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아눌라스님의 윤회와 열반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12. 17:20

 

 

                                  아눌라스님의 윤회와 열반

 

 

 

다짜고짜 식으로

 

법상에 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님들이다. 그런 스님들을 법문을 듣기위해서 법을 청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법회에서 청법가를 부름으로서 법을 청하고, 이에 법사는 법을 설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그런데 선사들의 법문을 들으면 너무 어렵다.

 

요즘 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용어와 알아 들을 수 없는 게송, 그리고 종종 !”과 주장자를 내려 치는 듯한도 하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들게 하기도 한다. 또한 법문의 내용 또한 불자들이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현실적이지 않다. 또한 말하는 사람마다 법문의 내용이 모두 제각각인 것도 특징이다.

  

선사들은 왜 현실과 동떨어진 법문을 하고 권위적이며 잘 가르쳐 줄 것 같지 않은 인상을 주는 것일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인터넷신문에 연재된 어느 거사의 수행기를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을 어느 정도 짚어 볼 수 있다.

 

 

의구심을 풀고자 불교계에서는 공인된 수행의 선지식인 법사 한분을 찾아가 상담을 드렸다. 그분은 나의 수행과정을 다 들으시더니 일성이 “거사님 수행 잘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혜가 생겨났습니까?”였다. 그야 말로 다짜고짜 식이었다. 나의 대답 또한 간결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그분의 대답 또한 간결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의식을 깨뜨리십시요!

(도이 거사의 미얀마 수행기2-수행의 길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3567&thread=23)

 

 

이 세마디가 다 이었다고 한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선정수행의 지혜를 소상하게 설명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초급자에게 너무 심한 화두를 주었다는 것이다. 어쨋든 그 거사는 화두를 깨기 위하여 6개월을 피가 흐르도록 철철 수행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얻은 바도 컷다 한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이 두리뭉실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한 것이 아니고 관념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라 결론 내린다. 그렇게 된 이유는 수행하는 방법이 저마다 각각이고, 법의 맥이 달라서 통일된 매뉴얼도 없는 것도 커다란 이유로 본다.

 

열분에게 물어도 똑같은

 

그러다가 테라와다 불교를 접하면서 불교의 교리(5부 니까야, 아비담마, 청정도론 등 주석서)와 사념처 수행(위빠사나)을 하게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열분에게 물어도 똑같은 교리와 수행법을 지도해 주더라는 것이다.

 

도에 대하여 선사들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관념적으로 이야기 하였지만 남방의 선지식들은 모든 것이 간단하고 명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주된 이유가 반드시 경전이나 주석서나 스승에 의하여 검증된 내용을 이야기 할 뿐이지 자신의 깜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번뇌에 대한 것이라 한다.

 

선사들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번뇌망념이라 한다. 그래서 번뇌를 끊어 버려야 된다든가 망상을 조복받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수행법인 위빠사나에는 그런 말이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거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번뇌망상이 손님으로 오면 ‘망상’이라고 알아차리면 믿지 못하겠끔 곧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면 앞서 일어났든 괴로움이나 번뇌망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본성품과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法說)이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번뇌망상을 끊어 버리고 조복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는 손님으로 보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맞이 해 주어야 한다. 쫓아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번뇌와 망념을 쫓아 버리고 항복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서 대우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거짓말 처럼 번뇌와 망념은 사라지는데, 이는 마음이 한순간에 오로지 한가지 일만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알고 거사는 춤을 추듯이 기뻣다고 적고 있다.

 

Imee Ooi음악을 듣는 것처럼

 

이처럼 선지식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넷(Net)상에서 검색하다 보면 좋은 법문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 법문 중의 하나가 아눌라스님의 법문일 것이다.

 

아눌라 스님이 말하는 내용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마치 도란 도란이야기 하듯이 말하는 법문을 듣다 보면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도 더 깊이 알게 되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초기경전에 표현된대로 흰무명천에 물감이 배듯이속속 들이 들어 오는 듯한 느낌이다.

 

비구니 스님인 아눌라 스님의 음성은 매우 맑고, 분명하고, 투명하고, 청아하다. 거기에다 경전과 주석서에 바탕을 둔 법문은 누구나 쉽게 이해 할 수 있고, 알기 쉽게 매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몇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마치 Imee Ooi음악을 듣는 것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은 것은 부처님이 설한 근본진리를 말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이면에는 깊은 수행에서 나온 결과 때문일 것으로 본다. 그런 스님의 법문은 2003년에 설해진 것이다.

 

 

아눌라 스님 법문

[이해해법문01_카르마와 윤회A]

출처 : http://cafe.daum.net/kalyanamitta/KnDg/4

 

 

좋은 것은 끌어 당기고, 싫은 것은 밀치고

 

사람은 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태어 날까. 그리고 성향은 왜 또 다를까. 이에 대하여 윤회 때문이라 한다. 만일 윤회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성격 또한 천차만별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스님은 에드가 케이시가 말한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윤회와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아눌라스님이 말하는 열반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고통을 느끼는 것에서 부터 시작 된다고 한다. 열반은 추상적 개념으로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열반을 100%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 고통은 우리가 하루 종일 일하고 있는 곳에서 발생된다. 그 장소는 눈과, , , , 몸과 마음이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볼 때 사물을 인지 하게 된다. 그 순간 좋은 것은 끌어 당기고, 싫은 것은 밀치면서 탐심진심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간과해 버리는 무지가 일어난다.

 

이런 탐심과 진심, 무지 때문에 행위가 연이어 일어나게 되는데, 좋은 것은 잡아 당겨서 계속 연결 되는 것이고, 또 싫어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싫다는 마음 때문에 여러가지 행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행위들이 축적 되어져서 하나의 무더기가 형성 되는데 이을 빠알리어로 상카라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또는 형성이라 한다.

 

12연기를 보면 무지를 연하여 행위가 일어난다. 6근과 6경이 부딪쳤을 때 매순간, 매일 매일 일으키는 탐진치에 의하여 일으켜진 행위들이 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이 을 연하여 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식으로 연하여 몸과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전생에 만들어 놓은 행위의 축적물이 지금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으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여섯가지 구멍(육문)’을 통하여 일으키고 있는 순간 순간의 반응이 뭉치고 모여서 다음 생의 내 몸과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이 것을 윤회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순간 순간 깨어 있으면 위험스런 인과의 고리로 부터 벗어 날 수 있다고 말씀 하였다. 즉 업이 형성 되지 않으면 마음이 형성되지 않고 몸과 마음 또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또한 사라져 버린다. 이 것을 열반이라 하였다.

 

 

 

 

 

 

 

사진 : http://www.hephelper.com/helpful_hints.html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 일어난 줄 알고

 

현재의 몸과 마음은 과거 전생에서 부터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부모 탓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의도가 몸과 마음과 생각으로 지은 업을 지음으로서 다음생 또는 다음 순간에 겪어야 할 기쁨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습관 때문이다. 관성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둑놈이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관성의 힘, 업의 힘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업대로 산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 한 분이 부처님이다. 그 것은 부처님 가르쳐준 방법, , 위빠사나 명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명상해야 할까.

 

신구의 삼업이 일어 나는 곳이 바로 6구멍인데, 바로 이 6구멍이 외부세계와 만날 때 좋은 것은 잡아 당기고, 싫은 것은 밀쳐내는 탐심과 진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좋지도 싫지도 않았을 때 간과 하는 무지가 일어난다. 이런 무지를 우뻬까 웨다나라 하는데 이는 언제든지 탐심과 진심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매 순간 알아차리고 깨어 있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 일어난 줄 알고, 진심이 일어나면 진심이 일어난 줄 알고 놓아 버리면 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겪어야 할 일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이고, 해탈이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하게 되어질 때 이를 깨달음, 즉 열반이라 한다.

 

 

 

 

 

2010-12-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