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를 비판하면 안되나, 비판(批判)과 비방(誹謗)은 다른 것
특허를 쓸 때
특허를 출원 할 때 방법이 있다. 특허양식에 반드시 표기 하여야 할 사항이 있는데, 이전 기술과 비교 하여 어느 점이 개선 되었고, 또 무엇이 독창적인가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기술이나 제품 또는 시스템에 대한 단점이나 문제점을 반드시 명기 하여야 한다.
따라서 특허를 많이 써본 사람들은 이런 요령을 알아 금새 출원하는 것이다. 그 요령은 이전 것과 현재의 것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 차이가 크면 클 수록 특허로서 채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처럼 변경전과 변경후 식으로 불교를 비교 하고 비판 하여 한국불교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 주류종교는
우리나라는 종교적으로 어느 국가에 속할까. 불교국가일까 아니니면 기독교 국가일까. 어떤 이는 우리나라를 불교국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종교인구의 넘버원이 불교이고 더구나 1700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가 우리민족의 삶과 생활방식에 깊숙히 내려 앉아 있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한국은 기독교국가로 분류 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세계종교학회’에서 한국을 개신교가 주류인 국가로 분류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종교인구가 다수를 차지 하고 있고,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교회와 성당으로 넘쳐 나고 또한 왕성한 신행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기독교 국가로 분류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필리핀과 동급
아시아에서 기독교국가로 분류 되고 있는 나라는 딱 세 나라라고 한다. 필리핀과 동티모르와 한국이다. 이 중 필리핀과 동티모르는 ‘로마카톨릭’이 주류이고 한국은 ‘개신교’가 주류이다.
동티모르는 2002년 인도네시아로 부터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신생국가이고 인구도 104만명에 불과하여 관심 밖으로 둔다면 남는 것은 필리핀과 한국이다. 그런데 이 중 문화민족은 한국뿐이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이 발견 하기 전까지 이전 까지 부족국가 형태 이었고, 이후 400년에 달하는 식민지 지배를 격으면서 문화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이 상실되어 사실상 제국주의 종교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 결과 영혼마저 빼앗긴 꼴이 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한국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수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문화민족이다. 그런 한국이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필리핀과 동급이 된 것이다.
교계인터넷신문에서
최근 교계인터넷신문에서 어느 칼럼니스트가 격앙된 글을 하나 발표 하였다. 그글의 제목은 “뭐,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일부 상좌부 수행자들 망발 삼가라”이다. 일부 상좌부 수행자들이 대승불교를 공격하는 것이 도를 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그동안 믿어온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정법이 아니고 모두 힌두교의 잡신들이며, 불성이나 여래장사상도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의 변형이라고 하면서 대승불교는 엄밀히 말해 불교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열 법사의 ‘정법당간을 세우자’]5
“대승비불설도 부족해 용수·세친이 外道?”,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279&thread=24r26)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 하는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위와 같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여성불자가 겪고 있는 엄청난 혼란에 대하여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필연적인 현상
사실 예전에는 이런 문제점을 제기 하지 않았었다. 설령 문제를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전문가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전세계가 글로벌화 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든 정보가 오픈 되고 교류 되면서 하나씩 둘 씩 알게 된 사항이 알려진 것 뿐이다.
더구나 요즘은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이어서 논문이나 각종 정보가 더욱 더 빠르게 확산되어 그 내막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 불자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신행생활에 일대 혼란과 의문을 야기 하게 되었는데 이는 ‘필연적’ 현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현상을 극복해야 할까. 방법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초심으로
“초심으로” 어느 회사에서 본 사훈이다. 이런 문구는 회사 뿐만 아니라 가게나 사무실에서도 볼 수 있는 문구이다. 또 불교에서도 초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 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도 초발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고, 법성게에서도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이라 하여 “처음먹은 마음이 곧 깨달은 마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 되고 있다.
이처럼 무언가 하다가 잘 되지 않을 때 또는 엉뚱한 길로 들어 섰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보면 더욱 더 초심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초기불교가 유행하고 초기불교신봉자가 늘어 나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너무나 벗어나 있어서 처음으로 되돌아 가고픈 욕구의 발로일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조계종의 교육원장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은 ‘불교의 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법대로’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진 것은 현재의 한국불교에 한계를 느껴서 일 것이다.
너무나 취약한 대승의 교리
불교의 입지가 매우 좁아진 현실에서 유일신교 종교와 날카롭게 대치 하고 있고 또한 호시탐탐 해체 하여 먹으려는 매우 호전적인 그들과 공존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대승의 교리는 너무나 취약하다.
대승불교의 교리는 여래장사상에 기반한다. 여래장사상의 불교는 ‘신앙’의 불교이자 ‘구원’의 불교이다. 바로 이런 점이 기독교의 유일신교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아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학자들의 ‘타킷’이 되는 것이다.
오강남 교수의 경우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식으로 설명하는 가 하면, 이찬수 교수는 “외형적 혹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뿐, 교리나 사상, 더 나아가 종교 체험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기독교나 불교는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그들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은 이미 거룩한 분에 의해 주어진 축복이며 은총이기에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자연현상이므로 신의 은총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이 그들의 종교와 비교대상으로 삼는 것은 주로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찾기 위하여 노력한다. 실제로 그런 논문이 발표 되기도 하였다.
불교의 대승사상을 도입하여 ‘대승기독교’라는 말을 만들어 내고, 심지어 보살사상을 연구하여 ‘보살예수’라는 말도 만들어 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교로 개종하거나 옹호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교의 단점과 장점을 파악하여 기독교의 우월성을 알리고 더욱 더 기독교를 전파 하여 이 나라를 기독교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불교를 연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불교가 처한 어려움은 초기불교의 도입으로 인한 불자들의 신행에 있어서 일대혼란이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를 비판하지 말라는데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대승비불설 문제라든가, 불자들이 애송하는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힌두신을 찬양하는 것 같은 문제이다. 예전에는 문제 되지 않은 것들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초기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사진tokscoker.wordpress.com/2010/02/...28-2-10/
초기불교의 교리는 철저하게 부처님당시에서 부터 대승운동이 일어 나기 이전의 불교를 말하는 데 주로 빠알리삼장에 근거한 불교를 말한다. 따라서 초기불교신봉자는 빠알리 삼장에 근거 하지 않은 독자적인 대승경전을 비불설로 간주하고 정법이 아닌 것으로 생각 하는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기복적이고 방편적인 요소를 지적 하며 비판을 하는데 열을 올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대승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매우 ‘불편해’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신봉자들의 대승불교를 폄하하고 공격함으로 인하여 오늘 날 한국에서의 대승불교가 보이지 않는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비판을 멈추어 줄 것을 요구 하고 있다.
비판과 비방은 다른 것
비판과 비방은 다른 것이다. 비판(批判)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다. 비방(誹謗)은 ‘남을 비웃고 헐 뜯어서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서 비난(非難)이 있는데 이는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비판과 비난은 다른 것이다.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 잘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가기 위하여 건전한 비판은 격려하고 장려 해야 할 사항이다. 만일 건전한 비판이 상실되고 용비어천가만 부른다면 어느 조직이든지 금방 부패 하고 말 것이다.
기독교의 신학자들에게 맞서려면
마찬가지로 지금 초기불교신봉자들이 대승불교를 비판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 한국불교를 지켜 내자는 것이다. 한국불교를 흔드는 자들은 대승불교의 약점과 단점을 연구하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심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초심이 바로 초기불교인데, 초기불교의 이론은 그 어떤 초월적 존재나 그 어떤 영혼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신학자들의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일신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관념’적 산물이자 ‘개념(paññatti, 빤냣띠)’에 지나지 않고, 그 바탕 하에 나온 모든 말들이 ‘희론(papanca, 빠빤짜)’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신앙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가 이슬람의 침략이 직접적이고 결정적 타격을 주었지만 이미 그 이전에 힌두교와 구분이 불분명 해졌기 때문이다. 브라만교를 비판 하고 일어선 불교가 브라만교가 힌두이즘으로 부흥함에 따라 불교가 점차 힌두화 되고 마침내 본질적으로 구분하기가 불가능 하여 졌을 때 불교(금강승)는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불교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 들이기 위하여 각종 이론을 내 놓는가 하면, 심지어 이찬수 교수 같은 경우 “결국 기독교나 불교는 같은 것이다.(불교평론2010)”라고 주장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점에서 초기불교에 관심을 돌리지 않으면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먹혔던 것 처럼 한국불교 역시 기독교에 흡수 되어 버릴 것이다.
2010-10-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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