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이즘(Hinduism) 속으로 사라진 불교
열반이라는 업을 짓지 말라는데
“우리는 열반이라는 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아침 불교방송의 경전공부시간에 들은 말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오직 이 한 마디 밖에 들어 오지 않았는데 대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전공부를 진행하고 있는 스님은 대승기신론에 이어 ‘원각경’을 강의 하고 있다. 불교방송의 경전공부는 아침 5시35분에 시작 되는데 오직 스님들이 진행하는 프로로 알고 있고, 내용은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같은 한문대승경전위주이다.
반면에 6시에 진행하는 ‘불교강좌’는 교수나 재가수행자 또는 제종단의 담당자들이 진행 하는데 매우 다양한 주제를 강의한다. 지금은 재가수행자인 묘원법사가 진행하고 있는데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를 거의 1년 째 강의하고 있다.
이처럼 두개의 경전공부와 불교강좌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경전공부가 주로 대승불교의 이념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불교강좌의 내용은 대승에서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는 ‘위빠사나’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강의를 들어 보면 너무나 비교가 된다.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스님
한편에서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또 한편의 강의에서는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아나 영혼을 부정하고 ‘무아’를 주장함에도 불구 하고 원각경강의를 진행 하는 스님은 ‘영혼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글을 스님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의 청취자게시판에 올려진 스님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불교에서는 '영혼의 소멸' 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2010-9-15 일자 경전공부 청취자 게시판)
스님은 분명히 영혼의 소멸이 없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예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 붙이고 있다.
우리가 뭔가를 생각해서 배곺으면 밥먹을 줄 알고,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을 줄 알고
슬프면 울 줄알고 고마우면 감사해 할 줄 아는 그 아는 당체를 영혼이라는 말대신 불교에서는
언제가는 부처를 이룰수 있는 착한 성품을 가진 '불성' 이라고도 말하고, 혹은 일체 만물 속에서
생존 했다가 없어진 듯 했다가 봄이되면 다시 싹이트고 잎이나서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어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 되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켜서 '온 우주 법계의 자체의 성'이라고 하여 줄여서 '법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사람 즉 유정물에게 있을 때는 '불성'이라 말하고, 무정물 들에게 있을 때에는
'법성'이라고 말합니다.
(2010-9-15 일자 경전공부 청취자 게시판)
영혼은 분명히 있는데 그 것을 불교에서는 ‘불성’이나 ‘법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성이나 법성은 항상 있는 것이어서 결코 소멸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받아 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업을 짓지 말자고 말하고 ‘열반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종욱 교수의 ‘공(空)’에 관한 강의
열반이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로지 열반이라는 한 길을 위하여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등 8만4천법문을 설하였는데 열반이라는 것이 단지 업(業)에 불과 하고, ‘열반은 없다’라는 취지의 말은 분명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승불교 선사들은 왜 역사적 부처님인 사꺄무니 붓다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일까. 그 시초는 어디에서 시작 되었을까. 불교tv의 김종욱교수의 강의를 들어 보았다.
동국대 김종욱교수의 강의는 들을 만 하다. 그와 같이 좋은 프로는 항상 메인에 올려 놓으면 좋으련만 찾아 보기 힘든 종영프로그램에 들어가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찾기 힘든 김종욱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09)강좌 중 ‘공(空)’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불교가 왜 어렵다고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가 어렵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장서와 차원 높은 교리는 불교를 모르는 보통사람들 뿐만 아니라 불교인들까지 ‘주눅’들게 만든다. 더구나 선사들의 알듯 모를 듯 한 ‘선문답’을 보면 불교는 현실의 삶과 괴리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불교가 이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요인으로 ‘한문경전’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경전은 대부분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승경전이다. 번역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한문투의 글은 여간 읽기가 쉽지 않고 그 표현 또한 천년전에 사용 되던 것이라 현실의 언어와 맞지 않는다. 더구나 한문은 경전상에만 존재하는 죽은 언어이다. 이는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 원전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영어로 읽는 대승경전이 더 와 닿을 수 있다. 한문과 달리 영어는 살아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어렵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요인은 중관이나 유식과 같은 대승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상체계이다. 보통불자라면 중관이나 유식에 대하여 접해 본 경험이 없어서 불교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중관이나 유식의 본 바탕이 ‘공사상’에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공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보통불자들이 공에 대하여 잘 모르다 보니 불교는 어려운 것이라 여기고 그저 믿고 따르는 ‘신앙의 불교’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공사상은 어떻게 성립 되었을까.
대승불교가 일어난 또 하나의 요인
공사상의 성립을 알아 보기 전에 우선 대승불교가 출현한 배경에 대하여 알아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승의 출현시기를 기원 전후로 보고 있다. 출현하게 된 이유는 여려가지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부파불교가 출가자 중심으로 전문화 되어 가는 것에 대한 반발로 본다. 그래서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 나는데 이는 역사적인 부처님인 사까무니 붓다에 대한 ‘동경심’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처럼 붓다에 대한 동경심은 후대로 내려 올 수록 ‘초인화’ 되고 ‘신격화’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 있는 사실은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난 요인 중의 하나가 ‘힌두이즘’하고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권오민교수가 번역한 인도불교사(경서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힌두이즘 형성에 즈음하여, 혹은 자극을 받아 불교 내에서도 B.C2세기 무렵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인도불교사, 권오민교수 역, 경서원)
대승불교가 일어난 요인이 단순히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때문이 아니라 브라만교의 후신격인 힌두이즘의 등장에 자극 받아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종교이다. 그러나 힌두교가 브라만교를 계승하여 발전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힌두이즘이 성립된 것은 불교가인도에서 주류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브라만교가 불교에 밀려 종교로서 존속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으로 성립된 것이 힌두이즘으로 보는 것이다.
힌두이즘은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아뜨만사상과 범아일여사상을 비판 하였다. 이렇게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일어 선 것이 불교이다. 그런 불교는 마우리야 왕조(B.C 4~2세기)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불교가 크게 발전한 이유는 부처님이 무사계출신으로서 같은 왕족세력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교역을 담당하는 도시자산가출신들과 같은 새로운 세력의 지원이었다.
이처럼 불교가 강력해지자 브라만교는 크게 약화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력이 상실 된 것이 아니었다. 지방이나 농촌은 여전히 브라만 세력의 기반이었는데 마우리야 왕조가 망한 이후에 다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 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지역의 민속신앙과 습합되어 오늘 날 볼 수 있는 힌두이즘이라는 독특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힌두이즘의 중핵은 크게 두가지로 본다. 하나는 일신교적인 ‘비쉬누(Vishnu)’신의 숭배와 또 하나는 원시적인 모든 신앙이 결집된 ‘쉬바(Shiva)’신 숭배이다. 바로 이점이 브라만교와 다른 것이다.
진공청소기 같은 힌두이즘
힌두이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아마도 모든 사상을 흡수해 버리는 진공청소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화신(化身)’사상을 들 수 있다.
화신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바타라(avatara)’라 한다. 현재 사이버상에서 캐릭터로 사용하고 있는 ‘아바타’와 같은 말이다. 아바타는 보통 비쉬누의 화신을 말하는데 수 없이 많은 화신의 종류가 있지만 그 중 10가지로 요약 된다.
①물고기(Matsya), ②거북이(Kurma), ③멧돼지(Varāha), ④인사자(人獅子:Narasiṁha) ⑤난쟁이(Vamana), ⑥영웅 빠라슈라마(Parashurama), ⑦라마(Ramā;Ramāchandra), ⑧ 목동의 신 끄리슈나(Kṛṣṇa), ⑨붓다(Buddha), ⑩ 예언자적인 구제자 깔낀(Kalkin)
특이한 것은 10가지의 아바타 중에 ‘붓다(Buddha)’도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일신인 비쉬누의 아홉번째 화신을 붓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힌두이즘은 유일신의 신앙을 설하면서 그 안으로는 각종신앙을 흡수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화신사상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힌두교발전의 ‘유력한’ 무기라 볼 수 있다.
한편 쉬바신앙은 모든 토착신들을 모두 흡수해 버린다. 원시적 모든 신앙 이를테면 생식기, 모신숭배, 정령숭배, 산신등 모든 토착신앙의 혼합물이 쉬바신앙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쉬바 신앙은 대승불교의 종착지인 밀교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진 불교
인도에서 힌두이즘과 대승불교는 모두 비슷한 시점에서 성립되었다. 힌두이즘은 불교의 발전에 자극받아 성립되었고, 대승불교는 힌두이즘 형성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립된 경향도 있다.
이처럼 서로 자극받아 성립한 두 종교의 초기는 모습이 달랐지만 후대로 내려 갈 수록 그 구별이 모호 해졌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금강승불교로 발전 하였을 때 불교는 마침내 힌두화 되어 본질적으로 구분하기가 힘들어 진 것이다.
불교가 멸망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이슬람의 침입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불교는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힌두이즘화 되는 시초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공사상일 것이다.
비크라마시라( Vikramasila) 사원
다르마팔라(Dharmapala, 770-810)시대에 건립된 인도 최대의 사원.
인도불교 최후의 거점. 탄트릭 부디즘의 대학으로 알려져 있음.
1203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파괴되어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진 http://www.buddhanet.net/e-learning/pilgrim/pg_28.htm
인도불교사에 있어서 대승불교의 공사상은 중관, 유식사상, 여래장사상으로 발전 되었고 힌두교와 거의 구별이 없어진 금강승(밀교)에서 조차 공사상은 교리의 근본을 이루고 있었다.
금강승에서 공성의 인식이 바로 지혜이고 이 지혜를 구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 하였다. 또 금강승에서 말하는 자성이란 금강과도 같은 견고한 ‘자아’와 ‘자성’을 말하는 데 이런 금강의 자성은 대승불교의 공성과 동일시 되어 일명 ‘공성승(空性乘, Sunyatayana)’이라고 도 불렸다.
이처럼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자아와 자성이 있다는 것은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법성, 진여, 본마음, 주인공과 같은 말이고 인도 불교의 여래장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상의 모든 출발점이 공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제압하려면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상이다. 공사상을 가장 잘 표현 하고 있는 경전이 반야경인데 6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반야경을 축약하여 핵심만 모아 놓은 것이 ‘반야심경’이다. 이 반야심경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공(空)’이 될 것이다. 공은 빈것이다. 그래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공을 설명하려면 먼저 역사적내지 교리사적 접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아와 연기라고 볼 수 있다. 무아가 없는 불교는 있을 수 없고 연기없는 불교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이처럼 무아와 연기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와 연기의 해석방법을 놓고서 대승이 출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파불교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는 설일체유부이었다. 이제 막 대승불교운동이 일어 날 시점에 대승불교의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 소수가 다수의 세력을 제압하려면 논리적 모순점을 찾아 내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공사상도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개발된 논리라 볼 수 있다. 바로 그것은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 된다.
설일체유부의 주장
대승불교에 ‘아공법공’이라는 말이 있다. 아(我)는 당연히 공한 것이고, 법 또한 공한 것이라고 해서 공사상의 핵심적인 논리를 말한다. 그런데 대승에서 소승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리중의 하나가 ‘아공법유’라는 것이다.
아공법공이나 아공법유나 공통점은 아는 공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아를 기본적 베이스로 깔고 가는 것이다. 만일 무아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모두 아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에 있어서 유부는 실유를 주장하고, 대승에서는 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법을 이루고 있는 요소, 즉 자성(自性)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모든 현상은 생성되고 소멸된다. 상호의존하고 조건지워져 생성소멸하는데 있어서 어떤 ‘요소(element)’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사상이다. 그 요소를 75법으로 본 것이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사기에 들어 있는 필름통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75개의 필름이 있어야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내용은 무상하고 영화 또한 이 극장 저 극장 옮겨 다니며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나오게 하는 필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상이 무상하고 무아라고 하더라도 오온이 존재 하듯이 기본적으로 75법이 실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75법이 존재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일체유부’라 한다.
또한 실유한다는 것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바로 75법만이 독립적으로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것이 부파불교시대에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주장이다.
공사상이 출현한 배경
후발주자인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유부의 주장을 깨뜨려야만 살아 남을 것이다. 그래서 유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잡은 것이 ‘자성’에 관한 것이다. 특히 문제를 삼은 것은 75법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체가 있다는 것은 연기법과 모순된다는 것이 대승의 견해이다. 연기라는 것이 수 많은 조건들과 상호의존성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인데 자기만 떨어져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자성과 연기가 양립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관학파의 주장이다.
자성=실체성=연기-à인정(설일체유부)
자성=실체성=연기-à부정(대승불교)
자성에 실체가 있다면 연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나온 사상이 ‘공사상’이다. 연기라고 하는 것이 관계성을 말하는데 고립된 실체성이 있다면 자성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자성이라 주장한다. 즉 다음과 같은 논리이다.
연기=관계성=무자성=공
무자성은 비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공(空)이라 한다. 비운다는 것은 공의 의미인데그렇다면 무엇을 비운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것이고,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고립된 실체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은 ‘연기적 관계성’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관학파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도식이 성립된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결국 중관학파가 비판 하고자 하였던 것은 연기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이처럼 연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부와 중관학파는 정 반대로 보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파 |
학설 |
내 용 |
설일체유부 |
아공법유 (我空法油) |
비록연기하지만 요소들은 실재하고 자성은 있다 |
중관학파 |
아공법공 (我空法空) |
바로 연기하므로 요소들은 실재하지 않고 자성은 없다 |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아공법유’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설일체유부와의 논쟁이었으나 지금도 남방 상좌불교를 폄하 할 때 사용하는 논법이 아공법유이다. 그러나 이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달리 법을 ‘찰나적’ 존재로 본다. 항상 실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고유의 성질을 갖는 ‘자상’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공상’, 이렇게 두가지 큰 특징으로 본다. 따라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경우 아공법유가 아니라 ‘아공법공’이 된다.
가시설(假施說)된 것, 쁘라즈냡띠(prajñapti)
중관학파의 주장대로 아(我)나 법이나 모두 공한 것이라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이 된다. 이 때 일체는 아나 법을 말하고, 개공은 유부의 75법 즉, 요소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관학파는 75법을 요소(element)로 보지 않고 단지 기능(function)으로 본다. 이처럼 요소가 아닌 기능을 보는 것은 오온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제법을 요소가 아닌 기능으로 보는 것은 수학의 함수(function)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제법이 x축과 y축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된 점이 아니라 x축과 y축 사이의 관계에서만 한 점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래프가 그려지는 방식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 설명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정된 요소(element)가 아니라 기능(function)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이나 75법 역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중관학파의 입장이다. 이처럼 서양식의 기능에 걸맞는 개념이 중관학파의 ‘프라즈냡띠(prajñapti)’이다.
이 프라즈냡띠를 한자어로 표시하면 ‘가(假)’라 번역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시설(假施說)’이다. 이때 가(假)는 가짜가 아니다. 잠정적이라는 것이다. 임시로 설치해 놓은 가건물 같은 것이다. 그 가건물은 가짜 건물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임시로 세워 놓은 건물을 말한다. 50층짜리 빌딩을 지을 때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 식당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가 다 공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공자신도 공한 것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이야기는 아든 법이든 모두 공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함수적 기능으로서 쁘라즈냡띠 즉, 가시설로서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있는 것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체가 모두 공한 것이라면 문자적으로 보아서도 그 모든 것안에는 공(空)도 포함되어야 한다. 즉, ‘공자신도 공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我法空 空亦復空(아법공 공역부공)
모든 것이 공이고, 또 공이어서 모든 것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공 역시 공한 것이다.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고, 공도 공한 것이다. 이렇게 계속 공으로 나가면 ‘허전’하게 된다. 이렇게 모든 것을 비워 나간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의 작용은 이렇게 진행 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미음의 작용에 촛점을 맞추면 ‘유식사상’으로 가게 된다.
공가중(空假中) 삼제(三諦)
공도 공한 것이라면 그 공이란 무엇인가. 그 때의 공은 쁘라즈냡띠(가시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 맞다. 실상은 연기 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묘사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상은 가시설(쁘라즈냡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상이 공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 이들을 ‘무기공’ 내지 ‘공병’에 걸린 것으로 본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인데 가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라는 긍정이다. 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 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공과 가의 ‘중간 정도의 입장’이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고, 이 두가지 진리를 포괄하여 유무 양변을 떠나 중(중도)이라 한다. 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 이 공가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가지 진리’라 하여 3제라 하는데 다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
3제 |
진리 |
내 용 |
空 |
진제 |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의 입장 |
假(施說) |
속제 |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 |
中 |
중도 |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 |
제2의 석가, 나가르주나(용수)
공가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은 공이어야 한다. 공에 실체성을 부여 하면 안된다. 궁극적 경지에 대한 묘사나 개념 그것 조차도 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반야심경에서는 역사적 부처님이 설한 모든 진리가 공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모두 부정 되었다.
일체개공이기 때문에 ‘오온’도 공한 것이 되어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만들어 내는 ‘12처’와 ‘18계’도 부정되고, 심지어 부처님이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사성제’도 없는 것이 되고, ‘12연기’도 공 앞에서 부정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비워 나가다 보면 ‘진여’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사상을 확립하고 중론을 주장한 나가르주나(용수)를 제2의 석가라고 칭한다.
새로운 경전의 제작이 요구되어
나가르주나에 의하여 일단 종합정리된 대승불교는 교리의 발달과 함께 이를 적용할 새로운 경전의 제작이 요구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보살사상과 같이 새로운 사상을 위하여 별도의 경전이 편찬 되었는데 공사상이 확립되고 난후 새로운 교리를 설하는 여려 경전이 출현 하였다. 공사상과 관련된 대표적 대승경전은 다음과 같다.
대승경전 |
내 용 |
반야경 |
-대승불교의 교리의 기본을 설명하고 사상적 입장을 확립 -반야바라밀의 설명이 주된 목표 -반야바라밀의 진리를무소득과 공으로 표현 |
법화경 |
-반야경의 공사상을 기조로 하여 새로운 불타관을 확립 -부처의 입멸은 방편이고, 부처의 본성은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고 주장 -부처의 가르침은 구원실성의 법신불에 있음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은 방편이고 진실은 부처의 일승만이라고 주장 -법화경의 수지, 독송의 공덕 강조 |
화엄경 |
-반야경의 공사상에 입각하여 부처의 깨달은 세계를 보고 자내증(自內證)의 세계를 묘유로 표현 -여기에 나타난 세계는 비로자나불의 현현에 불과 하며, 일체존재는 중중무진의 연기로 바로 비로자나불이라 함. -삼계가 유심임을 관득해야 함을 강조 |
정토경전 |
-삼세시방제불(타방불)을 인정 -신앙의 불교로서 여러 부처님들에 대한 신앙과 구원을 설함 -깨달음이란 정토에 왕생하는 것으로 봄 |
정토경전의 경우 아미타불신앙이 있는데 이는 염불이나 칭명하는 것 만으로도 중생들은 극락왕생 할 수 있고 부처와 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순수하고도 간명한 신앙법은 인도불교사(권오민교수 역, 경서원)에 따르면 ‘비쉬누파’와 깊이 접촉하였을 것으로 보고 또한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본다.
학파로서만 남아 있는 불교
이렇게 공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경전을 결집한 대승불교는 ‘유식’과 ‘여래장’ 사상으로 발전 되었다. 모든 것을 비우라고 하였을 때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
공사상을 발전 시킨 중론이 법의 고찰에만 추구한 것과 달리 새로운 사상들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중점을 두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여래장 사상’과 마음의 현실적 기능 분석에 중점을 둔 ‘유식설’이 바로 그것이다.
여래장사상은 아뢰야식과 동일시 되어 유식설에 흡수 되었고 이후 유식설은 5~6세기에 대승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8세기 이후 창조력을 상실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 때의 불교는 초기의 대승운동 당시 비판의 대상이었던 부파불교 모습을 답습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의 불교는 오로지 ‘학파로서만’ 남아 있는 불교이었다.
7세기에 현장이 방문하였을 때 불교는 급격하게 밀교화 되었다. 밀교는 힌두교와 거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유사 하였는데 이 때 타라보살등 종래의 불보살외에 새로운 예배대상이 불교안으로 유입된 것이다.
반면에 불교에 타격을 받았던 브라만교는 민간신앙과 혼합하여 힌두이즘으로 부흥 하였는데 일신교적이고 동시에 범신론적인 힌두이즘의 영향으로 7세기 중엽부터 대승불교는 급격하게 밀교화 된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으로 부터 불과 5백년만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력화 시킨 공사상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 여래장 사상을 중국식 불교에 맞게 발전시킨 용어 개념이 ‘불성’이다. 일체사물에 대입하면 ‘법성’이라 한다. 따라서 여래장이나 불성이나 법성이나 진여는 공과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공사상 앞에 제법은 ‘공’한 것이 되고 만다. 그 것이 설령 부처님이 설한 진리인 사성제일지라도 반야심경의 표현대로라면 ‘무고집멸도’가 되고 만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도 부정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어떤 철학적 주장이나 궁극적 경지에 대한 설명도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한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방송의 경전공부 시간에 스님이 “우리는 열반이라는 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달라도 너무나 다른 불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같은 불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다른 불교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경전’이 서로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 또한 같지 않다. 초기불교에서 ‘4성제’를 강조한다면 대승불교에서는 ‘공가중 3제’를 내세운다.
대승불교에서는 영혼이라는 불생불멸의 존재를 ‘불성’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초기불교에서는 자아나 영혼은 없는 것으로 말한다. 만일 변치 않는 자아나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존재 한다면 열반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다. 열반에 들기 위해서는 제법이 생멸해야 하는데 오로지 ‘한마음(一心)’이라면 끊어 지지 않기 때문에 결코 열반은 성취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여 또는 불성과 합일 하는 경지의 대승불교와 열반이라는 목표를 가진 초기불교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불교이다.
2010-10-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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