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도둑질하면 왜 제 명대로 못살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1. 13. 12:12

 

 

 

도둑질하면 왜 제 명대로 못살까

 

 

 

 

 

 

 

인간은 ()대로산다고 한다. 반면에 천상에 사는 존재는 수명대로산다고 한다. 이처럼 천상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만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은 자신이 지은 업대로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양심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학 강의로 잘 알려진 한림대 오진탁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1/4은 사고사에 의한 죽음을 맞이 한다고 한다. 또 사고사 중의 반은 사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라 한다. 이처럼 인간은 수명이 다 되어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 하는 경우는 드믈고 대부분 사고사, 병사, 타살, 자살, 돌연사와 같은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누구나 이 세상을 태어 났다면 죽게 되어 있다. 또 죽음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다. 크게 명성을 떨쳤던 자들도 피해 가지 못하였고, 큰 공덕을 쌓았던 사람들도 비켜가지 못하였다. 힘이 장사인 사람, 큰 통찰지를 가진 성인, 심지어 80가지 부속상을 두루 갖추시고 32가지 대인상으로 장엄된 정등각자적멸하셨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죽음은 양심도 두려움도 없이

모든 중생을 부숴버리거늘

어찌 나 같은 중생을 압도하지 않으리!

 

 

누구나 한 번 쯤 맞이 하게 되는 죽음은 언제 어느 때 어느 방법으로 우리를 덮칠지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그 수명도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자연사 할 수 있는 수명을 가지고 태어났을 지라도 사람들과 얼키고 설킨 업의 작용으로 인하여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다리가 무너져서, 건물이 붕괴되어, 불이 나서 죽을 수 도 있다. 그런데 타인을 살해 하였을 경우 어떠할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여러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경우 그 사람의 수명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이처럼 살인업을 저지른자들의 수명은 보장될 수 없다. 설령 현대법에 따라 사형은 면하게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복수에 의하여 살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둑질도 마찬가지이다. 도둑질하면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한다. 단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며 보낸다.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월급생활자의 대부분은 한달 벌어 한 달 먹고 산다고 볼 수 있고, 월급생활자가 아닌 자영업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고 볼 수 있다.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

 

자영업자의 경우 하루 일을 하지 못하면 일당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돈의 축적은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쁘다 보니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을 가질 수 없다. 반면에 월급생활자들은 대체로 계획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그래서 미래를 위한 대비도 가능한데, 가장 완벽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는 그룹은 단연 공무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 될 뿐만아니라 정년후 일반 자영업자의 평균소득의 2배에 달하는 연금의 혜택도 받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도중에 사망하면 그 연금의 약 70%가량은 유족에게 돌아감으로 훌륭한 유산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공무원연금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은 공무원 자신들이다. 이런 시스템은 일종의 도적질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나 비판을 가하는 국민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방후 부터 지금까지 공무원들은 으례히그런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종교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은 축복받은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마치 천상의 삶을 살아 가는 것 처럼 노고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삶을 말한다. 그런 대표적인 그룹이 공무원이라 볼 수 있고, 또 한 그룹을 든다면 종교인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직자라 불리우는 종교인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행생활을하면서 보낸다. 물론 종교인으로서 열심히 신행을 하여 성자가 되었다면 당연히 존경의 대상이 되고 공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도 하지 않으면서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을 때 무위도식한다는 평판을 들을 것이다.

 

일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들어 가는 재화는 모두 신도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그 돈을 벌기 위하여 신도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24시간 중의 대부분을 노동하는데 할애 함으로서 얻어진 것 중의 일부이다.

 

누군가 돈을강탈해 갔다면

 

노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투입하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하여 시간을 투자 하였다면 그 돈은 자신의 시간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달 투자 하여 백만원을 받았다면  그 백만원은 자신의 시간과 같고 동시에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생명중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할애하여 벌어 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로소득이 아닌 자신의 노고로 벌어 들인 돈은 피와 땀의 결과이며, 동시에 자신의 생명의 일부분과 같은 것이다. 그런 돈을 누군가 강탈해 갔다면 어떻게 될까.

 

돈을 벌기도 어렵지만 있는 돈을 지켜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반드시 상대방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확천금을 생각하고 허황된 꿈을 꾼 자기자신에게도 책임이 일정 부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에 속아 전재산을 날렸다든가, 주식시장에 투자 하여 본전은 커녕 손실만 키운 것 역시 최종판단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만 원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도둑이나 강도가 자신의 돈을 훔쳐가거나 빼앗아 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 명에 살 수 없는 이유

 

누군가 자신의 돈을 훔쳐 갔거나 강탈해 갔다면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돈이 사라진 것이다. 이 경우 돈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사라진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동안 그 돈을 벌기 위하여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하여 보냈는데 그 돈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일부가 사라진 것과 똑 같이 생각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둑이나 강도는 그 돈을 가져 갔으므로 생명이 더 연장 되는 것일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의 생명과도 같은 돈을 훔치거나 강탈해 갔다면 그 돈에 투입된 시간 만큼의 수명이 단축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돈의 액수가 비록 적을 지라도 가난한자가 평생모은 것이라면 한 평생의 시간을 앗아 간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훔친자나 강탈한자는 결코 제 명에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타인을 살해 하거나 타인의 돈을 훔치고, 강탈해가는 경우 결국 타인의 생명을 훔쳐 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제명대로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지은 업대로 살지 결코 수명대로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은 것이 많아서

 

인간이 수명대로 산다고 해도 백년 이쪽 저쪽일 뿐이다. 그러나 현생의 업은 물론 숙생의 지은 업대로 살기 때문에 오늘 당장 어떤 일이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일 오늘 하루 밤과 하루 낮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면 지은 것이 많아서일 것이다.

 

따라서 항상 죽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 하여야 하는데 밥먹을 동안밖에 살지 못할 수 있고, 그 것도 네 다섯 입의 음식을 씹어 삼키는 동안밖에 살지 못할 수 있고, 심지어 한 입의 음식을 삼키는 동안밖에 살 수 없을 수 있다. 더 짧게 말하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 쉬는 동안밖에 살지 못 할 수 있다. 이렇게 목숨이 붙어 있는 시간이 짧다 보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짧구나, 인간들의 목숨은!

선한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면서

그의 머리가 불타듯이 수행해야 할지라.

죽음은 반드시 오고야 말리니!

(S.i.108, 상윳따니까야)

 

 

인간의 목숨은 언제 어느 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매 순간 머리에서 불이 나도록수행하여야 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일생윤회와 찰나윤회

 

궁극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매우 짧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오직 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안만큼이나 짧다고 표현 하였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에 바퀴의 테두리 한 부분이 땅에 닿아 굴러가고 설 때에도 바퀴의 테두리 한 부분이 서듯이 중생들의 수명은 한 마음순간 만큼이다(eka citta kkhanika)”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마음이 소멸할 때 중생도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윤회로 설명 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생의 윤회’가 있고, 또하나는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찰나 윤회’이다. 이런 찰나윤회의 연속선상에 일생윤회가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대승불교의 한마음과 달리 죽 연결된 선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마치 들이 모여서 선과 같이 보이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의 특징은 한 순간에 오로지 한가지 일밖에 하지 않는다. 또 그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 나고, 일어난 마음은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에 과보를 남기고 사라지기 때문에 생멸을 거듭하면서 마치 흐르는 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한 존재에서 일어 나는 마음을 바왕가(잠재의식)’라 하며 그 존재가 죽을 때까지 지속 되는 마음이다. 그런데 한 존재가 죽을 때 순간의 마음은 다음 존재로 재생하게 될 과보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죽고 태어나는 것이 이 없는 것이다. 이점은 북방불교에서 말하는 중유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49재와 마지막 효도

 

중유란 한 존재가 죽고나서 머무는 기간을 말하는데 북방불교의 경우 49일이다. 한 존재가 죽은 다음에 곧 바로 다른 세상에 태어 나는 것이 아니라, 49일 동안 중유라는 존재로 머물다가 새로운 몸을 받아 각자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 난다는 것이다.

 

49재에 관한 법문을 잘 하는 스님의 이야기 따르면 안이비설신의 6식과 제7말라식의 심판기간이 각 1주일씩 하여 7번 이루어지기 때문에 49일 걸린다고 한다. , 한 생을 살아 가면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모든 업이 제8아뢰야식에 고스란히 저장 되어 있는데, 눈으로 보고 지은 모든 업들을 심판하는데 1주일, 귀로 듣고, 냄새맡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지은 모든 업들을 보고 판단 하는데 각각 1주일씩 걸리기 때문에 총 49일 걸리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49재를 치루어 주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마지막 효도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스님을 모셔서 절에서 49재를 하는 이유는 심판기간 중에 판결을 하는 시왕님께 잘 보아 달라는 뜻으로 하는 것이고, 또 좋은 곳에 태어 날 수 있도록 부탁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불교판 라디오 앵벌이

 

이처럼 북방대승불교에서는 중유를 인정하다 보니 죽은 자를 위한 49재는 물론 먼 조상에서 부터 태아인 상태로 죽은 영가에 이르기 까지 천도재를 지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일까 우리나라의 각 사찰에서는 천도재를 하지 않은 절이 없을 정도로 성행한다고 한다. 이런 열풍은 라디오의 광고방송에서도 확인 된다.

 

한 때 천도재로 유명하였던 스님이 최근 BBS불교방송에서 천도재 광고를 하고 있다. 그 것도 불자들의 청취율이 가장 높다는 아침6시와 저녁 7시대의 음악프로시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조계사와 해인사에서 주지로 있으면서 천도재 잘 하기로 잘 알려진 그 스님은 박씨라는 속명을 사용하여 SM’이라 소개 하면서 경기도 북방의 한 사찰의 천도재에 대한 광고를 전국에 걸친 불자들을 대상으로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하고 있는데, 내용을 들어 보면 천도재를 무려 일곱, 300여일이나 해 준다는 것이다. 정확한 날자는 49일 곱하기 7로 하면 343일이 되기 때문에 쉽게 계산이 된다.

 

천도재를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일곱번이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도 1년 넘게 하면서  해당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 하는 그런 천도재는 어떤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개신교나 천주교의 라디오 방송에서 그와 같은 기복적인 광고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타종교방송의 경우 성직자가 직접 출연하여 광고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유독 불교만이 성직자가 직접 출연하여 해당지역이 아닌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광고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불교판 라디오 앵벌이가 아닐까.

 

몸만 바꾸는 것으로

 

고대 인도에서 윤회사상은 윤회의 주체가 있었다. 자아, 개아, 진아로 번역되는 산스크리뜨어 아트만(ātman)’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우파니샤드나 베단타 학파에서는 보편적 실재라 생각하여 브라만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자아인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가 됨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인 영혼이 있어서 옷을 갈아 입듯이 단지 몸만 바꾸는 것으로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아트만 사상을 비판하여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대승운동이 일어 나고 공사상이 발전되어 무아를 설명하면서도 윤회의 주체를 어떻게 해서든지아트만과 다른 형태로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사상이 유식사상의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이나 여래장 사상의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같은 것이다.

 

이처럼 제8식인 아뢰야식과 여래장 사상에 따르면 윤회의 주체가 인정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불교방송의 경전공부시간에 인터넷게시판에서 영혼은 소멸될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고, 영혼이라는 말 대신에 인도의 여래장 사상의 연결선상으로 보고 있는 중국적 불교의 대표적 사상으로 자리잡은 불성법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 하였다.

 

틈 없이곧바로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윤회의 주체는 인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 일정기간 머문다는 중유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죽음의 마음 다음에 한 존재가 일생에서 겪었던 커다란 사건이 대상으로 떠올라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고 틈 없이곧바로 입태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 때 임종시에 마지막 떠 오르는 대상은 보통 자신이 일생동안 지은 업 중에 가장 인상적 이었던 것이나 그 업에 대한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 업이나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마음이 다음 존재가 태어날  몸과 마음의 조건이 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보는 윤회는 흐르는 물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과보가 상속 되어 흘러가는 연기적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일생윤회와 순간윤회는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매 순간이 생일인데

 

사람이 태어난 날이 되면 생일잔치를 해 준다. 그런데 매 순간 마음이 생멸하는 순간윤회로 본다면 매번 생일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매 순간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하며 이는 결국 열반으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의 마음순간에 살았고, 지금은 살지 않고, 미래에도 살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마음순간에 살지 않았고, 살지 않고, 살 것이다. 현재의 마음순간에 살지 않았고, 살고 있고, 살지 않을 것이다.”

(Nd1.42, 닛데사)

 

 

 

2010-1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