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티벳불화의 얍윰(yab-yum)과 불교타락의 극치 좌도밀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0. 7. 11:13

 

티벳불화의 얍윰(yab-yum)과 불교타락의 극치 좌도밀교

 

 

 

티벳불화를 탕카(thangka, 幀畵)라 한다.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벽에 거는 불화의 종류인데 족자 또는 액자로 만들어 사용한다. 티벳에서는 주로 면직물 위에 그리는데 그림을 말아 올릴 수 있도록 밑단에 대나무를 붙인 형식이라 한다.

 

탕카는 절이나 집의 불단에 걸기도 히고 종교행사가 있을 때 들고 나가기도 하며, 설법이 있을 때 도해용으로도 사용 된다. 그런 탕카 중에 얍윰(yab-yum)’이 있다.

 

남녀교합상, 얍윰(yab-yum)을 보며

 

얍윰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남녀가 서로 교합하고 있는 남녀교합상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불교전통에서는 용인 할 수 없는 얍윰이라는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탕카라는 형식을 빌어 불교용품을 파는 사이트에서 버젓이 선 보이고 있기도 하다.

 

 

 

 

얍윰(yab-yum)

지혜(여성)와 방편(남성)의 합일을 남녀교합상으로 표시

(사진 http://www.tibetshop.com/vs497.html)

 

 

 

얍윰이란 무엇일까. 인터넷백과사전을 검색해 보면 티벳어로 부모라는 뜻이다. 인도, 네팔, 티벳등지의 불교예술에서 여성 배우자와 성관계를 하고 있는 남성 신의 모습이 얌윰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자세는 남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적극적인 힘으로서의 방편(方便 upāya)과 여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지혜로서의 반야(般若 prajna)의 신비적 합일을 나타낸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러한 합일은 현상적 세계의 거짓된 이원성을 극복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한다.

 

성적 결합을 신비적 합일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도의 탄트라 사상으로부터 유래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불교도들은 이러한 사상을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티베트에서도 얍윰의 그림은 사용되지 않는데, 그러한 이미지의 비의적(秘意的) 중요성에 대해 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티베트에서는 여성 배우자와 함께 있는 남성 신에게 기원을 하면 더욱 효과가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고, 성직자들이 택하는 본존(本尊 yi-dam)은 언제나 얍윰의 형태로 표현된다.

 

금강승 불교의 특징이 지혜방편인데 지혜는 정적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묘사되고, 방편은 동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남성으로 비유된다. 따라서 남녀가 교합함으로서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성취하여 해탈 성불한다는 것이다.

 

불교타락의 극치, 좌도밀교

 

이렇게 지혜와 방편에 의해 얻어진 열반을 반야방편(prajñopayā)’이라 하고, 그 열반을 궁극의 즐거움이라는 뜻인 대락(大樂, mahasukha)’라 불렀다. 이에 대하여 DK교수는 2002년 자신의 불교강좌 시리즈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하였다.

 

 

중생들이 글도 모르고 경전을 읽을 줄 모르는 상태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경지를 설명하다 보니 도무지 알아 듣는 사람들이 없어서, 남녀교합상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 부처님법은 남녀가 교합하는 즐거움 보다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중생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방편으로 설명한 것이다.”

 

 

남녀교합상이 불교의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티벳불교를 옹호하고 오해가 없도록 잘 설명하기 위하여 부모의 교합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지만 얍윰은 불교의 타락이 극에 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금강승불교에서 이처럼 타락한 불교를 좌도밀교라 부르고,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라 부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금강승불교를 불교의 한 분파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 힌두화된 불교를 말한다. 겉 모양은 불교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부는 힌두이즘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불교를 말한다.

 

남녀교합상에서 보여지는 지혜와 방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힌두이즘의 탄트리즘에서 비롯 된다. 시바(Siva)’삭티(Saktl)’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와 방편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을 보면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려가 망한 요인도

 

이런 금강승불교는 7세기 말 부터 나타났는데 이전의 대승불교와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 힌두이즘의 영향아래 7세기 중엽부터 불교는 급격히 밀교화 되고 종래의 불보살외에 새로운 예배대상이 불교안으로 유입된 것이다. 티벳불교에서 지금도 볼 수 있고 가장 유명한 타라(Tara)’보살 같은 것이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하자 금강승을 비롯한 인도불교가 티벳으로 이전 하였고, 이를 근간으로 하여 티벳대장경이 만들어 졌다. 그런데 티벳대장경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탄트라부이다. 탄트라부는 오로지 티벳대장경에만 있다고 한다.

 

이런 티벳불교는 원나라 시대가 되자 원나라의 국교가 되었고 원나라의 광적인 티벳불교 숭배는 타락한 티벳불교를 더욱 더 타락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는데 이 때 티벳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천수경에 보는 것과 같은 각종진언이 그 때 당시 들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고려가 멸망한 요인 중의 하나가 신돈의 횡포와 같은 불교의 타락이라 하는데 아마도 그 때 당시 티벳불교, 특히 좌도밀교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닐까.

 

금강승 불교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이처럼 불교가 밀교화 하면서 불교의 본질과 멀어지고 타락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금강승 불교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금강승의 금강은 산스크리트어로 금강석(vajra)을 말한다. 금강석처럼 변하지 않는 자아법의 자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금강의 자성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성과도 동일시 되어 공성승(空性乘, Sunyatayana, 순냐타야나)’이라고도 한다. 또 그들의 수행방법인 요가는 좌도밀교의 경우 성적인 쾌락과 결부 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금강승은 초기불교와 비교 하여 보았을 때 자아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무아를 주장한다. 그 역사는 부처님 당시 부터 시작되고 있다.

 

부처님은 브라만 교의 아트만을 비판 하여 무아를 주장하고 성립 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올 수록 무아는 ()’으로 바뀌고, 마침내 힌두이즘과 동일한 금강석 처럼 변치 않는 자아의 금강승이 되어 힌두교와 구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힌두이즘과 차별이 없게 되자 단지 교학적으로 만 남아 있던 불교는 1203년 이슬람의 침입으로 그 때 당시 최대의 사원이었던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 되면서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먼 요인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중의 하나가 불교의 변질이라 볼 수 있다. 당초 브라만교를 비판 하고 성립한 불교가 브라만교의 후신인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아 힌드이즘화 되어 양자가 구별이 없어 졌을 때 소멸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먼 요인은 초기불교에서 분파 되어 나간 대승불교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승불교가 대중들의 구원을 목적으로 부처님의 자비행을 실천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상보살을 만들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경전을 새로이 편찬 하였다.

 

기존의 니까야가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별도의 경전을 결집한 이유는 독자적인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전이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과 같은 것이다. 이 중 특히 반야경은 공사상을 강조 하였는데 초기경전에 없는 내용이다.

 

공사상을 바탕으로 무수한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고 관련된 사상 또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난 원인에 무색할 정도로 교학적으로 되었다. 그 결과 반야중관-유식-여래장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후 금강승 불교로 전개 되면서 초기불교와는 매우 이질적인 불교가 되었다.

 

이처럼 분파되고 가지를 쳐 나간 불교의 종착지가 좌도밀교의 지혜와 방편을 표현한 얌윰이라는 남녀교합상이 되었고 이는 곧 인도에서 불교의 멸망으로 이어 졌다. 이 시점에서 초기경전을 지켜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원본을 지켜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대림스님의 청정도론 해제에 따르면 스리랑카 불자들의 초기경전을 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BC3세기에 아소까대왕 당시 3차 결집을 통하여 공인된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가 스리랑카에 전해 졌는데, 이 때부터 원본을 지켜 내기 위하여 출가자들의 눈물 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 때 가장 민감 하게 반응 한 것이 새로운 사조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체로 기원전에 대승불교 운동이 시작 되어 스리랑카에도 파급 되었는데, 이들 출가자들은 그와 같은 운동을 일종의 ‘불교의 타락’으로 보았다. 빠알리 삼장에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간주 한 것이다.

 

그래서 원본을 보존 하기 위하여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를 싱할리어로 가두어 버렸다. 싱할리어 문자로 기록 하여 전승 하였기 때문에 원본의 훼손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백년간 싱할리어로 가두어 두어 대승불교의 기세가 한 풀 꺽였을 때  이를 다시 빠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5세기의 붓다고사 비구의 청정도론도 이때 집필 되었다.

 

그래서 지금 보는 빠알리 삼장은 원본의 훼손 없이 부처님 당시의 원음을 그대로 보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좌도밀교와 같은 불교의 타락도 없었다.

 

 

 

201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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