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僧)은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 보디찌따의 삼귀의(Tisarana)
새해 첫날이다. 새해 첫날에도 글을 쓰는 것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아침예불을 거르지 않듯이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매번 꾸준히 한다는 것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다. 그날 번 돈을 매일 저축한다면 1년후에 큰돈이 될 것이고, 2년, 3년..10년 후가 되면 매우 큰돈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고 1년, 2년,... 10년 이상 운동한다면 항상 건강한 신체를 유지 할 것이다.
반면에 매일 술과 잡담, 신변잡기등으로 찌들어 살며 1년, 2년,... 10년이상 누적 된다면 갖은 질병에 시달리며 정신또한 피폐해 질 것이다. 이처럼 누적의 법칙은 무섭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중력(重力)의 법칙’일 것이다.
중력은 물체가 지구중심으로 받는 힘을 말하는데 이는 일상생활에서 중력은 느끼지 못하지만 우주적 차원에서 구조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력이 크면 클수록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결국 ‘블랙홀’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 하는 역할도 한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 누적 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다. 잘 못된 습관이 매년 누적 되어 결국 치명적인 결과에 이르게 하고, 그 행위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진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다. 반면에 좋은 습관이 누적된다면 그 힘으로 ‘최상의 행복’에 이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종교생활일 것이다.
담마(Dhamma)란 무엇인가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불법승 삼보일 것이다.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의지 할 만한 것은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빠알리어로 ‘담마(Dhamma)’라 한다. 한자어 ‘법(法)’으로 번역한 담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럴 때는 주석서나 사전을 찾아 보아야 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빠알리 용어 사전격인 주석서는 김한상님(필명: 수마나)이 역주한 ‘주해모음’이다. 이 주해 모음은 ‘한국명상원’에서 강의한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와 ‘초전법륜경’과 같은 법문집과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라는 교재를 주석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 되어 있다. 그 주해서를 보면 담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여 놓았다.
(1) 부처님의 가르침(Buddha-dhamma)으로서의 법
불·법·승 삼보三寶에 포함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고유명사 취급을 해서 Dhamma로 표기한다.
(2) 존재일반(sabbe-dhamma)으로서의 법
영어권에서는 이를 일반명사 취급하여서 dhamma로 표기한다. 이 법은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와 개념(施設, paññātti)으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➀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하며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등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을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고유의 특성이란, 특정 법이 가지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dosa)이라는 심리현상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법과 성냄이라는 법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탐욕이 가지는 거머쥐는 성질과 성냄이 가지는 밀쳐내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다른 것은 그 고유한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아비담마는 설명한다.
➁ 개념(施設, paññātti)
빤냣띠(paññātti)는 아비담마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가설(假說), 방편설(方便說)이란 의미의 시설(施說)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concept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ññātti)
개념들이 전달하는 뜻을 말한다. 예를 들면 책상, 의자 등의 용어나 명칭을 뜻한다.
(2) 이름으로서의 개념(名施設,nāma-paññātti)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ññātti)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이나 사상을 뜻한다. 이를 삿다 빤냣띠(sadda-paññatti)라고도 한다.
(주해모음, 김한상 역주)
주석을 보면 담마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고, 또하는 존재일반으로서의 법이다. 이 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을 ‘붓다담마(Buddha-dhamma)’라 하고, 영어권에서는 이를 ‘대문자’를 사용하여 ‘Dhamma’라 한다.
또 하나는 존재일반으로서의 법인데 이를 빠알리어로 ‘삽베담마(sabbe-dhamma)’라 하여 영어권에서 ‘소문자’를 사용하여 ‘dhamma’라 한다. 이런 삽베담마도 두가지로 나뉘는 데, 하나는 궁극적 실재로서 담마(paramattha dhamma)이고, 또하나는 개념으로서의 담마(paññātti dhamma)이다. 여기서 ‘빠라맛따담마’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82법’을 말하는데, 이는 고유의 성질(自相)을 가지는 근본법을 말한다.
반면에 ‘빤냐띠담마’는 실재 하지 않고 단지 이름과 명칭, 뜻으로서 개념 내지 관념을 말한다. 그런 것중에 하나가 초월적 존재나 절대자에 대한 명칭도 들어 갈 것이다.
이처럼 담마는 다양한 뜻이 있지만 불법승 삼보에 있어서 담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바퀴를 굴린다는 의미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담마는 때로 ‘바퀴’와 더불어 표현된다. 이를 합하여 ‘담마짝까(Dhamma-caccka)’라 한다. 이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법의 바퀴’를 말한다. 왜 법을 바퀴와 연관하여 표현하였을까. 그 것은 고대인도에 있어서 ‘전륜성왕’과도 관계가 깊다.
스리랑카 아상가교수의 불교tv강의에 따르면 고대인도에서 바퀴는 ‘정복’의 의미를 지녔다고 하였다. 부처님당시의 인도의 상황을 보면 여러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약육강식’의 시대이었다. 이런 ‘전국(戰國)시대’에 바퀴를 굴린다는 것은 결국 결국 전쟁을 뜻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왕은 언제나 전쟁을 할 수 있었고, 전쟁을 통하여 이웃나라를 합병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막강한 군사력을 지난 왕이 바퀴를 굴렸을 때 상대방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이었다. 하나는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과 또 하나의 선택은 그대로 무장장갑차의 바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왕이 바퀴를 굴려 이웃나라로 진격해 들어 갈 때 이를 저지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그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 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 법의 바퀴를 굴린 것이다.
아소까 차끄라
Ashoka Chakra
This is a photograph of the Ashoka Chakra at the Sun Temple, Konark, India. The Ashoka Chakra is the wheel of dharma and symbolises the teachings of Lord Buddha. The most visible use of the Ashoka Chakra today is at the centre of the National flag of India.
http://www.flickr.com/photos/36111610@N07/4019153174/
전륜성왕(rāja-Cakkavatti)이란
부처님이 출가를 하지 않고 세속에서 왕이 되었다면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전륜성왕의 의미는 무엇일까. 빠알리주해서에 따르면 전륜성왕은 ‘라자짜까와띠(rāja-Cakkavatti)’라 한다.
이는 rāja(왕)+cakka(바퀴)+vatti(굴리는)의 합성어로 ‘바퀴를 굴리는 왕’이라 직역된다. 그런데 이를 한자어로 옮길때 중국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이름 붙였다. 또 영어로 ‘Universal monarch’라 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전세계를 통치하는 제왕’이 될 것이다.
라자짜까와띠(rāja-Cakkavatti)를 직역하여 ‘바퀴를 굴리는 왕’이라 본다면 그 왕은 전차를 이용하여 이웃나라로 진격하여 모든나라를 정복한 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용어사전의 뜻풀이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고대 인도의 이상적 제왕으로 이 왕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늘의 차륜(車輪)이 나타나고, 왕은 그 선도 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대주(四大洲)를 평정한다고 한다. 불전에는 이 왕이 윤보(輪寶), 상보(象寶), 마보(馬寶), 보배보(寶貝寶), 여인보(女人寶), 장자보(長子寶), 주장신보(主藏臣寶)의 칠보(七寶)를 가지고 있으며, 또 부처님과 같은 32가지 상을 갖추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전륜성왕, 주해모음, 김한상 역주)
전륜성왕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대주를 평정하는 이상적 군주로서 부처님과 같은 32가지 특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전륜성왕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인도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아소까(Asoka, BC265~238)’대왕으로 보고 있다.
아소까대왕은 인도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 되는데 초기에 수많은 군사적 정복으로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서쪽으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일부, 동쪽으로 아삼주, 남쪽으로 미소레주까지 넓혀서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인도 마가다국의 제3왕조인 마우라아제국의 세번째 황제이다. 말년에 전쟁의 비참을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불교윤리에 따른 통치를 실현하였는데 불교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소까대왕을 전륜성왕이라 보고 있다.
전륜성왕이라 불리웠던 아소까대왕 역시 초기에 전차의 바퀴를 굴렸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쳐들어 갔을 때 선택은 두가지중의 하나이었다. 싸울 것인가 받아 들일 것인가이었다. 부처님 역시 바퀴를 굴리었다. 그런데 그 바퀴는 전차의 바퀴가 아니라 법의 바퀴(Dhamma-chakka)이었다.
법의 바퀴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인가또한 선택의 문제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식으로 ‘한 손에 칼을, 또 한손에 코란’을 내미는 식이 아니었다. 아상가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부처님이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라고 말하며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담마(법)의 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고,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과 직면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18)
부처님이 굴리신 법의 바퀴중의 대표적인 것이 ‘사성제’이다. 부처님이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 원인에 대하여 설하고, 멸하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 주고, 그 방법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여덟가지 길이 있다고 말씀 하였을 때 거부하는 사람이 없다면 부처님의 법의 바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을 성취하고 다섯명의 수행자들게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이래 지금까지 끊임 없이 굴러가고 있다. 과연 그 법의 바퀴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셀라여, 나는 이미 왕이네
담마의 최상의 왕이네
나는 담마의 바퀴를 굴리네
그 바퀴는 아무도 멈출 수 없내.
(맛지마 니까야: 92 셀라경)
법의 왕으로서의 부처님을 표현한 것이다. 전차의 바퀴를 굴리는 왕을 막지 못하듯이 법의 바퀴를 굴리는 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진리는 사성제를 말한다. 그 사성제는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성스런 진리(Ariya sacca, 아리야삿짜)’이다. 그 것도 오로지 하나만이 아닌 ‘네가지’ 진리이다. 그래서 네가지의 성스런 진리라 해서 빠알리어로 ‘짯따리 아리야삿짜니(cattāri ariyasaccāni)’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스런 가르침이다. 성스런 가르침으로 부처님이 경험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한 제자가 있다면 그 역시 ‘성스런 제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부처님의 제자들을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성자(ariya-puggala)라 한다. 따라서 불자들이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성스런제자들(Sangha)이라 하여 세가지 보배로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가지 보배에 대하여 찬탄하는 게송이 삼귀의이다. 이런 삼귀의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것에 대하여 공통이지만 테라와다전통과 우리나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상가(Sangha)’에 관한 것이다.
현대문 귀의승(歸依僧)은 횡포이자 코메디
상가에 관한 빠알리어 삼귀의는 ‘상강사라낭갓차미(Saṅghaṃ saraṇaṃ gacchāmi)’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귀의승(歸依僧)’이 된다. 그런데 이 귀의승을 우리말 한글로 번역한 과정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변질 되었다.
빠알리어 상가(Sangha)의 의미를 오로지 스님들만의 것으로 번역되어 불리워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하였다.
특히 승가(Samgha, 僧伽)에 대한 재해석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승가의 존재방식은 이미 부처님의 승단의 형태이거나 역사적으로 변모되고
확대 해석된 공동체의 형태를 일탈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민용,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ㆍ한국불교연구원 원효학당교수, 서경수ㆍ이기영의 유신론, “불교 유신”을 다시 생각하다.)
2010년 10월 1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불교유신을 다시 생각하다’라는 낭독회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발제자중의 한 사람이 승가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 하고 있다. pdf자료를 보면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더욱 찬불가에 이르러 귀의승(歸依僧)을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란 현대문으로 번역시킨 횡포는 하나의 희극으로 보인다. 승가는 실로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을 정신적인 수련 공동체로 자리매김 할 때 불교 수련과불교적 생활은 거의 모든 인간 활동에 걸친 무한한 가능성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민용,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ㆍ한국불교연구원 원효학당교수, 서경수ㆍ이기영의 유신론, “불교 유신”을 다시 생각하다.)
한자어 귀의승을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로 고친것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승가사회의 ‘횡포’이자 하나의 ‘우스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초기불교가 도입되기 전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나 이제 ‘상강사라낭갓차미(Saṅghaṃ saraṇaṃ gacchāmi)’가 상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이상 ‘스님들’이라는 말 대신 ‘승가’로 고쳐야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스님들만의 불교가 아닌 사부대중의 진정한 불교로 재탄생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재가불자도 단지 ‘신도’라고 불리우는 대신 ‘재가수행자’로 불리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불교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한국불교개혁의 첫 단추는 상가의 재해석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처럼 상가가 사부대중의 상가라면 귀의의 대상으로서 상가는 ‘성스런 상가’이다. 스님들 그 자체가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 성스런 사성제의 가르침으로 성스런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들이 귀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귀의처로서 상가에대한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의 승가는 훌륭한 길을 수행하며, 정직한 길을 수행하며, 진리의 길을 수행하며, 합당한 길을 수행한다. 이러한 부처님의 제자들의 승가는 네쌍으로 여덟가지로 되어 있고 공양받을 만하며, 공경받을 만하며,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의 복밭이다.
(상윳따니까야11, 삭까 상윳따 1:3)
이처럼 부처님은 명백하게 부처님의 제자들의 승가를 사쌍팔배의 성자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반드시 출가자에 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가자도 누구나 부처님의 성스런 가르침에 따라 깨달으면 복밭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상가는 스님들만의 상가가 아니고 사부대중의 상가이며, 더구나 귀의의 대상은 성스런 상가라는 것이다.
보디찌따그룹의 띠사라나(Tisarana, 삼귀의)
성스런 상가를 포함하여 부처님과 가르침에 의지 하는 것이 삼귀의 이다. 이런 삼귀의는 테라와다불교전통의 국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빠알리어로 세번낭송한다.
Ti-Saran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Buddham Saranam Gacchâmi.
Dhammam Saranam Gacchâmi.
Sangham Saranam Gacchâmi.
Dutiyampi Buddham Saranam Gacchâmi.
Dutiyampi Dhammam Saranam Gacchâmi.
Dutiyampi Sangham Saranam Gacchâmi.
Tatiyampi Buddham Saranarm Gacchâmi.
Tatiyampi Dhammam Saranam Gacchâmi.
Tatiyampi Sangham Saranam Gacchâmi.
띠사라나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쌈 붓다싸
붓당 사라낭 가차미
담망 사라낭 가차미
상강 사라낭 가차미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삼귀의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가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이에 대한 아름다운 음악을 유튜브동영상에서 발견하였다. 음악을 통하여 전세계에 부처님의 바른 법을 전파하는 중국계 싱가폴 보컬그룹인 ‘보디찌따(Bodhicitta, 菩提吉他)’그룹이다.
차분하게 빠알리어로 창송되는 띠사라나(Tisarana, 삼귀의)를 드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붓다, 담마, 상가가 의지처(Homeage)이자 피난처(Refuge)가 되는 것 같다.
보디찌따그룹의 띠사라나(Tisarana, 삼귀의)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pTY9PpC52Y4&feature=related
작곡/창송:보디찌따(Bodhicitta, 菩提吉他)
보디찌따그룹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로서 음악을 통하여 불법을 전파하기 위하여 결성된 그룹
그룹멤버: 梁韻誼(Yun Yi), 張榕倪(Wendy), 劉偉雄(Bear, 謝德勳(Karamen)
보디찌따그룹 홈페이지 : http://www.bodhicittaproductions.com/ Bodhicitta Productions菩提吉他製作室 合十
일본의 하나마츠리(花祭)행사에서
빠알리 삼귀의가 과연 우리말 삼귀의를 대체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본의 어느 동영상에서 빠알리어 삼귀의로 불교의식을 하는 것을 보았다. 유튜브동영상으로 확인된 것을 보면 일본의 부처님오신날이라 볼 수 있는 ‘하나마츠리(花祭)’행사에서 한문투나 일본어 삼귀의가 아닌 빠알리어 삼귀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마츠리(花祭)에서 일본불교의 빠알리어 삼귀의 낭송장면
출처 : 유튜브동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v=IluyZQtqtVM
동영상의 팔정도 심볼을 근거로 하여 이 동영상은 ‘전일본불교회’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전일본불교회의 홈페이지 (http://www.jbf.ne.jp/)에 따르면 현재 일본유일의 ‘불교연합체’라고 소개되어 있다.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불교에서 58개의 종파와 각종불교단체를 포괄하여 성립된 ‘재단법인 전일본불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관심사항은 삼귀의 관한 것이다. 동영상에서 빠알리어 삼귀의로 의식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三帰依文とは何ですか?
今から約2,500年前、お釈迦さま在世の時、当時のインドの人々は、この三帰依文を唱えて、お釈迦さまの弟子として入門の儀式を行っ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以来、この三帰依文は広く世界の仏教徒によって大切に唱え継がれています。「仏に帰依し奉る」の「仏」は、お釈迦さまです。お釈迦さまを尊いみ仏と敬って、心の拠り所といたします、そうした思いを込めて「仏に帰依し奉る」と唱えます。「法に帰依し奉る」の「法」というのは、お釈迦さまの説かれた真理・教えのことです。「僧に帰依し奉る」の「僧」というのは、日本では僧侶というと一人のお坊さんを指しますが、この僧は僧伽(そうぎゃ)、インドの古い言葉(サンスクリット)でサンガといい、仏の教えを学び伝える人々の集まりを指します。つまりこの「仏に帰依し奉る 法に帰依し奉る 僧に帰依し奉る」という三帰依文は、み仏であるお釈迦さまを敬い、その説かれた教えを大切に守り、そしてその教えを学ぶ人々の集まりを大切にいたしますと唱えているのです。この「仏」「法」「僧」を仏教では三宝(さんぼう)といいます。
(출처: http://www.jbf.ne.jp/)
문구를 보면 ‘僧に帰依し奉る’ 에 대하여 승을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승려’로 알고 있지만, 이는 승가(僧伽, サンガ) 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삼귀의는 어떤 방식으로 낭송할까. 홈페이지에 설명되어 있는 방식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오는 낭송방식이고, 또 하나는 빠알리어로 낭송하는 방식이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출처 : http://www.jbf.ne.jp/b10/index.html
일본어판을 보면 ‘화엄경 정행품’에서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다. 빠알리어 판을 보면 빠알리어로 ‘한번만’ 낭송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영상에서 본 것과 같은 내용이다.
또 하나의 예는 일본 진종(真宗)의 대곡파(大谷派)라는 곳에서 수계법회식의 식순을 보면 빠알리어 삼귀의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第1部 讃歌・雅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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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常楽急 |
출처 : http://guga-gubutsu.com/k7_sougou/shinran750omathiuke.html
식순에 한문 삼귀의 대신 ‘三帰依(パーリ文)’즉, 빠일리어 삼귀의가 삽입되어 있고, 실제로 유튜브 동영상(http://www.youtube.com/watch?v=kjrTXo9gpfY)을 보면 삼귀의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식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와 같이 “나모 땃사~” 부터 시작하여 삼귀의를 삼세번 모두 하는 것은 아니다. “붓당 사라낭~” 부터 시작하여 오로지 단 한번만 시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승(僧)은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테라와다불교를 도입한 역사가 훨씬 길다. 흔히 ‘교학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일본불교에서 빠알리삼장의 번역이 완료된 해가 ‘1941년’이라 한다.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따르면 일본에서 40명의 학자들이 6년간 번역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최초로 완역하었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8년 최봉수박사가 율장인‘마하왁가’를 번역한 것이 최초이고, 그후 전재성박사가 1999년 경장인 상윳따니까야의 완역을 시작으로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잇따른 번역으로 인하여 빠알리어를 원전으로 하는 초기불교경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는 이제 걸음마 단계로서 불과 몇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하여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보다 60년이 빠르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빠알리 삼장을 완역하여 실제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불교의식에 있어서 빠알리어 삼귀의를 낭송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에서 정착된 것으로 보여지는 빠알리어 삼귀의의 구체적 번역 내용을 보면 승가에 대한 정의 또한 명확하다. 일본사이트에서 확보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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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ッダ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ダンマ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サンガ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私は仏陀に帰依いたします。
私は法(真理)に帰依いたします。
私は僧(聖者の僧団)に帰依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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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ゥティヤン・ピ ブッダ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ドゥティヤン・ピ ダンマ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ドゥティヤン・ピ サンガ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再び私は、仏陀に帰依いたします。
再び私は、法(真理)に帰依いたします。
再び私は、僧(聖者の僧団)に帰依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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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ティヤン・ピ ブッダ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タティヤン・ピ ダンマ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タティヤン・ピ サンガン・サラナン・ガッチャーミ
三度私は、仏陀に帰依いたします。
三度私は、法(真理)に帰依いたします。
三度私は、僧(聖者の僧団)に帰依いたします。
출처 : http://www.j-theravada.net/sankie.html
이 문구를 보면 ‘승(僧)’에 대하여 ‘성자의 공동체(聖者の僧団)’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삼귀의에서 귀의의 대상인 ‘승(僧)은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임에 틀림없다.
2011-01-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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