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집을 짓는 자여! 부처님의 오도송 빠알리어 챈팅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한 것이 오도송(悟道頌)이다. 주로 선사들이 오도송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경허선사의 오도송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경허선사는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을 하던 중 ‘소가 콧구멍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고 한다. 그래서 오도송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듣고
돈각삼천시아가(旽覺三天示我家) 비로소 삼천대천 세계가 내집임을 깨달았네
유월연암하산로(有月淵岩山下路) 유월 연암산 아래길에서
야인무사태펑가(野人無事太平歌) 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노라
이처럼 어떤 기연에 의하여 돈오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부처님 당시에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해탈한 아라한이 있었다고 한다. 마치 무르 익은 감이 건드리면 “톡” 떨어 자듯이 수행자들의 깨달음 역시 하나의 계기가 되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오도송을 음악동영상으로
선사들이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을 남겼다면 부처님의 오도송은 없었을까.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는 ‘법구경’의 게송 중의 하나를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보고 있다.
법구경의 게송 153번과 154번을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보는 이유는 무명과 갈애를 타파 하여 더 이상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불사의 진리’를 발견한 것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님의 오도송을 음악동영상으로 만들었다.
음악은 스리랑카의 유명한 챈팅가인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Visarad Srima Ratnayaka)가 창송한 가려뽑은 법구경 46게송( 08-hymn-08.mp3, Forty-six Verses)이다. 그 중 153번과 154번의 게송을 발췌 하여 빠알리어 자막과 우리말 번역(거해 스님)을 넣어 만들었다.
“아, 집을 짓는 자여!” 부처님의 오도송 빠알리 챈팅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Visarad Srima Ratnayaka)
스리랑카의 챈팅가
법구경 153
Anekajātisaṃsāraṃ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ṃ anibbisaṃ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ṃ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ṃ 둑카- 자-띠 뿌납뿌낭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거해스님)
법구경 154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ṃ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taṃ visankhataṃ 가하꾸-땅 위상카땅
visankhāragataṃ cittaṃ 위산카라-가땅 찟땅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거해스님)
영어
153
Through many a birth in samsara have I wandered in vain,
seeking in the builder of this house (of life).
Repeated birth is indeed suffering!
154
O house-builder, you are seen!
You will not build this house again.
For your rafters are broken and your ridgepole shattered.
My mind has reached the Unconditioned;
I have attained the destruction of craving.
(Buddharakkhita)
한문
153
多生輪迴中,探尋造屋者(貪),
而未得見之,再生實是苦。
154
造屋者已見,不再造新屋(色身),
椽柱均斷折(煩惱),棟樑亦摧毀(無明),
我心證無為(涅槃),一切愛欲滅。(153,154兩偈合誦)
(法增比丘譯)
일어
153
なぜ生まれたのか?
答を探して
何度も輪廻を
繰り返したよ
苦しかったよ~♪
154
渇愛よ!
見破ったぞ
心は闇を開き
お前を滅ぼした
もう輪廻しないよ~♪
(Dhammapada 意訳, 西津紘一)
부처님의 오도송에 대한 해설
부처님의 오도송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서까래는 모든 ‘번뇌’와 ‘오염원’을 말하고, 대들보는 ‘무명’을 의미한다. 마치 대들보가 모든 서까래를 받치고 있듯이 무명이 모든 번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오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혜에 의하여 갈애라는 ‘집짓는 이’를 발견하고 서까래라는 모든 오염원을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무명이라는 대들보도 제거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형성작용이 멈추어서 ‘닙바나(Nibbana, 열반)’를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윤회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왜냐 하면 더 이상 ‘집’이라는 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갈애(tanha, 딴하)와 무지(avijja, 아윗자)가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다. 따라서 갈애와 무지가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를 위시한 모든 번뇌를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는 것이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인 ‘열반’을 설하셨고, 다한 경지를 실현 하는 방법(道)인 ‘팔정도’를 설하셨다.
아상가 교수의 강의에서
오도송에서 집짓는 이는 갈애를 말한다. 그런데 갈애가 일어 나는 원인은 ‘나(我)’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불교TV의 스리랑카의 ‘아상가 교수’의 강의를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을 때 보면 본대로 받아 들이고, 무언가를 들으면 들으면 들은 대로 받아 들이면 그만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드시 거기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 하고 ‘개념’적 해석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 일어 나는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갈애’ 때문이고, 그 갈애는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우리가 지혜를 통해 이를 꿰뚫어 볼 때 그 연기의 사이클은 그친다.
그 연기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 ‘나(我)’나 ‘나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즉, ‘나(我)’나 ‘나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서 욕망의 근원적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我)’나 ‘나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 볼 때 모든 것은 조작 된 것이고, 거기 없었던 것이 보인다. 그런데 ‘나(我)’나 ‘나 자신’과 같이 중요하게 생각 하는 것이 증발해 버린 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게 될 것이다.
나(我)를 기반으로 건설한 우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我)’나 ‘나 자신’을 기반으로 하여 ‘우주’를 건설한다. 그 우주에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 부모, 친척, 동료등 모든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자신이 건설한 우주는 깨달았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우주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의 태도도 달라진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우주를 건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즉각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 나는 이 집을 짓지 않겠다.
나는 집을 지은 건축가를 보았다.
다시는 이 집을 짓지 않겠다”
이 말은 우리가 나(我)를 중심으로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을 이해 하면 이 나(我)는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 나가 사라지면 나를 중심으로 하여 지은 우주도 사라진다.
이는 우리가 왜 이 중요한 단계로 갈 수 없는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천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건설해온 우주가 사라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단계가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이것이 윤회를 탈출 할 수 있는 궁극적 길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초월적 존재는 없다
누가 집을 짓는가?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다. 갈애에 예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것이 문제에 접근하는 연기적 방식인 것이다. 그 방식은 나와 이 우주를 포함한 전체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상관하여 일어남을 이해 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이해를 분명히 하면 이 과정에서 의존할 신이나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재가 관계적(의존적, 연기적)으로 일어난다면 우리를 도와 줄 초월적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2010-10-10-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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