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금강스님의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 보다 더 과격하고 혁신적인 안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0. 15. 14:10

 

금강스님의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보다 더 과격하고 혁신적인 안

 

 

 

 

 

 

썩은 도끼자루

 

연초 교계 인터넷신문에 썩은 도끼자루라는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작성한 기사를 읽었다. 10년동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한 바 있는 법안스님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사찰 안에 있으면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의 고위층, 부유층이 살고 있는 강남, 서초, 송파, 강동과 같은 곳은 이미 불교가 제3의 종교로 전락했다. 지금이야 수치상으로 최대종교니까 고개 숙일 뿐이다. 거품 빠지고 나면 그런거도 없어질 것은 뻔하다. 지금은 썩은 도끼자루 잡고 있는 꼴이다.

 

(불교는 썩은 도끼자루 잡고 있는 꼴, 법안스님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9516)

 

 

 

사찰안에 만 있다 보면 불교가 처해 있는 심각성을 모른 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도시와 호남지역은 불교가 1등이 아니다. 이들 지역에서 2등종교인 불교가 이제 3등 종교로 추락할 날도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비록 수치상으로 최대종교라고 할지라도 그 실상을 알고 나면 거품 뿐이어서 마치 썩어 빠진 도끼자루를 쥐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어느 네티즌은 우리나라 불자가 1,000만명이라 하지만 명목적 불자를 제한 실질적인 불자는 300만명에 불과 하다고 한다.

 

불교의 본거지에서 조차

 

이 기사가 나온 시점이 2010 2월이다. 기사의 내용을 이용하여 글을 올렸는데 7 (무사안일의 한국불교, 스리랑카불교에서 배워라 ,http://blog.daum.net/bolee591/16154681)이었다. 이 때 시점이 기독교단체들이 잇따라 불교를 폄하 하는 광고를 일간지에 게제하던 때 이었다.

 

특히 그들은 문화재 보존과 이용을 위한 정당한 예산집행을 문제삼는가하면 마치 불교 재산이 친일로 그저 얻은 불로소득인 것처람 표현해 국고에 환수하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 펼쳐기도 하였다. 그로 부터 3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 불교가 썩은 도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일어 났다.

 

11월 개통 예정인 경부고속철도의 울산역 명칭과 함께 사용하기로 한 통도사역이 해당 지역의 개신교 단체의 반대 주장에 좌절 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정부와 대구시가 추진하고 있는 불교테마공원역시 대구지역의 개신교계의 반발로 계획이 일단 저지 되었다.

 

이처럼 불교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영남지역에서 조차 개신교의 반발로 모든 불교관련 사업이 좌초 되거나 유보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면, 불교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서울과 수도권도시, 호남지역에서는 발도 붙이지 못할 상황이 오고 말 것이다.

 

놀라 자빠질 만한 주장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요인은 무엇일까. 도대체 종단과 스님들은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언가 제도와 시스템이 잘못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한 일말의 답을 준 기사를 보았다.

 

교계 인터넷신문 미디어붓다에 따르면 최근 금강스님(미황사 주지)은 획기적인 제안을 하였다고 전한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불교유신 다시 생각하다'를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 말미에 대중결사 사무총장인 금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앙종회 없애자”, “문화재관람료 받지 말아야”, “총무원장을 포함 종단의 요직은 포교 잘하는 스님들이 맡아야”….

("종단요직은 포교 잘하는 스님이 맡고
종단혼탁 진원지 중앙종회는 없애야 한다"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361&thread=23r04)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을 제창한다.docx

21세기 한국불교유신론을 제창한다.hwp

 

 

 

이 같은 주장은 한국불교의 근간을 흔들만한 놀라 자빠질 만한주장이다. 또 스님은 승가가 존경 받기 보다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 하는 가 하면, 불교가 정치, 사회, 문화, 경제등 전분야에서 제3의 종교로 전락하였다고  말하고 이렇게 가다가는 불교가 다시 억압받고 탄압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이처럼 혁명적인 주장을 한 스님은 포교와 재가불자의 위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포교는 반드시 스님들만이 포교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일선에서 포교 하는 재가포교사에게 승려에 버금 가는 권위권한을 부여 하여 이들로 하여금 포교현장으로 내 보내서 갖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대와 맞게 인터넷포교를 활성화 한다든가 반드시 정법(正法)’을 중심으로 포교 하는 것을 말한다.

 

더 과격하고 혁신적인 안도 받아들일 자세가

 

특히 스님은 승려들의 3(三無)현상에 대하여 지적 하였는데, 즉 무위도식, 무식, 무사안일을 말한다. 이런 자세로는 오늘 날 당면한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문제를 풀어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3등종교로 전락 하는데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제시한 21세기 불교유신론보다도 더 과격하고 혁신적인 안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님이 제시한 것은 100년전 만해스님이 주장한 불교유신론을 기반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적합한 ‘21세기 불교유신론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100년전 만해스님이 주장하였던 것처럼 스님이 주장한 ‘21세기 불교유신론또한 파격적이고 놀라 자빠질만한 내용이 많음에도 불구 하고 더 과격한 주장이나 더 혁신적인 주장이 있으면 이를 받아 들일 만한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시 하려 한다.

 

삼귀의를 뜯어 고쳐야

 

불자들이 법회의식에서 독송하고 있는 삼귀의 중에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가 있다. 그런데 스님들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밖에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국가에서는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로 부른다. 우리말로 승가에 해당된다. 따라서 스님들대신에 승가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귀의 대상은 불법승 삼보이다. ‘부처님(Buddha)’부처님의 가르침(Dhamma)’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를 이룬 성자(Sangha)을 말한다.

 

특히 세번째의 성자들은 반드시 비구나 비구니 스님이어여만 한다는 법이 없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가 되는데 있어서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삼귀의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한다는 식으로 을 박아 놓아 재가자들이 승가의 일원인 ‘4부대중으로 되는 것을 제한 하고 있다. 그래서 재가자는 항상 신도로 불리우고 모든 스님들은 귀의 대상으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삼귀의에서 귀의의 대상인 상가는 성스러운 상가를 의미 한다. 모든 비구나 비구니 스님이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 도와 과를 이루신 분들이면 모두 귀의의 대상이자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스님들로만 한정하고 있는 우리나라 한글 삼귀의는 승가로 반드시 고쳐야 한다.

 

신도를 재가수행자라 불러야

 

21세기불교는 수행의 불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작금의 염불이나 기도위주의 기복이나 방편불교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따라하기 식의 불교는 불교의 기독교화를 부채질 할 뿐이다.

 

가장 불교다운 불교는 기독교식의 기도와 기복위주로 이루어진 불교가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불교일 것이다. 이런 불교의 수행전통은 전 세계의 그 어떤 종교전통에서 발견 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한국적 종교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살려 국민들에게 어필한다면 불교의 이미지는 확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자들을 신도가 아닌 수행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사홍서원에도 나와 있듯이 불자들의 큰 서원 중의 하나가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불도를 이루는 데 있어서 유일신교 종교와 같은 신자개념이어서는 곤란하다. 불자들 모두가 수행자가 되어야 불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기복적이고 인과를 무시한 칭명염불이나 대상에 몰두 하는 절수행과 같은 사마타수행보다 깨달음을 향한 경행이나 좌선수행 위주로 바꾸어 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하여 모두 고귀한 존재로 거듭 태어 났을 때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은 한 껏 고양될 것이다.

 

설법위주의 불교로

 

순례법회를 다니다 보면 오전에 사시공양법회에 참여 하게 된다. 정해진 의례에 따라 경전, 다라니, 진언 독송등을 한시간 넘게 두시간 가까이 진행 하는데, 의식이 끝나고 나면 별도로 법문을 하는 것은 매우 드믄 일이다. 아마도 절이 산중에 있어서 스님 혼자서 의식을 진행 하다 보니 법문이 필요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러나 순례팀과 함께 하는 사시공양에서 종종 법문을 듣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법문의 내용이다.

 

어느 순례법회에서의 일이다. 사시공양이 끝나고 어느 스님이 법문을 하였는데 산토끼노래를 부르자고 하였다. 마치 동심으로 돌아 간듯 모두 산토끼 노래를 부르고 법문을 들었는데 법문을 많이 해 보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감명 깊지 않았다. 산토끼 노래를 부르자고 한 것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자고 한 것이라 말한 스님은 경전에 근거한 법문보다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 위주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인고 개인적인 신변위주의 법문이 되고 말았다.

  

법문을 하는 사람의 의식수준에 따라 참여자의 의식수준이 결정 된다. 법문하는 사람이 자신의 신변위주의 이야기만 하였을 때와 사성제에 대한 법문을 하였을 때 이를 받아 들이는 청중의 의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불자들을 주눅들게 하는 법문이 있는가 하면 불자들의 의식을 한 껏 고양시키는 법문도 있다.

 

잘하는 법문이란 불자들로 하여금 긍지자부심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스님들은 법문을 많이 해 보지 못해서인지 법문을 그다지 잘 하지 못한다. 법문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것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참선이나 염불위주이다 보니 법문은 어쩌다 특별한 날에 하는것으로 되어 있다. 일상적인 법문은 거의 없고 설령 법문을 한다고 하여도 신도들한테 들은 이야기나 신변위주의 법문이 대부분이다.

 

또 법문을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나무아무타불을 염송한다든지, 호통치듯이 큰소리로 말하는가 하면 심한 사투리를 섞어서 내키는 대로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한 교리에 근거한 이야기 보다 자신의 생각위주의 법문을 하다 보니 받아 적을 것이 거의 없다.

 

차라리 그런 경우 경전을 읽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경전에 있는 내용 그 자체가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무리 법문을 못한다고 하여도 용서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설교에 있다. 다른 것 보다 오로지 설교에 승부를 건다. 감명적이고 감동적인 설교를 들으면 신자들은 은총을 듬뿍 받는 것처럼 느낀다.

 

그와 같은 감동적이고 감명적인 설교를 하기 위하여 그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한다. 책을 보고 관련자료를 찾고 이야기를 들어서 매일 설교 하다 보니 오늘 날 과 같이 도시에서 십자가물결이 일렁이는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반면에 설법중심의 초기불교가 신앙중심의 대승불교로 바뀌면서 설법은 사라지고 대신 다라니나 진언과 같이 각종 재와 기도위주의 불교만 남게 되었다. 그 결과 한 번 외운 다라니와 진언등으로 일관 하다 보니 오늘 날 불교는 산중에서만 볼 수 있고 도시에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불교가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설법위주의 불교로 가야 한다. 한 번 외운 각종 다라니나 진언으로 승부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이다. 감동적이고 감명깊은 설법을 해야 하는 데 불교는 그런 소재는 널려 있다.

 

부처님의 84천 법문이 있고, 숫따니빠따나 법구경과 같은 아름다운 게송, 아비담마와 같은 체계적인 불교이론서, 청정도론과 같은 수행지침서등 공부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설법할 소재는 무궁무진 한다.

 

부업을 가진 스님들, 투잡은 그만 두길

 

지난 9월 자승총무원장 스님이 미국의 뉴욕을 방문 하였는데 한국의 사찰음식을 알리는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이 사찰음식을 주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스님들이었다. 이처럼 스님들은 요리나 음식 분야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세속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노래를 잘 하여 음반을 낸 스님도 있고, 그림을 잘 그려 달마도로 유명한 스님도 있다. 을 잘 추어서 각종 불교행사에 빠짐 없이 참여 하는 스님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천도제 잘하기로 유명한 S스님은 매일 라디오의 광고방송에 출연하여 천도제구병시식을 알리기에 열심이다. 또 어느 스님은 금빛 가사와 장삼을 입고 메이저 신문에 커다란 광고를 내어 운명, 운세, 사업성취 법회를 이름 있는 고급장소에서 개최한다고 알리고 있다.

 

이와 같이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스님들을 방송을 통하여 또는 책을 통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불교는 스님들의 사회적 활동에 참으로 너그러운 것 같다.

 

일반인들이 두개의 직업을 갖는 것을 흔히 투잡(two job)’이라 한다. 한 가지 직업으로 먹고 살 수 없어서 주말이나 밤에 뛰는 또 하나의 직업을 말하는데 아르바이트 성격도 있다.

 

두개의 직업을 가지면 눈코 뜰새 없이 바쁠 것이다. 본업을 감당하기도 힘든데 거기에다 부업까지 하게 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되어 어느 것 하나 집중하지 못 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투잡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처지라면 매우 어려운 환경에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 출가스님들이 본업인 수행이외 별도의 직업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는 이를 너그럽게 받아 들여 중생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방편은 어쩌다 한 번 썩 먹어 하는데 매번 방편을 사용 한다면 본업과 부업이 뒤 바뀌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될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대부분 생활인들이다. 일을 해야 수입이 있어서 생활을 유지 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일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시간을 쪼개서 불교교양대학에 다닌다거나 새로운 수행법을 배우기도 한다. 매일 글을 쓰는 경우라면 보통 몇 시간 걸려 완성 되기 때문에 월급생활자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공부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닦아야 할 것도 무척 많다. 그렇기 때문에 불도를 닦기 위하여 출가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노래, , 그림, 운명감정과 같은 부업을 겸하고 있다면 공부는 언제 할 것이고 어느 세월에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을까.

 

남방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비구나 비구니가 부업을 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또 이웃종교인 천주교 신부가 부업을 가진 경우를 상상 할 수 있을까. 세속을 떠나 도를 추구 하는 출가수행자가 세속인들이나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면 본업인 수행과 포교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비승비속의 전통은 불교의 발전이나 이미지를 위하여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새이다. 출가자의 본업이 수행과 포교라면 부업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 부업이 하고 싶다면 나가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왜 비판이 필요한가

 

금강스님은 작년 순례법회 당시 만나 뵌 적이 있다. 비록 몇마디 밖에 나누지 않았지만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고심하고 있는 분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 때 당시 법문에서 참선은 우리를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라는 말을 인상깊게 들었다. 그런 스님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개탄 하며 21세기 불교유신론을 발표 하였는데 과연 그대로 실현 될 지 알 수 없다.

 

100년전 만해스님이 불교유신론을 집필할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상황은 그다지 나아 지지 않았다. 60년대에 법정스님이 불교유신론과 비슷한 주장을 하였지만 크게 변화 된 것은 없다. 그리고 21세기에 다시 한번 금강스님이 불교유신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만일 이대로 실현 된다면 한국불교는 환골탈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변하기는 매우 어렵다. 외부적 자극이나 내부적 요구가 있어야 변화를 수용할까 기득권층에서 스스로 개혁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단과 스님들이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재가불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재가불자들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깨우치고, 더 많이 비판 한다면 비판이 두려워서라도 정법이 어긋난 일을 못할 것이고 위기감을 스스로 느껴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10-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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