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육바라밀의 보시(布施)와 팔정도의 정견(正見), 첫번째 실천항목이 된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30. 14:38

 

 

 

육바라밀의 보시(布施)와 팔정도의 정견(正見), 첫번째 실천항목이 된 이유

 

 

 

 

 

 

우리나라에 초기불교가 1990년대 이후 도입된 이래 아직도 소승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방송에서는 물론 인터넷 댓글에서도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는 소승이라는 말을 사용 하는 것은 이제 대단히 무례한 언동으로 간주 된다.

 

대승은 수승한 것이고, 소승은 저열한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시작 되었을까. 이웃불로그인 후박나무님의 글 (http://blog.daum.net/whoami555/12176291)에 따르면 6세기에 천태대사(538-597)의 소위 교상판석에 근거 한다고 한다. 교상판석이란 무엇일까.

 

뒤죽 박죽 전래되어

 

오늘 날 불교는 크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로 나뉘어 진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오랫동안 동아시아에 전해진 불교를 대승불교라 불렀고,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 불렀다. 그런데 그렇게 부른 이유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되기 시작 한 것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무렵이다. 이후 4세기에 한국에 전해 졌고, 5세기에 일본에 전파 되었다. 6세기가 되면 인도에서 발생한 제반 사상의 거의 모든 불교가 전래 되었는데, 문제는 뒤죽 박죽으로 전래 된 것이다. , 초기 불교 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 까지 거의 동시에 전달 되다 보니 그런 현상이 발생 된 것이다.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 부처님이 전법을 시작한 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된 불교가 초기불교à아비담마교학à중관à유식à대승불교(여래장)와 같은 순으로 전개 되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졌지만, 이들 불교가 거의 동시에 중국에 전래 되다 보니 큰 혼란이 일어나고 뒤죽 박죽된 것처럼 보인 것이다.

 

6세기에 이르면 초기불교에서 부터 대승불교까지 거의 다 소개 될 즈음에 뒤죽 박죽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놓은 방법이 천태지의 스님의 교상판석이다.

 

교상판석과 학교의 비유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경전을 해석하였다.

 

 

 

천태대사의 교상판석

경 전

설한기간

설 명

화엄경

21(華嚴時)

천상에서 설한 화엄경을 인간세상에서 설해도 알아듣지 못함

아함경

12(阿含時)

낮은 수준의 아함경을 설해서 사람들의 수준을 높이는 작업

방등부 경전

8(方等時)

수준이 높아지자 다음으로 능가경, 무량수경 등을 설함

반야부 경전

22(般若時)

공사상을 이해 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장 오래 설함

법화경

8(法華涅槃時)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을 일승으로 들어오게 설함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에 따르면 부처님이 처음 깨달은 후에 천상에서 설하던 화엄경을 21일 동안 설하였으나 도무지 알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초부터 닦고 더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함경을 설하였다고 한다.그 기간을 부처님의 설법기간 45년 중에 12년으로 보고 있다.

 

지명스님은 자신의 저서에서 교상판석에 따른 비유를 학교로 들었는데, 아함경을초등학교수준으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기초를 닦은 후에 12년간 방등부 경전을 설하였는데, 이를 중학교수준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가장 이해 하기 어렵다는 공()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22년동안이라는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설한 반야부 경전을 ‘고등학교에 비유 하였다.

 

마지막으로 8년간 설한 3승방편 1불승 진실의 법화경과 열반경을대학교에 비유하였고, 가장 수승한 경전으로 화엄경을 들었는데, 이를 대학원에 비유하였다.

 

대승과 소승

 

과연 이런 비유가 근거 있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천태대사가 세운 교상판석이 이후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경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정당한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종파불교의 발달과 함께 각 종파의 소의경전이 갖는 우월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 졌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화엄경을 최고의 교학으로 보는 것도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상판석의 영향으로 대승불교권에서 대승불교는 수준이 높은 수승한가르침이고, 소승불교는 저열한가르침이라고 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소승불교는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가르침이고,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적가르침이라 견해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글로벌화된 이 시점에 그런 주장은 아무 근거 없는 것임이 밝혀 졌다. 오히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폄하하고 왜곡하고 부정한 것으로 간주 되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권 사람들은 여전히 소승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소승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테라와다불교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용어가 초기불교로 굳혀져 가고 있다. 따라서 소승불교라는 말 대신 초기불교또는 테라와다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

 

서로 다른 불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여러모로 서로 다른 불교이다. 그 가장 큰 차이를 경전에서 볼 수 있다.

 

초기불교경전을 빠알리삼장(Pali Tipitaka)’이라 한다. 부처님이 직접 설한 말씀과 이를 체계화한 논서와 율장을 포함하여 빠알리 삼장이라 하는데, 인도에서 3차례의 결집후 테라와다가 공인되면서 완성 되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고 독자적인 경전을 만들어 결집하기 시작 하였다. 대승논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펴낸 대승경전은 부처님 사후 600년이 지난 시점부터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씌어진 경전들이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대승경전 중에 소승을 비방하는 내용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독자적인 경전을 만들어 내고 이를 실천할 수행법 또한 새롭게 정립 하였는데 그 것이 육바라밀수행이다.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 않던 팔정도 수행이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경전을 새롭게 만들어 내듯이 수행방법 또한 새롭게 정립한 것이 육바라밀인 것이다. 그렇다면 6바라밀과 8정도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니면 같은 것일까.

 

이성적 불교

 

팔정도나 육바라밀이 계정혜 삼학을 모두 포함 하고 있다는 것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어서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금방 드러난다. 바로 가장 먼저 강조하는 사항이 다르다는 것이다.

 

팔정도에서 가장 먼저 강조 하는 사항은 정견(正見)’이다. 반면에 육바라밀에서는  보시(布施)바라밀을 가장 먼저 강조 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팔정도에서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사성제와 관련이 있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위없는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이루신 후에 발견한 성스런진리이다. 그래서 성스럽다라는 뜻의 아리야(Ariya)’라는 말를 반드시 붙여서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짜따리 아리야삿짜니(cattāri ariyasaccāni)라 한다. 마찬가지로 팔정도 역시 그냥 팔정도가 아니라 성스런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빠일리어로 ‘아리요 앗땅기꼬 막고(Ariyo aṭṭhagiko maggo)’라 하고, 영어로는 ‘Noble Eightfold Path’ 라 하는데 모두  성스런 팔정도라는 의미이다. 이런 팔정도를 한자어로 표현 하면 팔지성도(八支聖道)’ 또는 팔상성도(八相聖道)’가 된다. 이처럼 성스럽고’ ‘고귀하고’ ‘거룩한팔정도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 초전법륜경에 잘 표현 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래가 발견하여 깨달은 중도가 어떻게 여래에게 법안을 갖게 했고, 평화로운 적정을 가져오는 지식을 얻게 했고, 위없는 지혜를 증득하여 깨달음과 닙바나(열반)를 성취케 하였는가? 그것은 참으로 바른 성스러운 여덟가지도(八正聖道)로서, 이름하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정신집중(正定)이니라.

(초전법륜경)

 

 

팔정도는 사성제에 있어서 도성제에 해당 되고, 또한 팔정도는 중도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한 성스러운 팔정도가 포함 되어 있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텅 빈것 같고 불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수행을 하여 도를 이루고 과의 열매를 맺게 하는 팔정도의 첫번째 강조사항은 정견이다. 이것은 팔정도를 계정혜 삼학으로 나눌 때 지혜에 해당 되는 것으로서 사상제를 이해하는 예비적인 지혜의 단계와 위빠사나 통찰지로서의 완성된 지혜의 단계, 이렇게 두가지 단계의 지혜를 내포 하고 있다.

 

정견은 세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으로서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중요한 가르침으로 간주 되고 있다. 이처럼 팔정도에서 정견을 가장 강조 하는 이유를 들어 초기불교를 이성적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감성적 불교

 

부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팔정도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별도의 수행방법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것이 육바라밀이다. 육바라밀 역시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팔정도에서 지혜로 상징되는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과 비교하여 보시바라밀이 가장 먼저 나온다.

 

왜 보시를 가장 먼저 강조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 하고 있다.

 

 

붓다는 성도 후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들에게 첫 설법을 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나서 다시 바라나시에 사는 청년 야사를 교화 합니다. 그리고 야사를 찾기 위해 붓다를 찾아온 야사의 부모를 교화하기 위해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4성제와 8정도를 직접 설하지 않습니다. 8정도를 설하기 전에 예비 법문으로 다음과 같은 시계천(dānakatha sīlakatha saggakatha)의 가르침을 먼저 설합니다.

(8정도와 6바라밀의 차이, http://blog.daum.net/whoami555/12176291)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막바로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지 않고, 그 대신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보시와 지계에 대하여 설한 다는 것이다. 다음은 마하왁가에 있는 내용이다.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나라에 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애욕에는 위험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고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있습니다. 세존은 장자가 법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고 법을 이해할 수 있으며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한 삶을 따르고자 한다는 것을 아시고 드디어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하시었다.

(mahavagga.17)

 

 

부처님이 무상정득각을 얻고 난후에 옛날 동료 이었던 다섯명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자신의 깨달은 바를 설하였 때 이해하였다. 바로 그것이 사성제와 팔정도이다.그런데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깨달은 바를 설명하려 하자니 알아 듣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법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사의 역류도(逆流道)’인데 탐진치에 찌들려 사는 중생이 이해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에게 한 설법이 바로 시계생천(生天)’설법이다. 시계생천이란 보시를 열심히 하고 계를 준수하는 생활을 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요즘말로 하면 봉사하는 삶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성제와 팔정도의 예비법문으로 보시와 지계의 중요성을 강조 한 후에 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서 고집멸도의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바로 이 보시와 지계가 육바라밀에서 제일 처음과 두번째 나오는 보시바라밀과 지계바라밀이다. 이처럼 법을 몰라도누구나 실천하기 쉬운 것이 육바라밀에서 보시와 지계바라밀이다. 그러나 법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았던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 없다. 열반과 해탈의 길로 가려면 성스런 사성제와 팔정도의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승불교를 감성적 불교라 부른다.

 

법의 불교와 신앙의 불교

 

초기불교의 팔정도와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불교라 볼 수 있다. 왜 다른 불교일까. 그 것은 종착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출발지가 다르므로 그 종착지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종착지는 열반을 추구하여 윤회를 끝내느냐 아니면 보살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성불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 깨달은 바를 실천하여 부처님이 몸소 보여 주었던 그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있어서 안내자로서 부처님과 가르침이 있는데 이는 철저하게 (. 담마)’을 기초로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법의 불교라고 한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바라밀의 실천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 달리 법을 모르는 자 위주의 불교를 강조 하다 보니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만들어 진 것이 육바라밀수행이다. 이렇게 법을 몰라도 열심히 보시하고 지계하여 수 많은 겁동안 남을 위하여 이타행을 실천하며 보살행을 하면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필경에는 성불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강조 되는 것이 이타행의 보살사상인데 이 보살행의 가장 첫번째 실천 덕목이 보시바라밀의 실천인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법보다 바라밀행을 강조하고 또한 필경에 부처가 되리라는 믿음을 강조 하기 때문에 대승불교를 신앙의 종교로 본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구 분

초기불교

대승불교(여래장)

경전

빠알리삼장

별도의 대승경전

수행방법

팔정도

육바라밀

첫번째 강조사항

정견

보시바라밀

대상

법을 아는 출재가자

법을 몰라도 되는 일반인

궁극적 목표

수행을 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

보살행을 실천, 일체중생을 제도

기간

이 생에서 가능

한량없는 세월이 걸림

성격

이성의 불교

감성의 불교

자력과 타력

자력적

타력적

형 태

법의 불교

신앙의 불교

 

 

 

이처럼 출발점 부터 다르니 종착지 역시 다름을 알 수 있다.

 

한국적 특수상황에서

 

법의 불교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경집을 결집하여 대승보살사상을 만들어낸 대승불교는 후기에 이르러 감성을 더욱 더 발전 시키게 된다. 그래서 거의 신()과도 같은 부처님과 보살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고, 한 때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지만 힌두교와 거의 구별이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났을 때 어떤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유일신종교와 공존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도 인도에서의 후기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격화된 타방부처님과 전지전능한 제보살의 권능, 그리고 천도재와 같은 기복과 방편 그리고 타력적 요소로 일관 하는 듯한 기도는 전형적인 신앙의 불교인데, 이는 유일신교의 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일신교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 되었듯이 그런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시점에서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나오는 것이다.

 

 

 

201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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