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는 소통에 실패하였다, 3등 종교로 전락위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21. 12:04

 

한국불교는 소통에 실패하였다, 3등 종교로 전락위기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교구는 총 26개이다. 26개 중에 군종교구와 유명무실한 20교구(선암사)를 빼면 실질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교구본사는 24곳이다. 24곳의 교구본사 중에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산다는 서울과 수도권의 교구 본사는 직할교구(조계사)2교구(용주사) 25교구(봉선사) 이렇게 세곳 뿐이다.

 

종단과 스님들의 중대한 직무유기

 

조계종의 교구본사는 대부분 산중에 있다. 서울과 경기도를 보면 서울의 조계사가 도심에 있고, 용주사는 예전에 산중에 있었지만 주변이 도시화가 진척 되어 도시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봉선사의 경우 여전히 산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체인구 4,700(2005년 통계청) 중 서울과 인천, 경기도에 몰려 사는 인구는 2,260만명이다. 이는 전체인구 대비 48%에 해당된다. 그런데 교구본사는 24개중 고작 3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것도 조계사를 제외 하면 예전 부터 있어 왔던 장소인 산중에 있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대의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려사는 서울과 경기도는 종교의 황금시장과 같다. 그런데 그런 곳은 제쳐 두고 옛날부터 해 왔던 방식대로 대부분의 교구본사가 산중에 있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종단과 스님들의 중대한 직무유기라 볼 수 있다. 다음의 막대그래프를 보면 왜 직무유기 하는 것인지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2009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현황

 

 

  

막대그래프를 보면 서울과 경기도의 종교인구가 개신교의 경우 각각 200만명이 넘는다. 반면에 타 시도의 경우 50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역시 서울과 경기에 각각 130만명대이고 나머지 지역은 20-30만명대로 지극히 미미하다. 불교의 경우 서울과 경기가 각각 160-170만대로서 부산(137), 경남(122), 경북(87), 대구(82)으로 비교적 고른 분포이지만 나머지 시도는 20-30만명대로서 미미하다.

 

참담한 결과를 보면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울과 인천, 경기에서 불교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그 비율은 얼마나 될까. 표를 만들어 보았다.

 

 

서울, 인천, 경기의 종단별 인구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인구

서울

1,642,667(16.8%)

2,222,831(22.7%)

1,382,264(14.1%)

9,762,546

인천

348,361(13.8%)

563,433(22.3%)

345,843(13.7%)

2,517,680

경기

1,741,401(16.8%)

2,260,594(21.8%)

1,286,104(12.4%)

10,341,006

출처; 2009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현황

 

 

 

우리나라의 절반이 몰려 산다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불교는 1등이 아니다. 1등은 개신교로서 그 차이가 5%로 많이 벌어져 있다. 1위를 내준 불교는 천주교와 교세가 비슷하다. 서울과 경기에 특별한 대책없이 방치 한다면 3위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우려스러운 것은 서로 같은 계통의 형제종교인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여 비교해 보면 더욱 더 참담하다. 이를 다시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서울, 인천, 경기의 불교대 개신교+천주교인구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인구

서울

1,642,667(16.8%)

3,605,095(36.8%)

9,762,546

인천

348,361(13.8%)

909,276(36%)

2,517,680

경기

1,741,401(16.8%)

3,546,698(34.2%)

10,341,006

출처; 2009 문화관광부 한국의 종교현황

 

 

 

믿기지 않은 통계처럼 보이나 실제로 서울과 경기에서 개신교+천주교가 불교보다 두 배이상 많고, 인천은 3배에 육박한다. 이런 현상은 주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신교 아니면 천주교인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도시의 밤하늘은 온통 십자가 천지인 것이 증명한다.

 

시대와 불통한 결과

 

서울과 인천 경기에서 불교는 개신교보다 한참 뒤쳐져 있고, 천주교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금년은 5년에 한 번 있는 인구조사를 하는 해인데, 천주교의 성장세를 보면 인천과 서울의 경우 천주교에 밀려 3위로 밀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 70년대만 해도 불교가 1위를 고수하였는데, 그 것도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숫자 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이제 전국적으로 11%정도 뒤지게 되었다. 특히 급성장한 천주교에도 밀려 3등종교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 요인인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라나라 불교종단과 스님들이 시대와 불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어 가는 데 우리나라 불교종단과 스님들은 이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구본사제도이다.

 

교구본사제도는 일제시대 정해진 사찰령에 근거 한다. 그 때 당시 대부분 농촌에 살았으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도시에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아닌 전통을 고수 한 결과 이제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서울과 수도권에 3개의 교구본사만 있을 뿐이고, 21개의 교구본사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데 그 것도 산중에 가야 볼 수 있다.

 

이렇게 산중에서만 살고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도시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이 시대와 소통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한국불교는 어쩌면 소통을 거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증거로서 서당식 강원교육을 들 수 있다.

 

한국불교는 소통에 실패하였다

 

아직도 산중의 강원에서는 한문경전위주의 강의가 진행 되고 있다. 강사스님의 설명이 없다면 단 한 줄도 진도가 나갈 수 없는 한문경전은 매우 어려운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글의 뜻은 고사하고 어려운 한자부터 익혀야 하고, 마치 암호해독문 같은 문장을 강주스님의 지도 없이 해석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시대와 담을 쌓고 지내온 결과 사회 전분야에서 소통에 실패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불교가 여러 면에서 한글화에 실패했다는 말은 이 시대의 언어로 국민들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는 말이다. 아니 국민들과의 소통에만 실패한 게 아니라 더 뼈아픈 것은 신도들과의 소통에도 실패하고 스님들끼리의 소통에도 실패해버렸다는 것이다. 국민들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신도들과의 소통과 스님들끼리의 소통에 조차 실패한 불교가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불교의 한글화는 한국불교가 반드시 해결해야할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광 연구; 그의 삶, 구도와 보살행,  http://club.paran.com/club/home.do?clubid=bud-bbsView.do?menuno=1150-clubno=28-bbs_no=0Yjvs)

 

 

각묵스님은 한국불교를 한마디로 실패하였다고 단정 짓고 있다. 한국불교가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재가불자들과의 소통에도 실패하고, 심지어 스님들끼리의 소통에도 실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를 한문경전의 고수로 인한 한글화 실패로 보는 것이다.

 

불교가 왜 인기가 없을까

 

이렇게 소통에 실패하고 시대와 붙통하다 보니 점점 고립되고, 이제 서울과 수도권에서 3등종교로 밀려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되었다.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과 경기도와 같이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살고 더구나 중산층이상 오피니언 리더들이 몰려사는 곳에 왜 불교가 인기가 없을까.

 

그 첫째 이유는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에 절이 없는 것이다. 교회와 성당은 넘쳐나 그들끼리 주민을 위하여 봉사하며 경쟁을 하는데, 사람사는 곳에 절이 없으니 봉사는 커녕 적을 둘만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은 불교가 시대와 불통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고, 종단과 스님들의 중대한 직무유기라 볼 수 있다.

 

둘째 이유는 불교가 아직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전근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100여넌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시점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더구나 나라가 망한후에 유교와 같은 전통문화 뿐만 아니라 불교 역시 계승의 대상이라기 보다 극복의 대상으로서 더욱 더 굳혀지게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인삭은 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 결과 사람이 모여 사는 곳, 특히 중산층이상의 의사결정권자나 오피니언 리더들이 외면함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에서 3등 종교로 전락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로 보여 진다.

 

이런 절밗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종단과 스님들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구태의연한 기복이나 방편불교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논리와 유사한 초기불교

 

지금은 디지털시대이다. 90년대 부터 서서히 디지털화가 진행 되어 이제는 사회전분야로 확산되었다. 컴퓨터, 휴대폰, 인터넷 등 우리 주변 곳곳은 이미 단 하루도 이런 기기가 없으면 생활자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는 이렇게 급속하게 변하고 있건만 한국불교는 산중에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나올 줄 모른다. 농촌중심사회에서 형성된 제도를 도시중심사회, 그 것도 고도정보화 사회에서 유지 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와 소통하고 있지 않음을 넘어 불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와 불통하고, 국민과 불통하고, 신도와 불통하고, 심지어 스님들끼리 불통하고 있는 시점에 마침 초기불교가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그 시점을 일반적으로 1988년으로 본다.

 

초기불교가 도입된지 이제 20년이 지났지만 그 성과는 놀라웁다. 그런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산업구조가 바뀐시점에 도입된 초기불교는 놀라웁게도 디지털마인드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시대와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 줄지 모른다.

 

시대와 국민과 소통을 거부 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아날로그방식이라면, 인터넷등을 통하여 시대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 초기불교는 디지털방식이다. 실제로 교리 자체가 디지털방식과 유사하다. 모든 현상을 일어나고 사라짐이라는 생멸현상으로 보는 초기불교는 01있다없다라는 이진법으로 구성된 디지털논리와 개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희망은 초기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가 전근대적인 방식으로서, 아직까지 극복의 대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면 그 대안은 초기불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대기론본처 후처론

 

한국불교의 특징이 기복과 방편이라 한다. 기독교 따라하기와 같은 기복성 기도와 죽은자를 위한 천도재와 같은 방편으로 일관하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종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한국불교 포대기론을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애를 업은 포대기 안에 애는 안 보이고 포대기만 있더라는 말이다.

 

또 어떤 이는 초기불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본처 후처론을 이야기 한다. 조강지처가 있는 남자가 로맨스를 하여 예쁜 후처를 데려 왔는데, 전처 보다 못한 경우를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전처가 후처 보다 여러면에서 못해야 그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는데. 전처가 후처보다 인품과 덕성등 모든면에서 뛰어나다면 후처가 전처 자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전처는 초기불교를 말하고, 후처는 초기불교에서 갈라져 나간 불교를 말한다.

 

초기불교가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무엇 보다 한글경전인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이는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또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누구나 수행처에 가면 쉽게 수행을 할 수 있는 환경 또한 시대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여 이미지를 개선한다면  불교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계승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포대기만 남아 있는 한국불교에서 초기불교라는 애를 데려 왔으니 이제 잘 키우는 일만 남았다. 그 애가 커서 성년이 되었을 때 한국불교는 다시 한번 중흥하게 되지 않을까.

 

 

 

201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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