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서울에 ‘초기불교학당(교양대학)’이 만들어진다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8. 22:58

  

서울에 초기불교학당(교양대학)’이 만들어진다는데

 

 

 

냉대받는 신도조직

 

최근 땅밟기동영상과 관련된 글을 몇 차례 블로그에 올렸다. 글을 읽고 난 어느 법우님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개탄한 댓글을 남겨 주기도 하였는데 한국불교가 왜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여지 없이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부산을 불도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구대비 불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산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 가는 큰 절에 신도회가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일까. 그 법우님은 실제로 그러 하다고 댓글에서 밝혔다.

 

 

“제가 다니는 절도 부산에서 손꼽는 절이지만 신도회가 구성되어 있지않습니다. 몇 년 전에 구성을 했지만 주지스님이 전권을 쥐고 신도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위임해주지 않아서 올해 해체되어 버렸지요...

 

 

처음에 이런 댓글을 남겼는데 다음 번 글에서 또 다음과 같은 더 구체적인 글을 남겼다.

 

 

제가 다니는 절에 공식적인 신도회는 결성되자마자 자연유산(?)되어 버렸고 어린이 회, 학생회, 청년회...등의 사찰에서 만든 단체와 법회장소를 빌려서 법회를 여는 여러 단체법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남자신도단체가 있는데 모양새는 사찰 소속단체입니다. 평일 야간에 법회를 하는데 저녁식사를 절에서 하고 법회를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공양간 문을 걸어잠그고 식사를 제공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김밥을 사와서 법당 뒷편에서 먹고 법회를 봅니다.

 

 

공식적인 신도회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는 비공식적인 남자신도단체의 경우 야간 법회를 하는데 공양간에서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김밥을 먹으며 법당 뒷편에서 법회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자신도 법회가 냉대를 받고 있고, 더구나 사찰에서 신도회가 구성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 주지스님은 대외적으로 포교의 일익을 담당하는 중요한 인사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도들이 단지 으로 만 보이고 불전함에 돈이나 넣고 개인의 복이나 바라는 존재로 생각하는 가 하면, 신도회가 있으면 주지스님이 마음대로 하는데 있어서 방해요소로 생각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주소라고 그 법우님은 개탄하고 있다.

 

이처럼 스님들의 생활공간이자 수행공간인 사찰에서 재가불자들은 설자리가 없다. 재가자들을 4부대중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대우는 커녕 스님을 견재나 하려는 부담스런 존재로 생각하다 보니 외부적인 충격에 속수무책이다.

 

신도회와 같은 조직이 구성되어 있지 않다 보니 불교와 사찰을 보호 하는 외호세력이 없어서 이교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또한 각 사찰에 신도회가 부재 하다 보니 지역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봉쇄 되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가 되면서

 

재가불자들이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인터넷에서는 몹시 활발하다. 특히 카페나 블로그, 게시판, 토론사이트등을 통하여 불자들은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자료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그런 인터넷에는 삼보가 아니라 이보(二寶)’만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 이보만 있는 있는 인터넷에 눈에 뛰게 볼만한 것이 초기불교에 관한 것이다.

 

초기불교는 부처님이 직접설한 가르침이다. 기존의 중국불교와 다르고 또한 스승이 없어도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을 통하여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실제로 아비담마청정도론을 보면 스승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매우 상세하고 감동적으로 초기경전을 해설하고 있다. 이런 초기불교경전 탐독에 대한 바람은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한 2000년대 부터라 볼 수 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빠알리 삼장중에 논장에 해당되며,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화한 이론서이다.

 

 

 

2000년대가 되면서 직장은 물론 가정, 현장에 네트워크가 깔리면서 누구나 언제 어디든지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시대가 되었다. 주로 온라인에서 의견을 주고 받는 가상공간이지만 이 사이버세상에도 친구가 있고 커뮤니티가 있어서 현실세계 못지 않은 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가상 공간에서 불자들은 초기불교를 접하게 되는데 그 효시를 초기불전연구원( http://cafe.daum.net/chobul)’으로 본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초기불전연구원은 초기불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포털 사이트 다음에 개설된 카페이름이기도하다. 이 카페의 주인장은 각묵스님이다. 그런데 최근 카페동호회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초기불전연구원이 김해에 위치한 보리원이라는 사찰이 개원되고 나서부터이다. 몇몇 뜻있는 회원들이 개원식에 직접참여하여 최초로 모임이 이루어졌고 초기불전연구원의 스님들도 적극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상에서 필명으로만 존재하던 불자들이 드디어 오프라인에서 동호회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되기 까지 초기불전연구원이 만들어진지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본다. 그렇다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단체가 만들어지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보리원 점안식

초기불전연구원 근본도량이다.

경남김해시에 소재하고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hobul

 

 

 

이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불교운동이 시작 될 수 있고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도권지역의 모임이 불광사에서 열렸다는 것은 여러모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불광사가 특별한 이유

 

하필이면 왜 불광사이었을까. 그런 불광사는 현대불교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초기불전연구원의 오프라인 모임이 불광사에서 열렸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광사는 어떤 절일까.

 

불광사는 도심포교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더 유명한 것은 불광사를 창립한 광덕스님일 것이다. 그런 불광사는 이미 메스컴이나 책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송암스님의 광덕스님에 대한 시봉일기’, 불광회 창립멤버들의 이야기, 불교신문의 폐허위에 세운 부처님나라-불광사 (http://blog.daum.net/bolee591/12117106, http://blog.daum.net/bolee591/12165780) ’를 통하여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불광사의 창립이야기가 하나의 법회에서 시발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광사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매우 특별한 사찰이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절이 건축불사를 하는 것 부터 시작하는데 불광사의 출발은 법회모임이 발전 되어절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것도 어느 특별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수 많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시발점은 어디일까.

 

대각사를 빌려서 법회를

 

불교신문의 폐허위에 세운 부처님나라-불광사에 따르면 불광회가 창립된 것은 1974 9 1일이라 한다. 광덕스님이 주관하여 창립한 불광회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매월 발행하는 불광지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인터넷 카페와 같은 것이다. 그 때 당시 대중을 포교 하는 데 있어서 인쇄매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잡지를 통하여 포교 하는 방법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불광지를 읽은 독자들이 정기법회에 참여 하게 되고 신도들이 늘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잡지를 매개로 하여 전에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법회를 하던 장소는 어디이었을까. 사찰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불광회가 법회를 연 공간은 종로에 있는 대각사이었다. 대각사의 공간을 빌려서 법회를 보기 시작 하였는데 창립한지 1년 뒤인 1975년에 정식으로 불광법회가 창립되었는데 이 때 참여한 인원이 43명이었다고 한다.

 

 

 

 

대각사에서 불광회 모습

이곳에서 불광운동이 일어나 불광사로 이어졌다

출처 ; 불교신문

 

 

 

이후 매주 목요일 오후6 30분에 대각사에서 법회가 열렸고 1년 후인 1976년에 참석자는 10배인 480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는 직장인, 자영업자, 전문직종사자, 대학생, 군인, 주부 등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나타났고, 시간이  지나면 자리가 없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대각사 법당으로 차고 넘쳐 노천에서 법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그 마저도 넘쳐서 신도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안정된 공간을 물색하게 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현재 잠실에 위치한 불광사라 한다. 불광법회가 창립되고 나서 불과 2 8개월만인 것이다.

 

 

 

 

1981년 정토제(淨土齋)를 여는 장면

현재 불광사 부지에서 기공식을 하기전 광덕스님〈맨앞〉이 기원제를 열고 있다.

그 뒤 요령을 든 스님이 현재 불광사 회주 지홍스님이다.

출처; 불교신문

 

 

 

다르마팔라와 용성스님

 

그렇다면 불광법회가 열린 대각사는 어떤 절일까. 대각사는 1921년 용성스님이 주도한 대중포교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불교근대화 기치를 걸고 한글경전, 포교당운동, 찬불가 보급 등을 펼쳤던 용성스님은 어떤 분일까. 최근 불교평론의 마성스님의 글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85)에 따르면 인도불교의 부흥과 세계불교부흥운동의 기수인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 (Anagarika Dharmapala, 1964- 1933) 와 간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르마팔라

Anagarika Dharmapala (17 September 1864 - 29 April 1933)

20세기 불교를 이끈 리더, 인도의 불교중흥의 파이오니어,

아시아 북미 유럽의 3개 대륙에 담마를 전한 현대불교의 개척자,

스리랑카불교 재건자 등으로 불리운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Anagarika_Dharmapala

 

 

 

 

다르마팔라가 대각회(大覺會, Mahābodhi Society) 를 창립하여 불교부흥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3 8 2일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 당시 용성스님이 다르마팔라의 불교부흥운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 대각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런데 50여년이 지난후에 손자 뻘 되는 광덕스님이 바로 그 대각사 법당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J보살님과 J교수님

 

법회모임의 법우님이 있는데 그 분은 불광법회창립멤버이었다고 한다. 대각사에서 법회가 열릴 때도 참여 하였고, 이후 불광사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매년 개최되는 연등축제때 단 한 차례도 빠짐 없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20대 때 부터 불광사와 인연을 맺은 그 법우님은 마치 소녀처럼 보이는 멋쟁이 J보살님이다.

 

또 한 분의 경우 중학교 시절 교법사이었다. 소위 뺑뺑이로 들어 간 곳이 종로5가에 있었던 종립학교이었는데 그 때 당시 교법사는 학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불교선생님이었다. 힌쥐와 까만쥐의 비유를 들어 실감있게 경전을 설명해 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교법사가 마치 부처님을 보는 것 같다고 어느 학생이 말을 하였는데 진짜 부처님 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넓은 이마에 흰피부 서글 서글한 눈과 반곱슬머리는 부처님처럼 보였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 인터넷에서 불교TV강의를 보고 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아 자세히 보니 그 교법사님이었다.

 

이제는 D대 불교학과에 있는 J교수님이다. 그런 J교수님의 이름일 알고 나자 2004년 불교교양대학에서 아함경을 강의 하던 바로 그 교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비로서 알 수 있었다. 수백명이 듣던 불교교양대학에서 맨 뒤자리 구석에서 들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고, 다만 이름만 기억 하고 있었는데 이제 얼굴과 이름이 매칭이 되어 중학교 시절 그 교법사가 바로 J교수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J교수님의 이름을 키워드로하여 검색한 결과 교법사시절에 불광법회를 창립을 주도한 사람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더 자세하게 찾아 보니 그 J교수님은 광덕스님하고도 인연이 매우 깊었다. 광덕스님의 상좌이었던 어느 스님(지정스님)이 쓴 글에 따르면 광덕스님은 1960년대 중반 봉은사에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를 창립하여 지도법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때 그 사무실이 봉은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당시 어느 동국대 학생이 토요일과 일요일에 항상 함께 있어서 가족과 같이 살았던 기억이 난다고 쓰고 있다.  그 동국대 학생이 지금 말하는 J교수님인 것이다.

 

 

 

 

대불련과 광덕스님

1964년 봉은사 대웅전 앞에서 대학생 수도원생들과 함께 한 광덕스님.

이를 모태로 이듬해 대불련이 창립됐다.

출처 ; 불교신문

 

 

 

이처럼 광덕스님과 함께 불광법회를 창립한 J교수님에 대하여 J보살님께 이야기를 하자 그 보살님도 J교수를 잘 안다고 하였다. 그 보살님이 20대 때 부터 불광법회에 다니고 불광사에서 열심히 신행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잘 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J교수님 얼굴이 불광사에 있는 부처님 상호와 매우 닮았다고 말한다. 불광사에 가 보지 않아 J교수님 얼굴과 부처님 상호가 비슷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불광법회가 만들어진 이후 새로운 불교사상과 이를 통한 신불교운동을 접한 젊은이들이 대거 대각사에 모여 들었다는 사실이다.

 

수도권에서 3등종교로 전락위기

 

다르마팔라가 인도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1891년 대각회를 창립하여 불적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이를 본 받아 용성스님도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1921년 대각교를 창설하여 대각사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54년후 바로 그 대각사에서 불광법회가 창립된 것은 사회적으로 현대화가 본격화 됨에 따라 과거 전통이 모두 부정되고 서구 사조가 범람하던 문명의 전환기에 젊은이들이 의지할 이념이나 철학이 없어서 불광법회로 모여 들게 된것이다.

 

이처럼 시대적 요청에 따라 결성된 불광법회는 창립된지 7년만에(1982,잠실)에 자신의 법당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기 까지 땅1평사기, 1통장 만들기외 같은 운동이 있었는데 이는 어느 한사람의 원력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은 70년대 상황과 또 다르다. 70년대 이후 불교가 무기력하고 정체를 면하지 못한 반면에 개신교는 70년대와 80년대 매 십년 마다 배가 성장하였다. 그런 개신교는 장로대통령을 배출하고 사회전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가 하면 본격적으로 불교를 압박하고 있다.

 

최근 벌어진 기독교의 각종 불교정책에 대한 개입이나 천박한 땅밟기, 법당에서 예배보기와 같은 무례한 행위는 불교를 말살하려는 불교능멸행위임에도 불구 하고 종단이나 스님들은 아직가지 특별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신자수에 있어서도 전인구의 절반이 모여 산다는 수도권에서는 개신교에게 1등을 넘겨 주고 이제 천주교에 밀린다면 3등종교로 전락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불교의 내부적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남방불교의 수행법과 초기불교경전의 도입으로 기존의 선종과 대승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대승비불설이나 다라니가 힌두신예찬에 지나지 않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스님들은 산중에서 세상을 등지고

 

이처럼 대 내외적으로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한 것은 기존의 방식대로는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증명한다. 스님들은 산중에서 세상을 등지고살아 가면서 국민은 물론 불자들과도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사는 곳에서 절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늘어나는 것은 교회이고, 같은 지역에서 주민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지역을 위하여 봉사하려고 경쟁하고 있다. 거기에 불교가 끼여들 틈은 없다. 이처럼 방치되다시피 한 도시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2000년대 부터 인터넷의 보급에 따라 넷상으로 나마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 것도 이제 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부처님의 원음에 관한 것이다. 그와 같은 부처님의 친설을 소개한 대표적인 카페가 초기불전연구원일 것이다. 

 

특히 초기불교의 교리와 아비담마와 같은 동영상 강의, 청정도론과 니까야와 같은 서적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갈증을 느끼는 네티즌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해소 해 주었고 진정한 불교의 맛을 알게 해 주었다. 이제 그와 같은 온라인의 활동을 넘어 오프라인 동호회가 결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오프라인 동호회는 과연 불광법회처럼 새로운 불교운동을 벌일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초기불교학당(교양대학)이 만들어진다는데

 

불광법회가 광덕스님을 중심으로 J교수님과 같은 대불련출신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면 초기불전연구원 역시 각묵스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런 조짐은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초기불전연구원 동호회 게시판을 보면 댓글에서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마 내년부터 우리 조계종의 교육원에서 주관하는 가칭 초기불교 학당이라는 초기불교 불교교양대학이 서울에서 개설될 것입니다. 제보고 학장을 맡아라고 해서 제가 난감해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조계종에서 가칭 초기불교교양대학이 서울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는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바람직한 것은 종단에 의지 하지 않고 자력으로 초기불교교양대학을 만드는 것이다.

 

다르마팔라가 대각회를 만들었던 것처럼, 용성스님이 대각교를 만든 것처럼, 광덕스님이 불광법회를 만든 것처럼 독자적인 불교대학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배출된 기수를 조직화하여야 한다. 조직화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초기불교로 불교가 중흥할 수 있는 계기로

 

기수별로 조직화 함으로써 강한 유대감이 생기게 된다. 각종 수련회참석이나 연등축제와 같은 불교행사에 참여하여 유대관계를 강화하면 그 조직은 평생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역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겨서 불교의 전법효과도 노릴 수 있다.

 

종단은 불자들의 조직화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불교와 종단을 보호 하는 외호세력으로 육성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도회등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모든 것을 주지스님 마음대로 하려 한다면 이교도의 공격과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조계종의 교육원에서 초기불교 교양대학을 개설한 다면 불자들의 조직화를 막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 하여 불교를 외호 하는 호법신장의 역할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역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게 함으로서 전법 효과까지 노려야 한다. 초기불교교양대학을 만든다는데 과연 교육원은 그런 것 까지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교양이나 쌓기 위한 수단으로 만족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한국불교는 각묵이전과 이후로나누어 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미래를 짊어 지고 있는 스님이라면 조계종의 교육원 소속의 초기불교학당이 아니라 독자적인 불교대학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래서 용성스님이 대각운동을 펼쳤던 것처럼, 광덕스님이 신불교운동을 일으켰던 것처럼, 더 멀리 다르마팔라가 인도불교는 물론 세계불교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다시 한 번 초기불교로 불교가 중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2010-11-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