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유일신교를 믿는 이들을 보며, 지혜와 앎은 어떤 것이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0. 13. 23:52

 

유일신교를 믿는 이들을 보며, 지혜와 앎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리석은 이와 함께 한다는 것

 

어리석은 이와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뿐 더러 설령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오해만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투게 되고 나중에는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예로 부터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어리석은 이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였다. 그 중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숫따니빠따법구경에서도 어리석은 이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나온다.

 

숫따니빠따의 행복경에서

 

숫따니빠따의 행복경은 재가불자들의 행복에 대한 조건에 대하여 설한 경전이다. 그런데 수 많은 행복의 조건이 있지만 행복경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이 어리석은 이에 대한 것이다.

 

 

Asevanā ca bālāna paṇḍitānañca sevanā,
P
ūjā ca pūjanīyāna eta magalamuttama.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행복경, mangalasutta, 숫따니빠따 261게송)

 

 

행복의 조건중의 하나가 어리석은 이를 사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슬기로은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고 지혜로운 이를 사귀하는 것을 최상의 행복이라 하였다.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이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법구경에서도

 

법구경은 총 423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12개의 장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리석은 이(Bāla-vaggo, the foolish)’에 관한 것이다. 또 도처에 어리석은 이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씀 하셨는데 그 중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Bālasagatacārīhi             발라상가따짜리히

dīghamaddhāna socati       디가맛다나 소짜띠

dukkho bālehi savāso     둑코 벨레히 상와소

amitteneva sabbadā          아밋떼네와 삽바나

dhīro ca sukhasavāso     디로 짜 수카상와소

ñātīnava samāgamo.       냐띠낭와 사마가모.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기란

오랜 날을 두고 슬프고 괴로운 일.

어리석은 자와 사귀는 것은 둑카,

그것은 마치 원수과 살아가는 것과 같으며

지혜로운 사람과 사귀는 것은 즐거움

친척들과 함께 살아감과 갔다.

(법구경 207번 게송)

 

 

어리석은 이와 함께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이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라고 하였다. 또 어리석은 이와 사귀는 것은 고통이고, 마치 원수와 함께 살아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법구경의 또 다른 게송에서는 아예 다음과 같이 말한다.

 

 

Ekassa carita seyyo                         에까싸 짜리땅 세이요

natthi bāle sahāyatā                           낫티 발레 사하야따

eko care na ca pāpāni  kayirā               에꼬 짜레 나 짜 빠바니 까이라

appossukko mātaga'raññeve nāge.       압뽀쑥꼬 마땅가란녜와 나고.

 

차라리 홀로 살아가라.

어리석은 자와는 벗할 수 없는 것.

저 마땅가 코끼리가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가듯

홀로 살며 악을 행하지 않고

집착 없이 살아가라.

(법구경 330번 게송)

 

 

어리석은 이와 함께 사느니 외롭더라도차라리 홀로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이와 함께 하면 서로 다투게 되고 똑같은 사람이 되어 불선업을 저지르르느니 홀로 살아 가면 악행도 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다.

 

어리석은 이와 함께 하면 왜 괴롭고 고통스러울까. 어리석은 이의 특징은 사물의 진정한 실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영원()하고, 즐겁고(), 자아()가 있다, 깨끗하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또한 무명(avijjā, 아윗자)과 동의어이다.

 

무명은 모든 불선업과 윤회의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에 12연기에서 맨 앞에 등장한다. 또한 어리석음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

 

일요일 오전 도시에서 보는 광경이 하나 있다. 불과 이삼십미터 마다 하나씩 있는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잘 차려 입은 복장에 바이블과 찬송가를 옆에 끼고 교회에 가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인다.

 

교회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복장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래서일까 자유스러운 복장은 전도사의 타켓이 되기 쉽다. 그 때 마다 그들은 예수천국을 이야기 한다.

 

그들의 눈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이다.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빨리 불신자들을 구원해야 된다는 사명감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매우 어리석어 보인다. 왜냐하면 삿된 견해(diṭṭhi)’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사견(邪見)은 정견의 반대어이다.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는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극단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쌍하기도 하다.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우리나라 국민치고 교회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려서 멋 모르고 다닌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미션스쿨에 배정 받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접한 유일신교는 빠져 나오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들어가기는 쉬우나 빠져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장 큰 부담은 역시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유일신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기 때문에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부담을 느낀다거나 믿다가 믿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을 까 하는 두려움이다. 따라서 개종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가슴에 커다란 응어리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이다.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는(悉知悉見, 실지실견)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리석고 불쌍해 보이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초월적 존재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마음에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과연 유일신교에만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을 따르지 않고 유일신교 따라하기를 하는 불교 역시 어리석고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개념에 불과한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서 믿고, 그 대상에 대하여 경배하는 가 하면, 그 대상이 마치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는(悉知悉見, 실지실견) 듯이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하여 소홀이 하거나 잘 모시지 않으면 마치 나쁜 일이 닥칠 것 같처럼 이야기 하는 것도 유일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사성제와 연기에 대한 지혜가 없으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쌍해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학식과 지식이 많더라도

 

부처님은 법구경과 숫따니빠따의 예와 같이 어리석음에 대하여 경계의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어진 이, 슬기로은 이, 지혜 있는 이와 가까이 할 것을 또한 말씀 하시었다. 그렇다면 어리석음과 반대어인 지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지혜와 지식은 다른 것이다. 아무리 학식과 지식이 많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현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자는 통찰지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런 통찰지는 세계적인 철학자, 종교의 창시자, 유명한 작가, 과학자등이 지니고 있는 세속적인 지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리석음과 반대어인 지혜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해제를 참고 하였다.

 

반야지혜만 있을까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자들이 지혜하면 가장 먼저 반야지혜를 떠 올린다. 그외는 모두 알음알이또는 지식으로 치부 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지혜라는 술어가 반드시 반야만 있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지혜와 관련된 술어들은 모두 jña(to know)를 뿌리로 한다. 이 것을 뿌리로 하여 불교적 지혜를 나타내는 말일반적인 앎으로 크게 나뉜다.

 

지혜에 속하는 술어로 냐나(ñana, 지혜), 빤냐(paññā, 통찰지), 아빈냐(abhhiññā, 초월지), 빠린냐(pariññā, 통달지), 안냐(aññā, 구경지)가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혜의 종류

 

  

 

냐나

(ñana, 지혜)

지혜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술어

 

빤냐

(paññā, 통찰지)

-반야(般若)로 음역됨.

-지혜를 나타내는 가장 잘 알려진 술어.

-냐나와 동의어이나 무상, , 무아를

통찰해서 아는 지혜

 

-산스크리트어로 프라즈냐(Prajñā)

 

아빈냐

(abhhiññā, 초월지)

모든 종류의 신통을 나타냄

근접삼매에서 본삼매까지 계속되는 통찰지를 말하기도 함

빠린냐

(pariññā, 통달지)

완전히, 철저히 아는 지혜

빤냐가 있어야 개발되는 지혜

안냐

(aññā, 구경지)

모든 번뇌를 멸한 구경의 경지

 

삼빠잔냐

(sampajaññā, 분명한 지혜)

-정념정지(正念正知)로 번역.

-알아차림공부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림

염처경에서 사용

 

 

 

 

앎의 종류

 

  

 

산냐

(saññā, 인식)

-일반적으로 인식하다의미

-표상하고 지각하는 것

니밋따(nimitta, 표상)나 빤냣띠(paññatti. 개념)과 밀접한 관계

윈냐나

(viññāna, 알음알이)

-분별해서 안다는 의미.

-진행형의 의미

-찟따(citta, 마음, )와 동의어

-개념작용이 생기기 이전의 단계로 매찰나 대상을 접하는 순간순간 생기는 알음알이의 작용

-감각기능과 감각대상과 함께 찰나생 찰나멸

빤냣띠

(paññatti. 개념)

-개념, 정의, 이름등을 뜻함.

-82법을 제외한 모든 것

이름 붙여 아는 수 많은 것들(자아, 컴퓨터, 책상..)

 

 

 

한 없이 어리석고 불쌍해 보이는 그들

 

어리석은 이와 함께 가는 길은 괴롭고 슬픈일이라 하였다. 반면에 지혜로운 이와함께 하면 즐겁고도 행복한 일이라 하였다. 지혜로운 현자는 학문이나 지식이나 개념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아는 이라 하였다. 그 지혜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통찰지를 말한다.

 

통찰지는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것(윈냐나)과 뭉뚱거려 아는 것(산냐)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대상을 그냥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변하는 것으로 알고, 결국 불만족스럽고,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을 무상, , 무아로 아는 것이 통찰지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다. 지혜가 없어서 개념에 불과한 초월적 대상에 귀의 하고, 거기에 휘둘려 마음의 응어리를 진채 살아 간다면 그 처럼 불쌍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일요일 오전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뽐내고 의스대며 가지만 그들을 보면 한 없이 어리석고 불쌍해 보이는데 나만 그런가.

 

 

 

20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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