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신교를 극복하려면, 위빠사나 통찰지의 검(劍) 알아차림(sati)의 힘
불교와 ‘칼’
불교와 ‘칼’은 어울리는 주제일까. 칼 이야기를 하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칼도 칼 나름일 것이다. 주방에서 매일 쓰는 칼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베는 칼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마음의 칼’도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반야의 검’이라 부른다.
반야의 검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문수보살이 반야의 검을 들고 있는 ‘티벳탕카’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가장 인상깊은 것은 역시 선지식들이 언급한 내용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5세기에 작성된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 비구가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면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S.i.13, 상윳따니까야)
청정도론의‘해제’에 해당하는 게송인데 책의 말미에서 한 번 언급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서 가장 먼저 설명되는 이 게송 중에 핵심 중의 핵심은 마지막 구절인 “이 엉킴을 푼다” 일 것이다.
위빠사나 통찰지의 칼
엉킴을 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청정도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도(道, magga)의 순간’에 엉킴을 푼다고 말하였다. 또 ‘과(果, phala)의 순간’에 엉킴을 푼자가 되어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한 자가 된다고 하였다.
이 때 엉킴을 푸는 것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 통찰지의 칼’이다. 이에 대한 표현을 붓다고사 비구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계와 마음이라는 제목아래 표현된 삼매와 세가지 통찰지와 근면함이라는 이런 여섯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계의 땅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 위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빳사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한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버릴 것이다.
(청정도론 1권, 127p)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보고 있는 듯한 글이다. 그것도 ‘칼’을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 베는 대상이 바로 ‘갈애’라는 것이다. 한량없는 세월을 윤회하게 만든 갈애를 마치 대나무를 베어 버리듯이 사용하는 칼은 위빠사나 통찰지의 칼이다.
37조도품에서
그 칼을 사용하는 검법은 다름 아닌 ‘정진의 힘과 노력한 깨어 있는 통찰지’일것 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정진(위리야, viriya, 정정진), 알아차림(알아차림, 念, 사띠, sati, 정념), 통찰지(慧, 빤냐, pañña, 정견)가 된다. 그런데 이 세가지 용어는 37조도품에서 가장 강조 되는 마음부수(마음의 작용)라는 것이다.
37조도품이란 14가지 마음부수(정진, 알아차림, 통찰지, 집중, 믿음, 일으킨 생각, 경안, 희열, 평온, 열의, 마음, 정어, 정업, 정명)와 7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14가지 구성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마음의 작용은 무엇일까.
대승불교권에서 반야(慧, 빤냐, pañña, 정견)와 마음(心, 찟따, citta)을 가장 중요시 하게 여기지만 37조도품에서는 통찰지는 3위, 마음은 11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정진이 9번으로 1위, 알아차림이 8번으로 2위, 통찰지가 5번으로 3위에 언급되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그래서 붓다고사 비구가 “정진의 힘으로 노력한 깨어 있는 통찰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진과 알아차림, 통찰지 이 세가지를 합하면 모두 22개로서 37조도품 중에 60%를 차지한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칼을 사용한다고 하면 바로 정진, 알아차림, 통찰지의 세가지 ‘검법’이 주된 기술이라 볼 수 있다.
일본드라마에서 본 검법(劍法)
누구나 마음속에 검(劍)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대상을 만나면 정진과 알아차림과 통찰지라는 검법으로 ‘단칼’에 베어 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전에 버금가는 피나는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좋은 예를 일본 드라마에서 보았다.
이제까지 본 일본 시대드라마는 아츠히메(篤姫, 2008), 신선조(新選組, 2004)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료마전(龍馬伝, 2010)이다. 이들 드라마는 공통적으로 도쿠가와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초기의 격동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이들 드라마에서 주목해서 본 것 중의 하나가 ‘검법’이었다. 각 드라마 마다 지역적 배경이 다른데 따라서 검법 또한 모두 독특하여 모두 류파(流派)가 달랐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류파(流派) |
드라마 |
지 역 |
내 용 |
시현류 (示現流, 지겐류) |
아츠히메 (篤姫, 2008) |
사츠마 (지금의 가고시마) |
사츠마의 무사들이 사용한 검술 |
천연이심류 (天然理心流, 텐넨리신류) |
신선조 (新選組, 2004) |
타마 (토오쿄오 근교) |
신선조 간부들이 사용한 검술 |
북진일도류 (北辰一刀流,, 호쿠신잇도류) |
료마전 (龍馬伝, 2010) |
에도 (지금의 토오쿄오) |
미도번 전통의 검술. 사카모토 료마가 수련한 검법 |
드라마에서 본 검법은 시현류, 천연이심류, 북진일도류 이렇게 세가지이다. 이 중 가장 인상깊게 본 검법이 시현류(지겐류)이다.
시현류(示現流, 지겐류)
사츠마검법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인터넷에서
일격필살의 지겐류 검법
지겐류는 ‘사츠마 검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가고시마 지역을 말한다. 일본의 최남단의 변방에 위치한 사츠마번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검법이 바로 지겐류라 한다.
지겐류 검법의 정신으로 무장한 무사들이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 바로 지겐류 ‘검술 수련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겐류 검법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일격필살’이다.
진검승부에 있어서 첫 번째 공격에서 실패하면 바로 상대편의 검에 베이게 되어 있다. 따라서 단 한번의 공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공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단 한 번의 공격에 승부를 내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좋은 예로 ‘통나무치기’가 있다. 목봉을 들어 하루에 ‘만 번’ 통나무치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목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통나무에서 연기가 날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피나는 연습을 한 후 진검승부가 벌어 졌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 올까.
지겐류의 검법에 베인 사람은 정수리에서부터 배꼽아래에 까지 정확하게 ‘이등분’이 될 정도라 한다. 따라서 지겐류의 첫 번째 공격을 받으면 검이건 몸이건 무조건 ‘두동강이’ 나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지겐류의 첫 번째 공격은 받지 말고 반드시 피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가공할 검법은 오로지 ‘내려베기’ 기술하나인데 이런 정신으로 무장한 무사들이 결국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알아차림 검(劍)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칼을 차고 다니던 시절에는 검술을 배우는 것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피나는 연습을 하였고 실제로 진검승부에서 그 훈련의 결과가 확인 되었다. 연습이나 훈련을 게을리 하여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였을 때 그 결과는 곧바로 ‘죽음’으로 직결 되었다.
지금의 시대는 검을 차고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 검’을 차고 다닐 수 있다. 그 검은 바로 ‘위빠사나 통찰지’라는 검이다. 진검승부에서 대상을 만나면 일격에 베어버리듯이 ‘갈애’라는 엉킨 그물을 풀고, 자르고 부수어 버리는 것은 정진과 알아차림과 통찰지라는 것이다. 이 중 ‘알아차림’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검이다.
사띠(sati)라 불리우는 알아차림은 여러가지 용어로 불리운다. 어떤 이는 이를 ‘마음챙김’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마음집중’이라 말한다. 그러나 ‘수행처’에서는 알아차림으로 통일 되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가장 설명하기 쉽고 또한 이해하기도 쉽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한 8만4천 법문을 한 마디로 줄이면 바로 ‘알아차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알아차림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마치 마음속에 검을 차고 있는 것과 같은 든든한 느낌을 받는다. 대상을 만나면 언제든지 알아차리면 되기 때문이다.
개념(paññatti, 빤냣띠)이란
알아차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등을 말한다. 단지 “그렇네” “그렇구나” “그러려니” 하면 그 뿐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하여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의미를 부여 하지 않는다. 또 알아차림은 실재하는 현상만 보기 때문에 ‘개념 (paññatti, 빤냣띠)’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관념’이라고 말한다. 단지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한 것을 말한다. 사람이름이나 책상, 관악산 같은 것이다. 이는 오로지 개념적으로만 존잴할 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임시적으로 잠정적으로 이름을 붙여서 구별하기 위한 것에 불과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나 ‘영혼’도 개념에 불과하다.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것이다. 실재는 오온의 결합물이다. 항상 변하는 오온의 상호작용이 바로 본 모습이다. 그 안에 고정된 자아나 불변하는 영혼은 있을 수 없고, 순간 순간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이 항상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고, 고정된 자아가 없어서 ‘무아’라고 말한다. 따라서 무상하고 무아인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이 따른다고 말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제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 하는 것이다. 그런 지혜를 위빠사나 통찰지라고 말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알아차림이라는 검을 가졌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어떤 대상이든지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유일신교’가 될 수도 있다. 유일신교의 ‘유일신’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의 ‘개념’에 불과 하다. 실체가 없이 단지 이름붙여진 ‘초월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개념을 부수기 위하여
알아차림이 없이 오로지 마음으로만 불교를 해석한다면 필연적으로 공사상을 기반으로 한 진여, 불성, 법성, 여래장, 원각, 법계와 같은 개념이 또 등장 한다.
부처님이 ‘개념을 부수기 위하여’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그 결과 성립한 것이 불교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개념을 부정하고 실재하는 현상만을 관찰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또 다시 불성이나 법성과도 같은 개념을 주장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불성과 법성은 필연적으로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의 개념과 비슷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불교나 기독교가 모두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심지어 어느 불교학자는 대승기신론의 ‘한마음(一心)’을 예로 들며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 학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제현상을 ‘신의 섭리’ 내지 ‘신의 은총’영역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또 존재 그 자체로서의 신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그 분의 테두리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이 있어서일까 대승불교의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아는 당체를 영혼이라는 말대신 불교에서는
언제가는 부처를 이룰수 있는 착한 성품을 가진 '불성' 이라고도 말하고, 혹은 일체 만물 속에서
생존 했다가 없어진 듯 했다가 봄이되면 다시 싹이트고 잎이나서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어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 되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켜서 '온 우주 법계의 자체의 성'이라고 하여 줄여서 '법성'이라고 말합니다.
(2010-9-15 일자 경전공부 청취자 게시판)
선사는 영혼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것을 ‘불성’이나 ‘법성’이라고 해석하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성이나 법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른 다면 ‘구차하게’ 괄호속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라는 글을 써 넣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말은 다름아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개념도 단 칼에
실재가 아닌 모든 것을 ‘개념’이나 ‘관념’으로 보면 된다. 구차하게 이런 저런 설명이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면 이미 개념에 빠지는 것이다. 유일신도 마찬가지이다. 있느니 없느니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 한 일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은 단지 이름 붙여진 개념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개념을 부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무더기(오온)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렇게 분해하여 놓고 보았을 때 그 어떤 개념이나 관념이 자리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실재만 있을 뿐이다. 그 외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은 개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 어떤 개념도 ‘단 칼에’ 베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2010-10-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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