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귀신은 있다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 귀신

담마다사 이병욱 2010. 8. 27. 12:13

 

귀신은 있다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 귀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데

 

언젠가 bbs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 진행자인 정목스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청취자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귀신이야기를 하였는데, 귀신이 있다없다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귀신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귀신이 있는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귀신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같다. 과연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아상가 교수의 사성제강의를 듣다 보면 사람들이 품는 의문 중의 하나가 “아라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재생하는가? 그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대답하였다고 한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

와 같은 말은 모두 적용되지 않는다.

 

 

위의 네가지 경우가 모두 적용 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을 오온의 무더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온의 상호작용 외에 고정된 자아나 변치 않는 영혼, 아트만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 하시고, 인간을 단지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본 것이다. 이 말을 귀신은 있다귀신은 없다라는 논쟁에 그대로 적용 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동서양의 귀신은 왜 다를까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귀신이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은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귀신이 나라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한국귀신의 경우 하얀소복에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거나, 검은 도포에 갓을 쓴 저승사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에 서양귀신은 숲속의 요정과도 같은 모습이다. 왜 나라마다 귀신이 서로 다른 것일까. BBS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묘원법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의 귀신과 동양의 귀신이 서로 다른 것은 과거의 정보기억때문이라 한다.

 

어렸적을 부터 동화책을 읽었거나 TV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 그대로 형상화 된 것이 지역마다 나라마다 귀신의 모습이 다른 이유이다. 만일 진짜 귀신이 있다면 서로 다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허상을 한 번 보고 두 번 보게 되면 그만 사실인 것으로 확신을 갖는다. 무속인이 산신령등을 몸주로 삼고 있는 것도 자신이 만든 형상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게 정신적으로 심약하거나 허약한 체질로 인한 병적 증상이 있을 때 오는 착란이나 착시현상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귀신이나 악마는 우리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삼매에 빠지다 보면

 

우리 인간은 오온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이중 정신적 영역이 수상행식이다. 여기에서 상()의 역할이 기억이나 인식, 표상작용을 한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어떤 표상이 떠오르는데, 이는 실재 하는 것이 있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다. 동화책속의 귀신이나 TV나 영화속의 저승사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상은 삼매의 상태에서도 나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매에 빠지다 보면 환상에 빠질 수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알아차림이 약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다가 집중이 깊어져서 삼매상태가 되면 고요함이 커지는데, 이때 알아차림도 커져야 수행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데, 삼매만 깊어지고 알아차림이 약해지면 균형을 잃게 된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알아차림을 받쳐 주는 노력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매만 커진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약해지면 상상력이 작용한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마음에 투사되어 실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오온중에 상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헛것을 보고도 사실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든가 예수를 보았다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각자 종교의 교리나 경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투사 되어 나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로 부터 말도 듣게 되고 대화도 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이 자신과 하는 대화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알아차림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결과라 볼 수 있다.

 

아귀와 귀신

 

설령 귀신이 있다고 한다면 아귀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것도 틀별한 아귀에 한해서 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31천으로 나누어 진다. 욕계, 색계, 무색계를 통틀어 31개의 세계가 있는데, 이중 아귀만이 자신의 세계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숲이나 산, , 계곡, 무덤등 더러운 장소에 산다고 한다.

 

그런 아귀도 5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그 중 배고품에 시달리는 아귀가 있다. 이런 아귀를 예로 부터 중국에서 귀신이라 불렀다. 그래서 배고픈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이 아귀가 유일하게 인간과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31개의 세계중에 한 곳에 태어 나게 되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태어나게 되어 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한 번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죽음과 태어남 역시 한 순간에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전의 마음이 다음 마음으로 과보가 상속 되어 흘러 가는데, 새로운 세계에 태어 난다는 것은 전생의 마지막 마음이 낸 과보의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죽은 자가 49일 동안 중유로 머물며 태어날 곳이 결정될 때까지 대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내 주고, 49일 지나도 갈곳이 결정되지 않아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하여 천도재를 지내 주거나, 이미 갈 곳이 결정되어 간 자들을 위하여 또 재를 지내 주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공덕을 배풀어 주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없다. 다만 죽자 마자 새로 태어난 자들 중에 아귀만이 교감의 대상으로 본다.

 

공덕의 실현가능성은

 

다른 31개의 세계에 있는 중생과는 파장이 맞지 않지만 유일하게 아귀만이 교감이 가능한데, 그 것도 5종류의 아귀 중에 배고픈 아귀에 한해서이다. 이런 배고픈 아귀에게 제사를 하는 이유는 죽은 조상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주어 선행공덕을 배푸는 경우는 인간과 파장이 통하는 배고픈 아귀 뿐이다. 그런데 배고픈 아귀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현생에서 원한을 품었다면 아무런 교감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아귀의 몸을 받은 자가 선업을 만든자에게  불편한 마음이 없을 때 받아 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공덕을 짓는 것도 선택권은 인간이 아닌 아귀에게 있는 것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조상중에 아귀로 태어난 조상과 교감이 가능한데, 그 것도 5종류의 아귀 중에 배고픈 아귀 한 종류에 해당되고, 그 것도 그 아귀가 공양을 받으려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3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제사의 공덕이 있는데, 이것은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현상이 나타났을 때

 

귀신과 악마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이런 논쟁은 답이 없는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하는 말이 모두 적용 되지 않고 쓸모 없는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때 자신의 몸으로 돌아 오는 것이 중요하다.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재빠르게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몸의 호흡이나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대상에 빠지게 되면 그 대상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20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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