔 빼도 박도 못하게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이 전각을 짓기 위하여 거액을 시주한 이의 공덕을 찬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만일 오가면서 이 시주자의 이름을 보는 것이 거슬린다면 전각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전각이 없어지지 않는 한 누구든지 볼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을 보면 금강경의 가르침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주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강남의 중심지에 있는 전통사찰에서 볼 수 있다.

 

 

 

 

 

시주자 송덕

시주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석주에 가족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사찰순례를 다니다 보면 사찰의 후미진 곳이나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은 곳에 부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이끼끼고 오래 된 부도는 어떤 기록물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있는 절과 인연이 있었던 수행자의 흔적이라고 밖에 추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진 부도를 보면 그 크기도 클 뿐만아니라 누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도 시주자의 이름을 기여코 남기려는 현상과 같이 일반화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름없는 부도탑

옛날의 부도탑에는 대부분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

 

 

 

 

현대의 부도탑

공덕비와 함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돌에 새겨진 인간의 정념(情捻)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 좀 더 오래 살아서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주기를 바란다. 학문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이 사회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동시대의 존경하는 분이 죽었을 때 모두 아쉬워 한다. 그래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어록을 발간하곤 한다. 이처럼 후대에 귀감이 될만한 사람들은 구전으로 또는 기록물을 통하여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단지 시주를 많이 하였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지나친 아상(我相)에 사로 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절에 가면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일종의 폭력적 행위와 같다. 보기 싫은데 억지로 보게 만든다면 불선심만 조장하여 불선업을 짓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시주자 이름이 보기 싫어서라도 그 절에 다니지 않을지 모른다.

 

거액을 시주를 하여 여법한 가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커다란 선업의 공덕을 짓는 행위이다. 그러나 후대에 눈쌀을 찌뿌릴 정도로 세세생생 영원토록 기억해 달라고 강변하듯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는 행위는 거꾸로 불선업을 유발하기 때문에 불선업을 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4상을 버리고, 무주상보시의 공덕에 대하여 제대로 교육을 하고, 또한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돌이나 동종에 새기는 인간의 정념(情捻)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201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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