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절정의 단풍을 보며, 무상(無常)과 깨달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8. 11:23

 

절정의 단풍을 보며, 무상(無常)과 깨달음

 

 

 

 

 

 

 

 

절정이란

 

단풍이 절정이다. 절정이라는 말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떨어질 일만 남은 것이다. 마치 주식시장에서 대세상승기에 한 번 시세분출을 크게 하고 곧바로 내리막길로 치닫듯이, 남녀가 거친사랑을 한 후 이내 식어 버리듯이 이처럼 절정은 항상 내리막길을 예고 하고 있다.

 

날씨가 곧 영하로 곤두박질한다고 뉴스에서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나무들은 일제히 노랗고 빨간옷으로 갈아 입었다. 해마다 이맘때 거리를 걷다 보면 마치 환상속에 있는 것처럼, 불길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몽환적인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뭇잎들이 일제히 울긋불긋해 졌다면 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마다 11 15일 전후하여 일제히 낙엽이 지는 현상을 목격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화려함의 절정에 이른 단풍을 볼 수 있는 날도 불과 1주일 남은 것이다.

 

무상(無常)의 계절에

 

단풍이 떨어지면 마치 비오듯이 떨어진다. 차를 타고 있으면 차의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이다. 특히 은행나무밑이 더 그렇다. 이렇게 하루 이틀 사이에 일제히 나뭇잎이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그야말로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된다. 춥고 외롭고 긴 겨울이 예고 되는 것이다.

 

낙옆이 지는 계절은 죽음의 계절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반짝 좋아 지는 현상이 있듯이 나뭇잎들도 죽음을 앞두고 최고의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그 기간은 불과 2주이내에 지나지 않는다.

 

연어가 태어난 곳을 항하여 있는 힘을 다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 알을 낳고 죽어 가듯이, 모든 현상들은 죽음을 앞두고 가장 절정에 이르나 보다. 마찬가지로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화려하게 치장 하는 것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단풍이 아름답긴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두 다 떨어질 것을 생각 하면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슬픔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그래서 가을은 봄과 달리 무상을 느끼게 해 주는 계절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가을철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무상을 느끼게 될까.

 

무상의 주체는 무엇일까

 

무상이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 할 지라도 덧 없음을 느끼는 것은 나()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가 없다면 무상 또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몸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 있다고 여기고 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이 애착으로 발전 되고 급기야 집착으로 발전 된다. 그래서 슬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비탄에 빠지게 된다.

 

불교의 변치 않는 진리중의 하나가 무상이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몸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과 슬픔은 발생한다.

 

값비싼 도자기가 깨졌을 때 아까운 이유도 나의 것이라는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의 도자기가 깨지는 것을 보았다면 나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라면 그다지 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아이티 대지진으로 수십만이 죽어 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다지 크게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간다면 뼈을 깍는 아픔을 느낄 것이다. 상대가 이미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가거나, 낙엽이 떨어질 때 무상함을 느끼는 주체가 두종류가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때와 또하는 나의 것이 아닌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나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있는 있다고 여기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무상을 느끼는 것과 자아가 없다고 여기고 떨아지는 낙엽을 보면서 느끼는 무상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무상과 깨달음

 

보통사람들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또는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서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을 느끼지만 깨달음으로 연결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가 있다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나가 있을 수 없다는 연기론적 무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연과 인생을 포함한 이 세상에 형성된 모든 것들이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상을 넘어 무아와 고통, 슬픔을 통찰함, 즉 무상, , 무아를 꿰뚫어 알게 됨으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절정의 단풍을 보고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1주일 이내에 모두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 무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무상을 느끼는 주체가 영원한 것이냐 아니면 일시적인 것이냐에 따라 불교적 깨달음을 성취하느냐 아니면 평생가도 무상한 것으로 그치는냐의 차이일 것이다.

 

 

 

201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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