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가 허망하다고? 현응스님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를 읽고
불교평론에서
조계종 교육원장 자리는 정부의 예를 든다면 ‘교육부장관’과 같은 자리이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이 재가불자를 포함한 불교인의 교육이 아니라 ‘스님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처럼 중요한 자리에 있는 스님이 불교평론에 글을 발표 하였다.
불교평론은 계절마다 간행 되는 대표적인 ‘고품격’ 종합불교평론지이다. 주로 대학교수나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이 발표 하는 논문을 발표 하는데, 잘 다듬어진 글을 읽다보면 지식욕을 충족시켜 줄 정도로 정신세계를 풍만하게 해준다.
그런 글 중에 불교평론 2010년 가을호에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99)’ 에 관한 논문을 읽었다.
초기불교는 허망하다는데
스님은 논문에서 “기본불교는 허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삶을 살아가는 불교’라고 말하였다. 스님이 말하는 허망하다는 표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므로, 그 어떠한 실재(實在)도 세우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존재나 가치도 절대적이지 못하며, 덧없으며 허망하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어떤 실재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현상이 덧 없으며 허망하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무상하고 무아인 것으로 보면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당황하고 허둥대고 두려워하고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대체 실재를 전제하지 않은 세계가 가능한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神)이나 존재의 본성 같은 실재가 없다면 우리 삶의 가치는 어디서 유래되며, 행동의 동기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비단 다른 종교인들의 질문뿐만 아니라, 불교도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재하지 않은 세계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을 받아들이고 존재의 본성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승운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기본불교란 무엇일까
스님의 글을 읽어 보면 기본불교를 비판함으로써 대승불교의 당위성을 주장한 글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스님이 주장하는 기본불교란 무엇일까.
기본불교는 스님이 논문에서 만들어 낸 용어이다. 초기불교에다 공사상, 유식, 여래장, 심지어 선불교까지 ‘싸잡아’기본불교라고 하였다. 이런 기본불교의 특징은 모두 ‘반야’와 ‘공’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불교는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고 기본불교는 기본적으로 ‘허망한 것’이고, 대승불교는 ‘현실적인 것’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설명한다.
초기불교에서 부터 이질적인 요소인 선불교까지 모두 싸잡아 기본불교라고 보는 것도 독특하지만 이런 기본불교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허망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허무주의자일까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허망한 것이라면 부처님은 ‘허무주의자’가 되고 만다. 허무주의란 이 세상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한다. 과연 부처님은 이 세상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허무주의로 본 것일까.
부처님은 ‘고통’에 대하여 설하였다. 사성제에서 가장 먼저 강조 하고 있는 사항이 고통에 대한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 만 말하였다면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통을 ‘성스러운 진리’라고 말 한 것은 고통의 해결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이 있으면 고통의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고통의 원인을 소멸시킨 방법 또한 있었기 때문에 고통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하여 말씀 하셧지 ‘저 세상’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부처님이 이 세상은 허망한 것이고 저 세상은 ‘항상 즐거운 것’이라는 것 만 강조 하였다면 부처님은 틀림없이 ‘허무주의자’ 이었을 것이다. 또한 불교가 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였을것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
허무주의의 특징은 이 세상이 덧 없고 허망하고 가치가 없고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가 ‘죽어서 완성’ 된다. 유일신교의 경우 죽어서 ‘천국’에서 태어 나는 것이 목표이고, 정토신앙의 불교는 ‘극락’에 태어 나는 것이 목표이다.
이렇게 이세상을 부정하고 저 세상을 동경하는 모든 종교는 모두 허무주의 종교이다. 기독교가 그렇고 불교의 경우 극락에 태어 나기를 바라는 신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을 부정하고 저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살아 있는 이 생에서 최상의 행복을 맛 볼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바로 진정한 행복인 ‘닙바나(열반)’를 말한다. 열반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불교인의 목표이고 세상을 ‘뜨겁게’ 사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심현상을 관찰한다면 허망하다거나 허무가 발 붙일 틈이 없다.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데 어떻게 허망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초기불교를 강의하는 전법사들은 한결같이 허무하고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개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고 한다.
실재하는 현상을 보지 못하고 이름 붙여진 개념에 집착하였을 때 남는 것은 ‘허(虛)’와 ‘무(無)’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개념의 구조물을 쌓은 것이 ‘희론(戱論)’이다. 희론을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nca) 라 한다. 빠빤짜는 한 마디로 ‘개념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희론은 결국 ‘허’와 ‘무’ 즉, ‘허무’로 귀결된다. 실재를 떠나 개념놀음을 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허무주의’이다.
초기불교운동은 퇴보라는데
초기경전은 고리타분 한 것일까. 2500년전에 설하여진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까.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사람들의 인지 능력이 그 때 당시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현 시점에서 부처님 설한 말씀은 시대착오적 현상일까. 스님은 실재로 그렇게 보는 듯 하다.
오늘날은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의 불교 공부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대승불교가 출현한 배경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입장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불교가 발전하려면 계속 새로운 이론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 같다. 그런 입장은 불교평론의 열린논단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
불교가 연기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불교의 퇴보로 생각 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로 되돌아가자는 최근의 불교운동 역시 불교의 퇴보로 보는 것임에 틀림 없다.
초기불교를 비판한 결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완전하고 보고 더 보완하고 개선해야 된다는 입장이 대승불교의 입장이라면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성립한 대승불교의 결말은 인도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초기불교를 비판한 대표적인 경전이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성제는 없다. 따라서 당연히 팔정도도 부정된다. 심지어 연기법도 부정된다. 이처럼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 부정 되다 보니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최종목표인 ‘닙바나’가 대승불교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사라진 가장 큰 이유가 모든 것을 공(空)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사람들은 ‘허전’해 한다. 그래서 공사상을 보완하여 ‘유식’이 출현하였고, 이후 여래장, 진여사상으로 발전 하였다. 특히 마음이 곧 부처라는 여래장사상은 중국으로 건너가 ‘불성’과 ‘법성’사상으로 발전 되어 결국 ‘세상전체가 다 진리’라거나 ‘두두물불이 모두 부처’ ‘본래부처’ ‘영원한 부처’와 같이 ‘불이사상’으로 더욱 더 발전 하였다.
이 모든 사상이 연기와 공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지만 초기불교의 비실재에 대한 반대로서 실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사상의 특징은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장, 진여, 불성, 법성 사상은 힌두이즘이나 유일신교의 사상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성립한 대승불교가 ‘도로 브라만교’로 보일 정도로 제3자가 보기에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 혼란을 야기하는가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일어선 것이 불교이다. 부처님이 브라만교의 ‘자재신’과 영혼불멸의 ‘아트만’사상을 비판하여 ‘무아’와 ‘연기’를 주장함으로써 성립한 종교가 불교이다. 그런데 브라만교는 수백년간 전승되어 온 고도의 이성적 철학체계라는 것이다.
브라만교와 같은 고도의 철학체계를 비판하고 일어선 것이 불교이다 보니 불교 역시 고도의 철학일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사막에서 일어난 부족종교와 다른 점이다.
유일신교는 철학적 기반이 없이 출현한 종교이다. 따라서 철학이 부재 하기 때문에 불교와 기본적으로 ‘품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일신교가 크게 일어선 이유는 그리스 철학과 접목 되고 나서 부터이다.
기본적으로 철학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막의 부족종교가 고도의 이성적 사유체계인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접목 하였을 때 ‘날개’를 달았다. 그렇게 형성된 개념 중의 하나가 유일신은 ‘절대유(絶對有)’라는 개념이다.
절대유는 유일신을 ‘존재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無)일 수 없다. 그래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재가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항상 완전하다고 보고 이 우주애 충만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선 그자체이고 미 그자체로 보는 것이 기독교의 신관이다.
그런데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일어선 대승불교 역시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 다만 아주 특별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다르다. 그런 존재를 여래장, 진여, 불성, 법성이라 하는데 이는 힌두이즘에서 말하는 것이나 유일신교의 절대유와 비슷하게 보여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성립된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졌다. 대승불교가 밀교로 발전되면서 힌두이즘과 구별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밀교도 철저하게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의 역사를 보면 불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명료 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 것은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졌을 때 결국 ‘도로 브라만교’가 되고 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부정한 결과는 결국 ‘불교의 소멸’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열반의 추구’이다. 오로지 열반이라는 목표 하나를 위하여 모든 8만 4천법문이 설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열반은 허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아니다. 열반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뜨겁고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바로 지금 여기 이순간에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데 ‘허무’와 ‘권태’가 스며들 여지가 없다.
초기불교를 허망하다고 말한 것은 철저하게 ‘유신견(有身見)’을 바탕으로 한 말이라 볼 수 있다. 나 또는 나의 자아, 영혼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현상을 허무하다거나 허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본다면 고정된 자아나 불변하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허와 무가 발붙이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닙바나(열반)와 관련 없는 백마디 천마디 말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Sahassamapi ce vācā 사하싸마삐 쩨 와짜
anatthapadasaṃhitā 아낫타빠다상히따
ekaṃ atthapadaṃ seyyo 에강 앗타빠당 세이요
yaṃ sutvā upasammati 양 수뜨와 우빠삼마띠
닙바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마디의 의미 없는 법문보다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단 한마디의 법문이 훨씬 값지다.
(법구경 게송100)
Sahassamapi ce gāthā 사하싸마삐 쩨 가타
anatthapadassaṃhitā 아낫타빠다상히따
ekaṃ gāthāpadaṃ seyyo 에깡 가타빠당 세이요
yaṃ sutvā upasammati. 양 수뜨와 우빠삼마띠.
닙바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 편의 의미 없는 게송을 듣기 보다는
단 한 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고요히 해주는 게송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
(법구경 게송101)
Yo ca gāthā sataṃ bhāase 요짜 가타 사땅 바세
anatthapadasaṃhitā 아낫타빠다상히따
ekaṃ dhammapadaṃ seyyo 에깡 담마빠당 세이요
yaṃ sutvā upasammati. 양 수뜨와 우빠삼마띠
닙바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무의한 게송 백 편을 읊어 주는 것 보다는
단 한 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듣는 이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게송을 읊어 주는 편이 휠씬 낫다.
(법구경 게송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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