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나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을까, 아상가교수의 ‘업과 재생'강의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0. 11. 18:37

 

부처나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을까, 아상가교수의 업과 재생(rebirth)’강의를 듣고

 

 

 

 

 

 

 

 

 

잘 하는 법문이란

 

불교교양대학에 다닐 때 그냥 듣기 위해서 다녔다. 앉아서 듣는 것 이상 생각하지 않았으나 옆에 있는 어느 법우는 열심히 노트에 메모하는 것이었다. 마치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꼼꼼히 메모 하는 모습이 여간 진지해 보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본 후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갖는다. 특히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 하면서 법회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는 빠짐 없이 메모 하였다.

 

그런데 어느 법문의 경우 메모할 것이 없어서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었다. 그런경우 법문의 내용이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라기 보다 자신의 경험담이나 신변이야기등이 주로 언급 되었기 때문이다.

 

법문이나 강의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의 판가름은 메모할 내용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단 한 줄도 적을 것이 없는 법문이나 강연이 있는가 하면, 한 줄 한 줄이 새록 새록 모두 마음에 다가와 단 한 줄도 놓치지 않고 메모 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후자의 경우가 아상가교수의 강의 일 것이다.

 

좋은 자료를 공유 한다는 것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강의는 들을 만 하다. 불교tv의 사이트에 등재(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되어 있는 그의 강의는 마치 군계일학처럼 우뚝 서 있는 듯이 보인다. 한 줄 한 줄 놓칠 수 없는 강의 중에 업과 재생에 대하여 옮겨 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보충자료를 만들었다.

 

강의 내용이 좋아 녹취하여 워드로 옮기는 과정에서 검색한 결과 어느 블로그 (http://blog.naver.com/spidchoi/130028378304)에 내용이 고스란히 올려져 있어서 그대로 참고 하였다. 좋은 내용을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오른쪽 마우스 버튼을 하용해준 것에 감사 드리고 또한 마음껏 퍼 갈 수 해 놓은 마음에 또 한 번 감사드린다.

 

다만 번역어 중에 영어단어 ‘rebirth’에 대하여 환생으로 표현 하였으나 이를 재생(再生)’으로 바꾸고 또 문단을 나누어 보기 편하게 하였다. 한편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에 관련하여 동영상과 법구경 원문을 실어 보충 하였다. 또 빨강글씨로 된 표를 만들어 본문의 내용을 보충 설명 하였다. 파랑글씨는 본문의 내용을 강조 한 것이다.

 

다음은 아상가 교수의 강의내용이다

 

업과 재생은 함께 가는 것

 

부처님 가르침 중 매우 중요한 개념인 업과 재생에 대해 말하지요. 업의 가르침 역시 연기에 속합니다. 우리는 업을 자연원리로 또는 연기 안에서 작용하는 법칙으로 논했습니다. 즉 불교전통에서 업은 기본적으로 연기에 속하는 어떤 현상으로 이해됩니다. 이 법칙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주제를 업과 재생이라 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두 개가 함께 가기 때문이에요. 재생이란 중요한 측면을 이해하려면 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지요. 개개인의 환생은 그가 행한 선업이나 악업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업과 환생은 대체로 함께 합니다. 그래서 이 강의에선 먼저 업을 살펴본 후 업이 어떻게 재생에 연결되는지 보겠습니다.

 

업은 의지작용(cetana, 쩨따나)’이다

 

업은 빨리어로 Kamma라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Karma인데 저는 Karma를 사용하겠습니다. Karma가 영어권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고 또 표준 영어사전에도 수록된 말이니까요. 업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으로 불교뿐 아니라 인도전통의 일부이기도 해요.

 

물론 역사도 길어서 아주 초기의 베다 문헌에서도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있지요. 이어 브라만 종교에도 업이 수용되었지요. 그리고 부처님 당대에 이르렀을 때 많은 종교의 스승들이 존재했어요. 예를 들면 자이나 교의 창시자 자이나 마하비라도 매우 발전된 업의 이론을 가지고 있었지요.

 

따라서 Karma라는 개념은 전 인도에 공통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부처님은 Karma의 개념을 수용하긴 했지만 불교 가르침 안에서 새로이 정의하셨지요. 이해 방식이 다른 인도 종교전통과 매우 달랐지요.

 

부처님 법에서 매우 중요한 혁신 중 하나는 업의 설명에 있어 의지작용을 정의한 겁니다. 이 것은 매우 잘 알려진 정의로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업은 의지다.

뜻을 정한 후에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동한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잘 알려진 이 정의는 업이 의지(Cetana. 쩨따나)라고 말하고 있어요. 영어번역은 Volition으로 하는데 의도적으로 생각해 일을 행한다는 거지요.

 

물론 누구나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뭔가를 합니다. 따라서 이 정의가 특별할 것은 없지요. 하지만 여기서 부처님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의 심리적 배경을 강조하셨어요. 행위의 성격이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저변에 놓인 정신이 매우 중요해요. 다시 말해서 불교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지 행위 저변에 놓인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정의에 의하면 업이 의지며 개인은 의지를 발휘한 후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3가지 행위를 말하는데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불교전통에서는 우리가 행위를 함에 있어 이런 3가지 방식 또는 문이 있다고 합니다.      

 

과보와 그림자

 

이런 것들 중 궁극적 결정요소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 저변에 놓인 정신입니다. 그 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에 따라 행동은 좋기도 나쁘기도 한 겁니다.

 

매우 잘 알려진 시구 모음집인 법구경을 잘 아신다면 그 초반부에 바로 이 것 마음이 모든 것에 선행한다는 말씀이 있어요.

 

그런 다음 부처님은 또 만약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 과보가 따르기를 마치 수레바퀴가 황소를 따라가듯 할 것이라 하셨어요. 소가 수레를 끌 때 소가 어디로 가든 무거운 수레가 소를 따라갈 겁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청정치 못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면 그 과보가 우리를 따라온다는 말씀이죠. 물론 선행의 경우는 반대의 결과가 오겠지요.

 

선의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면 그 경우는 소를 따라가는 바퀴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림자에 비유됩니다. 그림자는 우리가 어딜 가든 따라오지만 우리에게 부담이 되진 않지요. 그 것이 선행설명에 사용된 비유법입니다.

 

 

 

 

법구경

원인

진행

결과

1번 게송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 과보가 우리를 따라 오듯

고통을 받는다

1번 게송

선의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면

그림자가 따라 오듯

부담이 안된다

 

 

 

 

법구경 1번과 2번 게송 빠알리 챈팅

 

 

 

음성

가려뽑은 법구경 46게송( 08-hymn-08.mp3, Forty-six Verses)에서

 

챈팅가 ;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Visarad Srima Ratnayaka)

 

 

  

 

법구경 1-2 게송

 

 

1

Manopubbagamā dhammā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ṭṭ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ā ce padu
ṭṭhena                  마나사- 체 빠둣테나

bhāsati vā karoti vā                        -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
dukkhamanveti                따또 낭 둑카만웨띠

cakka'va vahato pada           착캉 와 와하또 빠당

 

 

2

Manopubbagamā dhammā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ṭṭ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ā ce pasannena                  
마나사- 체 빠산네나

bhāsati vā karoti vā                         -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
sukhamanveti                  따또 낭 수카만웨띠

chāyā'va anapāyinī.                        -- 와 아나빠-이니-

 

 

 1.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둑카가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2.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해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행복이 뒤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아꾸살라(Akusala)와 꾸살라(Kusala)

 

이런 라인으로 생각할 때 행위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 가지 구분이 있어요. 그 중요한 두 가지는 건전한것과 건전하지 못한것또는 지혜로운것과 지혜롭지 못한것입니다.

 

이 두 가지 행위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빨리어 경전에서는 건전하지 못한 행위는 ‘Akusala(아꾸살라)이고,  건전한 행위는 ‘Kusala(꾸살라)라 합니다. 그러니까 kusala가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wholesome, skillful)이고, Akusala는 건전치도 지혜롭지도 못한(unwholesome, unskillful)겁니다.

 

어떤 행동은 건전하고 지혜롭다하고 어떤 행동은 불건전하고 지혜롭지 못하다하지요. 그런 구분은 마음이 어떤 상태냐에 달렸어요.

 

어떤 행동을 탐진치로 행할 때는 불건전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됩니다. (lobha)집착과 갈애를 말하고, (dosa)분노와 혐오’, (moha)어리석음 미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집착(attachment)’ ‘어리석음(delusion)’ ‘분노(aversion)’를 가지고 행동할 때 그 행동은 건전하지 못해요.

 

불교적 분석에 의하면 평범한 사람의 마음은 이런 탐진치에 매어 있어요. 불교 가르침에 의하면 누군가 마음 속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그는 해탈한 사람이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이 그 것이지만 평범한 마음의 상태에는 이런 것들이 존재해요. <Kusala>과 악<Akusala> 이런 구분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가르침에서 자주 사용하는 구분법을 소개하지요.

 

 

 

아꾸살라와 꾸살라

구 분

내용

행동

상태

아꾸살라

(Akusala)

건전치도 지혜롭지도 못한 것

(unwholesome, unskillful)

탐진치로 행할 때

집착,어 리석음,분노에 사로잡힌 사람

꾸살라

(Kusala)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

(wholesome, skillful)

탐진치로 행하지 않을 때

해탈한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

 

 

 

 

뿐냐(Puñña)와 빱빠(Pāpa)

 

뿐냐(Puñña)와 빱빠(Pāpa)가 있는데요. 빱빠는 악행(evil action)을 의미하고 뿐냐는 선행을 또는 불교용어로 공덕행(meritorious deeds)’을 의미해요. 그래서 뿐냐와 빱빠 선행과 악행의 분류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차이도 있지요.

 

뿐냐 즉 선행을 말할 때는 중생의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우리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좋은 일은 중생의 삶 안에서 이해해야 해요.

 

예를 들면 제가 스님들께 공양을 대접하면서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길 기대합니다. 잘 살펴 보면 이 행위 자체는 무집착에서 나오죠. 무엇을 보시하든 그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을 남에게 주고 나면 내가 그만큼 희생하고 내게서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 만큼의 너그러움과 무집착이 있는 거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천국에 태어나리라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리라는 큰 기대를 하죠. 그 것이 다시 집착의 한 측면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집착이라는 맥락 안에서 우리는 약간의선행을 하는 겁니다. 직접적 행동은 보시에 의해 이루어지죠. 하지만 그 보시에는 모종의 장기적 기대가 있어요.

 

종교적 보시와 정치헌금

 

사람들은 흔히 많은 선행을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선행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 해요. 보상을 원하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운동에 큰 돈을 기부하면 비록 그 것이 자신의 돈을 내어놓는 무집착을 요한다 해도 선행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반면 그 정치가가 권력을 잡으면 우리는 그에게 상당한 것을 보답으로 기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적 행위는 달라요. 제가 내생에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희망으로 승가에 공양할 때 그 것은 평범한 방식으로 우리의 부를 사용하거나 낭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Kusala뿐냐행을 구분해요. Kusala행은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탐진치가 없이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뿐냐 행은 궁극적으로 윤회하는 중생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적 삶 안에서 애쓰는 거지만 중생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면 무언가 필요해요.

 

빱빠는 물론 악행이지만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고 큰 차이는 없어요. 빱빠를 행할 때마다 마음이 이런 선하지 못한 것들에 사로잡히지요. 그래서 빱빠와 Akusala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뿐냐와 Kusala에는 미세한차이가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더 잘 알기 위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나 아라한의 행동은 Kusala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보시를 함에 있어 바라는 것

구 분

내용

보시

상태

빱빠

(Pāpa)

악행

(evil action)

보상을 원함

(정치헌금 같은 것, 따라서 보시가 아님)

지혜롭지 못한 행동,

Akusala와 별 차이가 없음

뿐냐

(Puñña)

공덕행

(meritorious deeds)

모종의 장기적 기대

(스님들께 공양대접하며

천상에 나기 바람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것,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이해

 

 

 

 

부처나 아라한은 왜 절대공덕을 짓지 않을까

 

부처나 아라한의 전체 행동은 탐진치가 하나도 없고 그들은 이런 뿐냐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비롭겠지만 그들의 행동은 중생적 삶을 위해 절대 공덕을 짓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하겠지만 어떤 기대도 없이 Kusala행동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도 때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익명으로 좋은 일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런 경지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모든 욕망을 다 끊었다는 의미는 될 수 없어요.

 

물론 우리는 어떤 행동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무 것도 세상에 기대하지 않고 어떤 인정을 받으려는 의도도 없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일관성있게 하진 않지요.

 

반면 깨달은 사람을 보면 그의 행동은 온전히 ‘Kusala이에요. 그의 행동이 Akusala행인 경우는 없어요. 당연히 빱빠는 없고 심지어 뿐냐도 없어요. 동일한 행동을 보통 사람이 했다면 당연히 뿐냐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깨달은 사람의 행동은 뿐냐의 범주에 해당될 수가 없어요. 즉 우리가 뿐냐를 행할 때 우리는 여전히 중생의 삶 안에 있고 그 삶이 매우 편안합니다.

 

그런데 Kusala행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중생의 삶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런 행동은 중생의 삶을 연장시키지 않아요. 때로 이 것은 감옥에 있는 것에 비유됩니다. 우리는 그 감옥을 장식하거나 편안하게 만들려 애씁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는 감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아무리 그 곳을 편안하게 만들려 애쓴다 해도 뿐냐는 그런 것과도 같아요.

 

 

 

깨달은 사람과 보통사람

구 분

내용

 

  

상태

꾸살라

(Kusala)

건전하고 지혜로운 행동

(wholesome, skillful)

부처나 아라한의 전체 행동,

깨달은 사람

 

빱빠는 없고 심지어 뿐냐도 없음.

절대 공덕을 짓지 않음

해탈

뿐냐

(Puñña)

공덕행

(meritorious deeds)

중생의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것,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이해

윤회의 감옥

 

 

 

여러분은 윤회의 감옥 안에 있어요. 물론 뿐냐와 함께 그 삶은 편안하지요. 하지만 Kusala행은 여러분이 윤회를 넘어 해탈로 가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이 Akusala와 빱빠 라는 이 두 가지를 불교전통에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해요. 우리의 모든 Akusala행은 물론 빱빠 행이고 빱빠행은 Akusala행이니까요. 그러므로 차이는 Kusala와 뿐냐에만 있어요.

 

뿐냐는 궁극적으로 장기적 욕망등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 것이 의미예요. 자 이 것이 업에 대한 불교적 생각이고 윤리적 행위에서 분석되는 방식입니다. 과보 등의 측면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업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더 보죠.    

 

브라만이 되려면

 

업은 기본적으로 입니다. 불교전통에서 인간은 그들의 행동으로 규정됩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우리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 우리에게 속한 것이 업이라 분명히 말씀하셨고 업은 우리의 행동이며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라 하셨어요. 그러니까 행동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이 것을 말씀하신 맥락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낮은 카스트와 높은 카스트로 태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신 겁니다.

 

부처님 당시엔 계급 구분이 심했어요. 그래서 사회는 4계급으로 나뉘었지요. 브라만이 가장 높았고 무사계급 다음이 상인 및 사업가 마지막으로 사회 밑바닥 계층인 수드라 즉 불가촉천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아무도 탄생으로 브라만이 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브라만과 힌두 가르침에 의하면 브라만이 되려면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야 했지요. 그저 그런 가문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브라만이 되는 거예요. 역으로 수드라 가문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불가촉천민이 되지요.

 

그 것이 심한 영향을 사회에 미쳐 만약 제가 불가촉천민인 경우 종교생활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금지돼 있지요. 부처님은 고로부터의 해탈이나 자유는 적합한 정신적 태도만 가진다면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자유에 관한 한 카스트 제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죠.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행동 즉 업으로 브라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높은가 낮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의 행동 업에 의해 결정된다는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제가 지난 강의에서 논의한 무아개념의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브라만이 되는 방법

구 분

사성계급

비고 

브라만

태생적으로 결정됨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야 브라만이 됨

불교

탄생으로 브라만이 되지 않음

우리의 행동 즉 업으로 브라만이 될 수 있음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따로 분리할 만한 영구적 본질이 없다고 하죠.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겁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지? 불교는 그의 행동 하는 것을 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좀 더 일상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분은 저를 선생이라 생각하겠지만 저는 지금 가르치기 때문에 선생이 된 것이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선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이라는 제 정체성은 제가 가르치는 한 존재하고 연사라는 제 정체성은 제가 말을 하는 한 존재해요. 우리는 정체성을 몇 개나 가지고 있을까요? 실은 다수가 있어요.

 

여기서는 제가 연사고 여러분은 청중입니다. 이런 역할은 쉽게 바꿀 수 있어요. 그리고 한 시간쯤 후 여러분이 귀가하면 일부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가 되겠지요. 우리는 역할을 계속 바꾸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영원한 정체성은 없다고 합니다. 정체성은 우리가 하는 역할에 달렸어요.”

 

 

우리가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해요. 이 개념이 부처님 가르침에서 매우 깊이 강조되고 있어요. 그 이유는 불교에서 그 어떤 종류의 영원한 정체성도 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결국 우리가 하는 일에 달렸어요. 이런 개념을 좀 더 확장하면 이런 질문이 나오죠. 불교에 의하면 누가 좋은 사람인가? 좋은 사람은 행동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가끔씩 높은 행동을 하는 사람, 자주 높은 행동을 하는 사람

 

좋은 사람은 탐진치가 없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은 탐진치 같은 것에 휘둘립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 분명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선자도 악자도 없어요. 이미 말했듯이 우리 대부분은 매우 높은 수준의 행동을 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가끔씩, 어떤 사람은 자주 높은 행동을 합니다.

 

부처나 해탈한 사람은 이런 요소들이 전혀 없이 행동할 겁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의 행동은 선해요. 탐진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 관한 한 그런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가끔뿐입니다.

 

 

해탈한 사람과 보통사람

구 분

 

비고

부처나 해탈한 사람

 

탐진치가 없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탐진치 없이 행동을 하므로 기본적으로 선함.

자주 높은 행동을 함

보통사람

좋은 사람

탐진치가 없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영원한 선자도 악자도 없음.

가끔씩 높은 행동을 함.

나쁜 사람

탐진치 같은 것에 휘둘리는 사람

 

 

 

하지만 불자로서 우리의 목표는 마음에서 그런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우리 행동에 그런 것들이 결여된 상태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전통에서 말하기를 인간에게 영원한 정체성이 없다는 겁니다.

 

무아의 교리를 가르칠 때 실은 불교는 우리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을 주는 겁니다. 우리가 아트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해도 불교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윤리적인 사람인가 아닌가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는 그 점에 달렸지요. 이제 업의 결과를 논의해 보죠. 업의 과보라는 이 현상은 매우 중요해요.

 

모든 것이 과거의 업에서 비롯 되었을까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이미 말씀 드렸듯이 업의 이론을 믿었습니다.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 행동의 결과 즉 과거 업에서 비롯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므로 모든 것이 숙업에 따라 일어나요.

 

예를 들면 모든 자이나 교도들도 모든 것이 과거의 업에서 비롯한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부처님은 모든 것이 숙업 탓만은 아니라고 하셨죠. 현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숙업으로 해석할 수 만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관점의 문제는 우리가 현생의 모든 문제가 숙업으로 인한 것이라 믿을 때 그 것은 심각한 결정론이 된다는 겁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과거 행동으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현재 행동에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나의 현재 행동은 과거 행동의 결과겠지요.

 

그렇다면 나의 행동에 어떻게 도덕적 책임을 지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거기서 피할 길이 없다면 내겐 도덕적 책임이 없겠지요.

 

부처님은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 우리가 현생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과거 업의 결과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과거 업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은 과거 업의 결과지만 모든 게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다시 말해 이런 업의 결정론, 결정적 힘으로서의 업은 불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아요.

 

 

업은 특히 과거의 업은 하나의 중요한 힘일 뿐 절대적 힘은 아닙니다.”

 

 

과거 업이라는 의미는 과거 생에 속하는 거죠. 좀 더 일상적 의미로 업을 이해하고 싶다면 주어진 시간대에 우리 행동을 보는 게 중요해요. 윤리적 의미가 아니라 평범한 자연주의자의 의미로 말하는 겁니다.

 

 

 

 

브라만이 되는 방법

구 분

업의 성격

결정론

비고

자이나교

모든 것이 과거의 업에서 비롯한다고 믿음

결정론

과거 행동으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현재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음.

도덕적 책임이 없음

불교

숙업 탓만은 아님

결정론으로 받아 들이지 않음

과거의 업은 하나의 중요한 힘일 뿐 절대적 힘은 아님.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려면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려면 개개인의 과거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대학에 다니는지 아닌지는 내가 공부를 했는지 안 했는지에 달렸지요. 내가 오늘 건강한지 아닌지는 지난 수 년 동안 내가 어떤 행동이나 운동을 하고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에 달렸지요. 즉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의 총합임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 행동의 총합으로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나의 미래 건강상태는 내가 오늘 섭취하는 음식이 결정합니다. 앞으로 이삼 년 내로 내가 특정 질병에 걸린다면 그 것은 우연이 아니라 내가 오늘 그 병을 키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거죠. 미래에 어떤 종류의 건강을 내가 생각하느냐는 나의 행동 방식에 달려있어요. 내가 운동을 하는가 유익한 음식을 먹는가 등에요. 그런 의미에서 업은 결정적 요인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자 원하는가가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과 사회 역시 중요해요. 어쨌든 나의 행동은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제가 여기서 지적하려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업 행동이 결정적 요소이며 결정적 요소로서 행동 역시 내 책임이라는 거죠. 내게 누가 전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고요. 최소한 어느 정도는 내가 통제를 하고 있어요.

 

물론 사회가 내게 강요를 하고 사회적 환경적 조건이 힘을 미치니 나는 그런 것들의 지배를 받아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중에 행위자로서의 나라는 중요한 요소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게 그런 자유가 있지요.

 

 

불교는 업을 결정 요소로 말하지만 업은 행위자가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에요.”

 

 

그는 힘 없는 피해자가 아닌 겁니다.

 

내세를 결정하는 요인

 

이제 도덕적 상황을 한 번 보지요. 제가 여러분 중 누군가를 반복해 비난하고 학대하고 탓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의 행동은 여러분이 저의 적이 될 조건을 제공한 겁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가능하죠. 당신은 제게 물리적 공격을 가할 수 있어요. 죽이려 들거나 유해한 일을 하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제가 그런 조건을 제공했기 때문이지요.

 

가령 제가 여러분을 매우 잘 대하고 항상 친절하고 자비롭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는 어떤 조건을 제공하는 걸까요? 당신이 저를 친절하게 대할 조건이지요. 이 것이 업과 과보입니다. 조건에 따라 당신이 받는 거죠. 그래서 업이 연기적 현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조건을 제공하고 그 조건이 당신이 미래에 받을 것들을 결정합니다. 여기에 신비는 없어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당신이 당신의 미래 과보를 결정하는 겁니다. 도덕적 행동 역시 그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지만 처음에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도덕적 행보의 과보가 이생에만 국한되지 않고 내생에 계속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잘 모르는 곳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해도 그에 따라 내가 내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해요. 나의 미래 탄생으로 연장될 수 있다는 거죠. 만약 제가 나쁜 일을 하면 그 역시 미래 생으로 연장됩니다. 가능성이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 역사를 이해하듯 비유적으로 부처님은 우리가 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내가 지난 생에서 50 - 60년 동안 행동한 것의 결과이듯 나의 미래 생 역시 과거 행동의 결과입니다.

 

숙명통이 없어도

 

불교에 의하면 지난 50여 년만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지요. 이런 측면은 평범한 지혜로는 볼 수가 없지요.

 

깨달음을 이룬 사람은 특정의 지혜를 증득하는데 그 중엔 과거 생을 보는 능력도 포함돼요. 그 때는 업을 주동적으로 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보이겠지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아요.

 

실은 부처님은 그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업을 현재의 상황에 따라 이해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나머지는 유추하여 알 수 있다고요. 현생을 보면 업이 어떻게 작용해 왔는지 알 수 있어요.

 

만약 제가 여러분을 나쁘게 대한다면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당할 조건을 만드는 겁니다. 그 것은 내가 내 행동을 통해 상황을 바꾸도록 우주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상황은 여러분이 제게 악행을 하든가 또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저의 악행으로 인해 우주의 성격이 바뀌거나 제가 그 주파수를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일하고 사람들이 자비로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도 있지요. 그 것이 우리 행동을 통해 우리 우주를 만드는 방식이죠.

 

불교에서는 상벌을 말하지 않는다

 

과보가 생기는 방식은 자연히 이해할 수 있어요. 악업은 자연히 악과를 낳고 선업은 자연히 선과를 맺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상벌을 말하지 않아요.

 

많은 종교에 선행을 하면 보상을 받고 악행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상벌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요. 상벌을 이야기 할 때마다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어떤 사람이나 힘을 가정해야 하니까요. 실은 상도 없고 벌도 없어요.

 

물론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는 있지요. 얼마나 좋고 나쁜가는 우리가 제공한 조건에 달려있죠. 다시 말해 우리가 나쁜 일을 당한다면 그 것이 올 조건은 나만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만약 내가 좋은 일을 당하면 그 역시 내가 제공한 조건에 따라 온 겁니다. 그러니까 책임은 나한테있는 거지요. 그래서 상벌을 말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즉 현명하지 못하게 행동하면 나는 악업으로 인해 악과를 얻을 길을 여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선행을 한다면 변화가 있겠지요.

 

연쇄살인범 앙굴리말라의 열반

 

예로 앙굴리마라의 이야기를 볼까요. 그는 연쇄살인범이었지요. 그런데 부처님이 그를 만나 바꿔 놓으셨어요. 앙굴리마라는 순결한 사람으로 바뀌었고 이 후 살인을 그치고 비구가 되었어요. 수행을 잘해 아라한이 되었답니다.

 

이제 그가 행한 살인은 어떻게 되지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비록 아라한이 되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던진 돌마저 그에게로 와 그를 맞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열반을 얻고 입멸한 후엔 모든 것이 끝났어요. 그 것이 윤회의 끝이었으니까요.

 

이 것은 당신의 현명한 행동에 의해 악업이 과보를 가져올 기회를 주지 않은좋은 예에 속합니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궁극적으로 현재 행동이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수용하고 있어요. 이 것은 매우 중요한 불교의 사상입니다. 사람들이 극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나쁘다고 간주된 사람도 매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을 불교에서는 높이 평가합니다.

 

앙굴리마라는 좋은 친구였던 부처님을 만나 완전히 다 변하게 되었어요. 만약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악인으로 남았겠죠. 그가 완전히 변한 것은 선우를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런 요인이 있지요. 그런 요인 덕분에 사람들은 변합니다. 그러니 변화는 가능해요. 더 좋아질 수도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생사의 두 개 사건사이에 차이가 없다

 

마지막으로 업과 재생을 살펴봅시다. 업은 어떻게 재생이 일어나는지와 관계되어 있어요. 환생이 일어나는 방식은 중요한 일입니다만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요. 불교에서는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고 얘기하지만 그 방식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평범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그런 지식이 있어요. 그 지식을 통해 자신의 과거생을 볼 수 있지요. 다른 사람의 과거생도 보여요.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볼 수 없어요. 불교에서는 재생을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로 미루어 이해합니다.

 

이 전 강의에서 다섯 무더기 오온을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색<물질적 형태> <감각> <인식> <행동> <의식>의 오온이 끊임없이 함께 작용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런 것들에 따라 쉼 없이 기능합니다. 이런 기능을 멈출 브레이크는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도 단지 물질적 신체만 기능이 멈출 뿐 심리적 과정은 또 다른 몸에 들어가그를 기반으로 하여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초기 불교 가르침에서 실은 생사의 두 개 사건사이에 차이는 없습니다.

 

그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여러분이 듣는 지금 이 순간도 이 다섯 무더기는 그침 없이 기능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기능할 것입니다.

 

죽음, 매순간 늘 일어나는 그침없는 과정

 

사망 시 물질적 신체는 다른 측면들을 더 이상 뒷받침할 수 없지만 다음 생각의 순간 기능은 다른 신체를 기반으로다시 시작됩니다. 가르침 특히 논서에서는 우리가 매 순간 즉석에서 죽고 있다고 말합니다.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침 없는 연결된 과정이 진행되고 있어요. 이런 연결은 실은 파괴되는 법이 없지요. 예로 자신을 한 번 살펴볼까요?

 

우리들 누구도 이 세상에 이런 모습으로 오지 않았어요. 모두 올 때는 갓난 아기로 왔지요. 갓난 아기의 순간에서 오늘날 20 30 40 50 60살이 된 우리를 볼 때 우리는 태어난 그 때와 같은 사람인가요? 아니죠. 지금 사진과 태어났을 때의 사진을 비교하면 우린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한편 다른 사람도 아니에요. 이 것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그침 없는 연속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거죠. 제가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이 것이 제가 태어났을 때의 사진입니다 라고 말할 때 저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연속된 과정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불교는 다음 생에도 그리고 윤회가 계속되어도 이 것이 정확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여기 갓난아기로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선가 죽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연관성은 누군가가 이 것이 나의 과거 생이다 라고 말할 때 그 것은 그친 적이 없는 연속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말씀 드리려는 것은 업과 재생입니다. 재생은 그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이 생에서 자비롭고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업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제가 이 생에서 죽을 때 저는 누군가요? 저는 제 행동의 총합이지요. 저의 내생은 제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어요. 제가 이 생에서 자비롭고 좋은 사람이었다면 내생은 아마 좋을 겁니다. 누구도 100% 장담은 못하죠.

 

하지만 제가 내생을 위해 제공한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그 것과 반대로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제공한 조건들에 달린 일이지요. 그래서 불교는 도덕적 행동이 중요해요. 실은 경전에 매우 중요한 사례가 나와 있어요.

 

한 때 아난다는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어요. 부처님! 아무개가 죽었는데 그는 어디서 태어나나요? 그러자 부처님은 어디 어디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후 아난다는 두어 번 더 부처님께 가서 다른 죽은 사람들에 대해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말씀하셨어요. 아난다! 누군가 죽을 때마다 너는 내게 와서 그가 어디 태어났느냐고 묻는데 내가 힘들구나. 그러니 오늘 그 것을 결정하는 법을 알려주마.

 

 

너 자신을 거울로 사용하여 거울을 보듯 그 사람을 보고 너 자신을 보아라. 그리고 거울에서 너 자신을 보아라. 마찬 가지로 네가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보아라. 그에 따라 너는 그가 어디 태어날지 알 수 있다.”

         

 

재생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재생의 개념이 불교개념이 아니고 부처님도 그리 믿지 않았다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불교전통에서 업과 재생의 연관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불교사회가 그 것을 믿어왔어요.

 

저는 지난 2000년간 그 것을 믿어온 수 백만 불자들이 다 틀렸다고 생각지 않아요. 물론 불교에선 이 것이 범상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것을 무작정 믿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불교는 말합니다.

 

 

현재 당신의 행동을 보라. 당신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이 후 그 조건에 따라 당신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하신 말씀은 우리가 나쁜 것을 제거하고 그 반대의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렸듯이 평범한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한 번에 다 없앨 수는 없어요. 하지만 노력하면 좋은 것을 발전시켜 가끔씩이라도 나쁜 성품을 극복할 수 있어요.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상가교수에게 삼배를

 

이상 아상가 교수의 강의를 한 글자도 빠뜨림 없이 옮겼다. 그리고 표를 만들어 이해를 돕고, 주옥 같은 문구는 청색처리를 하였다. 이제까지 그 어느 누구의 법문에서 듣지 못하던 귀중한 법문을 해 주신 아상가 교수님에게 이름 없는 네티즌이 삼배를 올린다.

 

 

 

2010-10-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