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 여러분!”묘원법사의 불교강좌
무언가 믿고 의지 할 데가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어린아이라면 부모를 믿고 의지 할 것이고, 학생이라면 선생님을 믿고 의지 할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유일신교라면 자신의 창주주를 믿고 의지 할 것이고,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삼보(三寶)를 믿고 의지 할 것이다.
가르침에 목말라 하지만
불교인이 믿고 의지하는 대상은 흔히 불법승(佛法僧) 삼보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 하면 ‘붓다(Buddha)’와 ‘담마(Dhamma)’와 ‘상가(Sangha)’를 말한다. 여기에서 상가는 ‘성스롭고 거룩한’ 상가를 의미한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부처님과 똑 같은 경지인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를 말한다. 이들이 귀의 대상이자 ‘피난처’인 것이다. 이 삼보 중에 불교인들이 실제로 접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이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지만 정작 들을만 한 곳이 별로 없다. 절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서 찾아 보기 힘든 현실이어서 법문을 듣기 위해서는 먼 곳에 있는 산중에나 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문이 없는 곳이 허다 하기 때문이다. 설령 법문을 한다고해도 ‘정법(正法)’을 설하는 곳은 더욱 더 드믄 일이다.
이런 시대에 라디오를 통한 법문을 거의 일년 가까이 들었다. 그 것도 대승불교와 거리가 있는 ‘초기불교’에 관한 ‘정법법문’이다. bbs불교방송에서 아침6시에 진행하는 ‘불교강좌’시간이 바로 그 것이다.
묘원법사의 불교강좌
불교강좌를 진행한 분은 묘원법사이다.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였고 지금은 정법을 전파하고 있는 ‘재가 수행자’이다. 오늘로서 마지막 방송을 듣게 되었지만 시작은 작년 12월 14일 부터이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막라 하여 하루도 빠짐 없이 총 322회 법문이 방송 되었는데 그런 법문을 일년 사계절을 거의 들었다. 잠에서 깨어 날때 머리맡에 항상 놓여 있는 라디오를 통해서이다. 주로 맑은 정신으로 들었지만 때로는 ‘비몽사몽’간에 들은 경우도 많았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오는 법문은 어느 것 하나 놓칠 것이 없다. 모두 주옥 같은 부처님이 설한 법문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초기불교 전법사들의 법문이 다 그렇듯이 이 법문 또한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나 신변이야기 보다 니까야나 아비담마와 같은 빠알리삼장에 근거 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또한 군더기 하나 없는 법문은 전달하는 이의 목소리와 함께 매우 명료 하였다. 정확하고 분명한 발음과 표준어는 매우 호소력있어서 일년간 들었어도 부담이 가지 않았다. 그런 법문을 일년가까이 들으면서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행자 여러분!”
첫째는 듣는 이로 하여금 ‘수행자’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법문을 할 때 반드시 “수행자 여러분!” 하고 말하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불자들은 ‘신도’라고 불리웠으나 이 법문에서 만큼은 모두 수행자가 된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인데 특히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도와 과를 성취하였을 때 누구나 다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네!”
둘째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 ‘알아차림’이다. 법문의 처음 부터 끝이 알아차림이라는 말에서 시작해서 알아차림이라는 말로 끝날 정도이다. 그런 알아차림 법문은 언제 들어도 새롭고 질리지 않는다.
알아차림은 사띠(sati)의 번역어이다. 사띠에 대한 번역어 논쟁이 있었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 만큼은 알아차림이라 불리운다. 그래서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이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알아차림을 그토록 강조 하는 이유는 열반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알아차림은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온 갖 경계에 대하여 단지 “그렇네!” 하며 알아차리면 그 뿐이라는 것이다. 그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모두 다 듣는 아침법문
불교강좌는 매일 들으려 노력 하였다. 모든 것이 차분히 가라 앉은 이른 아침에울려 퍼지는 낭랑한 음성은 막 잠에서 깨어난 이들에게 속속들이 머리에 박혔다. 비록 비몽사몽간에 들은 법문일지라도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언제나 새로웠다.
이런 현상이 나만 그런 것일까. 알고 지내는 법우님들에게 물어 본 결과 그들도 아침에 모두 듣고 있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대승의 법문만 듣다가 전혀 다른 새로운 법문을 듣고서 놀라워 하는 눈치이다. 그처럼 아침법문은 불자들에게 강한 메세지를 주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후속프로 ‘5분명상’
오늘로서 법문이 종료 되고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익숙한 것과 이별이 시작 된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 처럼 눈을 뜨면 항상 있어야 할 것 같은 법문이 오늘 로서 마지막이라니 아쉽기 그지 없다. 그러나 후속으로서 밤 9시 55분에 ‘5분명상’ 코너가 신설된다고 한다. 짤막한 글을 낭송 하는 시간이라 한다.
1년간 진행된 12연기와 위빠사나, 그리고 대념처경 강좌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본다. 대승불교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초기불교의 원음이 전파를 탓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2010-10-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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