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땅밝기 동영상 논란과 절망의 기독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5. 12:20

 

땅밝기 동영상 논란과 절망의 기독교

 

 

 

 

 

 

일부의 행위라는데

 

봉은사 명진스님이 땅밟기 동영상과 관련하여 기독교측에 대화를 요청한 바 있다. 그런 대화가 실제로 열렸다. 뉴스에 따르면 113일 저녁 CBS 라디오에 명진스님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권오성총무와의 대담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대담에서 명진스님이 타종교에 대한 공격성이 한국기독교의 전체 흐름인것 같다고 말하자, 권총무는 이에 맞서 한국 기독교 안에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흐름이 강화되는 경향은 있지만 그것을 중심이라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KCCK는 한국교회의 연합정신을 구현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하여 창설된 기독교 협의체를 말하는데 일종의 진보적성격의 단체라 볼 수 있다. 그런 단체의 책임자의 입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을 한 것이다. 봉은사 땅밟기와 같은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청와대 비서관이 자승총무원장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확인 되었다. 불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쥬류는 아니고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명진스님이  다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교리 자체가 배타적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대화여 권총무는 어떤 종교건 자기 종교가 가진 진리의 배타성은 있다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종교적 대화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고 강조했다고 전한다.

 

권총무의 이야기는 기독교 교리 자체개 배타적인 것은 맞으나 그런 현상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진보적 성향의 기독교단체의 사고가 이정도라면 한기총과 같은 보수성향의 기독교단체의 인식은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사찰에 방화를 하거나 불상을 훼손하고 파괴하여도 그저 일부 광신자들의 소행이라거나 일부 빗나간 믿음의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치부 해 온 것이 이제까지 그들의 논리이었다. 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교리 또한 독선적이고 배타적 구원관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런 배타성은 모든 종교에도 다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기독교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생각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와 다른 종족

 

기독교의 교리를 흔히 독선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관은 배타적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만이 가장 선()하다는 독선(獨善)’과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의 종교라는 배타는 어디서 유래 된 것일까.

 

기독교의 교리와 그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모습만 비슷할 뿐이지 그들의 정신세계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 볼 수 있다. 설령 그들이 우리의 형제 자매 또는 친구일지라도 기독교인들은 우리와 다른 인간으로 보면 된다.

 

그들은 왜 전투적일까. 그들은 왜 독선적일까. 그들의 정신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불교TV의 강좌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동국대 김종욱 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09)강의 중 제9강인 서양철학의 원류와 불교-이데아를 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보는 기독교인들의 행태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있다. 이 강의는 2009 12월 녹취하여 블로그(http://blog.daum.net/bolee591/16154475)에 올린 바 있다.

 

그리스철학과 만나고 나서

 

기독교는 유일신교이다. 유일신교가 사막의 부족국가에서 발생하였을 때 철학이 없었다. 다신교에서 더 발전된 형태의 일신교 형태 이었을 뿐 심오한 사상이나 철학이 결여 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기독교를 받아 들이면서 기독교가 실질적으로 시작 되었고 전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한다. 한편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는 오래지 않아 멸망하였는데 그 원인중의 하나가 기독교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고 유럽은 중세시대가 시작 되었는데 천년동안 지속되었다. 이 천년왕국동안 기독교의 교리에 어떤 변화가 일어 났을까. 초기의 단순하고 알기 쉬운 교리는 중세 천년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 결과 교리는 매우 어려워지고 신학으로서 체계가 잡혀 가기 시작 하였다. 그 결정적 요인이 그리스철학과 만나고 나서 부터이다.

 

이렇게 어려워지고 또 어렵게 할 필요가 있어서 발전된 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힘입은 바가 크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그대로 기독교 신학에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막의 부족종교가 이데아론과 접목하면서 날개를 단 것이다.

 

이데아(Idea)론이란

 

그렇다면 이데아이론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데아는 서양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미국의 화이트헤드가 말하기를 “서양의 철학사는 모두 플라톤 사상의 각주일 뿐이다”라고 말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모든 서양의 사상은 모두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기반 하기 때문에 플라톤 사상의 ‘껍질’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데아론은 서양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근원으로서 모든 서양철학은 이데아론의 껍질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 이데아로는 보통 원형으로 설명된다.

 

원형이란 원본과도 같은 것이다. 복사본은 아무리 잘 복사 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원본과 똑 같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데아는 본체이고, ‘실재하는 것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복사판은 가상적이고, ‘개별적이고, 따라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본과 복사판으로 뚜렷이 구분되어 이분법적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런 이데아 이론은 신을 설명하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는 것이다.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데아 대신에 신을 바꿔 넣으면 멋진 신학이론이 탄생한다. 그래서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데아론과 유일신을 접목시켜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기에 이러렀다. 그런데 이런 이데아 이론을 적용한 목적은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실재로 존재하고, 그 신은 보편적이고, 그 신은 또한 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데 있어서 이데아 이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이 실재함을 증명하려고 하였을까.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중세천년간 끊임없이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려고 시도 한 것이다.

 

그 결과 나온 이론이 신은 최고의 원인을 가진 창조신이 되었고, 항상 존재하는 절대유가 되었고, 오로지 하나로서 존재하는 유일신이 되었다. 부족국가시절 소박한 믿음의 유일신이 이데아이론을 만나면서 날개가 달린 신으로 발전 한 것이다.

 

날개가 달린 신은 절대유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라 한다. 그래서 절대 무()일 수 없고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재가 보장되어 있는 신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충만해 있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 그자체이며, ()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은 진선미그 자체이기 때문에 완전한 신을 향하여 가는 것이 피조물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절대로 신과 같아 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원형이고 인간은 복사판이기 때문에 아무리 복사를 잘 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원본과 같아 질 수 없는 이치라는 것이다.

 

()을 위하여 인간의 할일은

 

기독교에서 신을 위하여 인간의 할일은 무엇일까. 그 것은 다름 아닌 신을 닮아 가려는노력이다. 진리 그 자체이고, 선 그 자체이며, 미 그 자체의 신을 닮아 가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닌 것, 선이 아니 것, 미가 아닌 것 즉, 거짓()과 악함()과 추함()을 제거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거짓은 반드시 제거 되어야 하며, 신은 선 그자체이기 때문에 악은 반드시 멸절 시켜야 한다. 또 신은 미 그 자체이기 때문에 추하거나 더러운 것은 사라져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바르다고 하여 바른손이라하고 뉴라이트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왼손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 하여 좌파로 지칭하여 혐오 하고 왜 가난하고 무능력한 자들을 경멸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악의 제거는 절대적 (絶對的, absolute)’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이고 종교다원화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공격은 그칠 날이 없다. 사찰에 대한 방화, 훼불을 넘어 이제 법당에서 예배보는 시대가 되었다. 과연 이런 현상이 일부몰지각한 기독교인들의 행위로 볼 수 있을 까. 기독교의 신학이론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한 공격을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신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진선미그 자체인 신을 닮아 가려 하기 때문에 위악추를 제거 하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자 인생의 목표이다. 따라서 선 그 자체인 신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악의 제거는 절대적 (絶對的, absolute)’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 하면 절상대(絶相對)’라는 말과 같다. 상대를 ‘끊어 버리는’ 것이다. 선과 악중 맞은 편에 있는 악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선악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만 남게 될 것이다.

 

그 선이란 무엇일까. 그선은 그들에게만 좋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나라는 아()가 철저 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기독교인의 불교에 대한 공격은 결코 일부현상이라 볼 수 없고 전체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 이런 절상대(絶相對)을 부정 한다. 그 대신 절대립(絶對立)을 주장 한다. 이 말은 ‘대립을 끊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절대는 악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 그 자체를 제거 하는 것이다. , 선악 이분법적인 사고를 제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도 생각 하지 않고, 악도 생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다. 싸움이 아니라 화()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방에 강도가 들어 왔다면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종단과 스님들 그리고 불자들은 아직 까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집안에 강도가 들어와 안방까지 침입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아내와 생명같은 아들 딸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 쯤은 상상 하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강도에게 선처를 바라고 자비를 내려 주기 바랄까. 악랄한 강도라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물론 후환을 남겨 두지 않고 모두 몰살시켜 버릴지 모른다.

 

지금 법당안에 까지 기독교인들이 발을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 예배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한다. 이제 안방까지 내주고 나면 불교는 남는 것이 무엇일까. 안방까지 침입한 불청객을 막지 못한다면 그들의 말 대로 땅밝기함으로써 그들의 영토가 될 것이다. 이제 안방까지 들어 왔으니 그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국불교가 어쩌다가 이교도에게 안방까지 내주는 현실이 되었을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종단과 스님들이 세상을 등지고 국민은 물론 불자들과 소통을 거부한 채살아 간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담하다. 또 기독교인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의 본질을 모른 다면 결국 그들에게 자비를 바라는 처지로 전락 될 것이다.

 

기독교가 절대선을 추구하는 한

 

우리나라 기독교는 불교를 악의 세력내지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영적전쟁도 불사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악으로 규정되었다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 그런 공격은 대를 이어서 할 수 도 있다.

 

불교를 악으로 규정하여 멸절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교리때문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절대선을 지향 하였을 때 악은 반드시 제거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사찰의 방화, 불상의 훼손, 법당에서 예배보기, 땅밟기등도 이러한 악의 제거, 사탄세력의 제거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폄훼는 결코 일시적 현상일 수 없고 또한 일부 광신적인 사람들의 소행일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절대선을 추구하는 한 긴장과 갈등의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이 우리나라 장래를 비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 간 곳 치고 긴장과 갈등,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 나지 않은 곳이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이런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 기독교들과 공존 하고 있고 그들의 공격에 늘 시달리고 있다. 그들이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교리를 포기 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대를 이어서 긴장과 갈등이 지속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불교가 가장 불교다울 때

 

불교가 가장 불교다울 때 가장 경쟁력이 생기고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먼저 할 일은 우리 주변의 비불교적요소 부터 척결해야 한다. 인과를 부정하는 각종 기복이나 천도재와 같은 방편불교를 멀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법(正法)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 정법이란 다름아닌 부처님의 직접설한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에 기복과 방편과 같은 비불교적 요소가 들어설 틈이 없다.

 

종교의 경쟁력은 크고 웅장한 건축물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종교의 경쟁력은 다름아닌 청정에 있다. 청정함이야말로 가장 큰 종교의 경쟁력이라 한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말하는 영적전쟁을 벌인다 할지라도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으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상대방이 화를 낸다고 덩달아 화를 내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천박한논리와 무례한행동으로 도발을 한다고 해서 그들처럼 행동하면 역시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의 잘 못을 나무랄 수 있지만 그들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불교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부처님 법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전법(傳法)하는 것이다. 그 전법은 남을 붙들고 예천불지식의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 시키는 것이다. 스스로 고귀한존재가 되는 것이 불교를 지켜 내는 것이고 또한 가장 큰 전법이 아닐까.

 

 

 

2010-11-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