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하느님은 진공(眞空)이라는데, 삼위일체와 삼신사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 6. 15:04

 

 

 

 

하느님은 진공(眞空)이라는데, 삼위일체와 삼신사상

 

 

 

 

유명한 목사의 동영상 설교를 본 적이 있다. 그 목사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설명하였는데 신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드믈다고 하였다. 매번 가르쳐 주지만 뒤돌아서면 잊곤 하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와 유사한 개념이 불교에도 있다. 그 것은 삼신(三身)사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신은 화신(化身), 법신(法身), 보신(報身)을 말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사상과 마찬가지로 불자들은 삼신사상에 대하여 잘 모른다. 알려 주어도 돌아서면 금방잊어 버린다는 사실은 기독교신자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나 삼신사상은 누군가 자세히 설명해 주거나 관련 글을 보지 않는한 그 개념을 파악 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삼위일체와 삼신사상이 유사하다는데

 

기독교인들은 불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두가지 관점으로 본다. 하나는 불교가 기독교의 아류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교의 사상은 모순이라고 보는 것이다. 전자는 주로 대승불교를 비판할 때이고, 후자는 초기불교를 비판할 때라 보여진다. 왜그럴까.

 

불교를 기독교의 아류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삼신사상이다. 자신들의 삼위일체사상과 비교하였을 때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최근 불교계인터넷신문의 기사에서 보았다.

 

외국의 유명한 기독교신학자와 선사들간에 벌어진 종교간 대화에서 본 기사의 내용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니터 교수는하느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며 기독교의하느님을 마치 대승불교의 삼신(화신법신보신) 사상과 유사한 인격적 하느님 말씀·진리의 하느님 ·성령·에너지·에너지·기 등 세 가지로 구분했다.

 

([현장] 신학자, 수좌들과법거량등 종교간 대화,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00)

 

 

 

 

 

 

신학자, 수좌들과법거량등 종교간 대화

사진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00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인데. 이는 불교의 법신과 화신과 보신의 삼신사상괴 유사하다고 신학자는 말했다는 것이다. , 성부는 법신에 대응되고, 성자는 화신에, 성령은 보신에 대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관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에 한 술 더 떠 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니터 교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불교에서의일심(一心)’과 같이 이해하는 것인가라는 지환 스님의 질문에 그는불성(佛性)은 그리스도성과 비슷하면서 유추할 수 있는 개념관계로 비슷하다고 답했다.

 

([현장] 신학자, 수좌들과법거량등 종교간 대화,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00)

 

 

그 신학자는 불성그리스도성이 비슷한 것으로 유추하여 불교의 일심(한마음)’과 기독교의 하느님은 같은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외국신학자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다. 불성과 그리스도성, 일심과 하느님은 정말 같은 것일까. 먼저 불성에 대하여 살펴본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불성은 불교가 중국화하였을 때 중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불교사상이라한다. 영어로 붓다네이쳐(Buddha nature)’라고도 표기 되는 불성사상은 인도에 없는 사상이다. 그 대신 인도에서 여래장사상이 있었다.

 

여래장사상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런 여래장 사상은 마음의 고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번뇌는 객진에 불과하다고 하는 자성청정심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청정심은 본래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법신의 보편성과 자비를 근거로 하여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는 사상이 생겨났는데 이를 보리심이라 한다. 따라서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이이라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보리를 깨달아 부처가 될 가능성을 이야기 한 것이 여래장 사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불성사상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본래깨끗한 마음속에 부처가 될 성품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성품이라는 용어는 가장 중국적 용어라 한다. 이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진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여래장과 불성의 차이는 가능성이 현실화 된 것을 뜻한다.

 

불성은 중국화된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현세에 모든 것을 다 이루고자 하는 현실주의로서 현실사상이 반영된 결과이다. 또 중국의 전통사상인 성품사상이 불교에 개입되어 만들어진 것이 불성사상이다. 이처럼 불성사상은 오로지 중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사상이다.

 

그런데 이 불성과 기독교의 그리스도성이 비슷한 것이라고 대담에서 기독교신학자는 말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승의 일심이라는 것이 결국 하느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중국불교의 불성이 그리스도성과 같고, 대승불교의 일심이 하느님과 같은 것이라면 결국 불교와 기독교는 똑같다는 이야기일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의 신부들 중에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통역을 맡은 정현경 교수는미국에는 숭산 스님 제자들이 신부들과 같이 명상을 하는 그룹이 있고, 기독교 신부들 중에는하느님은 진공(眞空)이시다라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현장] 신학자, 수좌들과법거량등 종교간 대화,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00)

 

 

불교의 진공(眞空)이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다는 것이다. 진공이란 무엇일까. 문자그대로 진짜공을 말한다. 그렇다면 진짜공은 무엇을 말할까.

 

진공묘유(眞空妙有)

 

불교tv에서 동국대 김종욱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공사상이 출현한 배경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 그 때 당시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나온 사상이 공사상이 출현하게된 이유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유부에서 주장하는 ‘75법의 실체가 있다는 자성에 대하여 공의 논리로 깨뜨린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제압하기 위해서 이론의 모순에 대하여 파고들어가 독특한 논리를 전개한 것이 공사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공사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공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연기라고 하는 것이 관계성을 말하는데, 고립된 실체성이 있다면 자성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자성이라 주장한다. 무자성은 비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공()이라 한다.

 

비운다는 것은 공의 의미인데 그렇다면 무엇을 비운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것이고,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고립된 실체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연기=관계성=무자성=과 같은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흔히 일체가 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공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아도 공할 뿐만아니라 법도 공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일체가 공하다는 의미는 공 자신도 공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꾸 비워져 나가다 보면 진짜 공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진공(眞空)이라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진공속에서 존재 그 자체가 드러난 것으로 본다. 지금 보고 있는 산이나 물이 모두 진공속의 존재가 드러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공의 논리로 따지면 산은 산이 아니었던 것이, 진공묘유의 논리로 따지면 산은 역시 산이 되는 것이다. , 강한 부정이 대긍정이 되어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처럼 비우고 또 비워서 진공이 되면 진공속에 존재 그 자체가 들어나게 되는데 이를 진여(眞如)’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 존재의 실상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진여에 성품을 붙여서 사물에 대하여 법성이 있다고 말하고, 유정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무정물이든 유정물이든 모두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이고, 산천촉목 성불도 가능한 것이다.

 

산천초목이 비록 무정물이만 자신의 고유성이 잘 드러날 때 성불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모두 부처가 될 성품인 불성이 있기 때문에 본래의 깨끗한 성품 즉, 자성을 볼 수 있다면 성불(견성성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국불교의 특징이다. 

 

기독교와 초기불교는 왜 공통점이 없을까

 

이처럼 대승불교와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진공과 불성이 결국 하느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초기불교에서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처럼 오해를 살만한 삼신사상이나 공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때문일까 기독교인들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공격한다. 무아이면서 윤회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논리이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종교의 기반인 창조론진위여부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영혼을 인정하며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교리와 영혼을 부정하고 윤회를 인정하는 초기불교의 교리가 완전히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철저하게 자아나 영혼을 부정한다.  

 

자아와 영혼을 부정하는 초기불교와 이를 인정하는 기독교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렇게 초기불교와 기독교는 공통점이 보이지 않을까. 그것은 불교의 성립과도 관계가 있다.

 

고대인도에서 불교가 성립된 이유 중의 하나는 브라만교를 비판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말하는 브라만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망어(큰 거짓말)죄를 짓는 것이라 비판 하였다. 또 영원히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브라만과 합일한다는 범아일여 사상도 비판하였다. 그 대신 부처님은 연기법을 주장하였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설명하였는데 불교의 근본교리인 5, 12, 18, 22, 4성제, 12연기와 같은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 실재 하지 않는 것을 개념으로 보았다. 그런 개념 속에 브라만, 영혼, 자아처럼 이름과 명칭만 붙여져 있을 뿐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오온등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체한 것은 개념을 부수기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니 성부, 성자, 성령처럼 이름 붙여지고 명칭되는 것 역시 개념 내지 관념으로 본다.. 따라서 초기불교와 기독교는 그 어떤 연관성도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정반대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논리로 따진다면 기독교의 교리는 개념타파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와 기독교은 왜 공통점이 많을까. 그 가장 큰 이유는 공사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대승불교의 업보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따르면 일체가 공한 것이라 하였다. 나도 공(我空)하고 법도 공(法空)하기 때문에 예외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공 그자체도 공한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어떤 진리나 성인들의 가르침 역시 공한 것이 되고 만다.

 

공의 논리에 따르면 부처님이 설한 5, 12, 18, 22, 4성제, 12연기 역시 공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파기 되었는데 이 파기의 논리가 바로 공이다. 이런 공사상을 집대성한 이가 제2의 석가라 불리우는 나가르주나(용수)’이다. 이 나가르주나에 대하여 인도불교사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제일의제에 입각하여 종래의 사제, 십이연기, 열반, 업등의 교설을 비판하고...

(인도불교사, 경서원, 권오민교수역)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여 성립되었듯이, 대승불교 역시 초기불교를 비판하여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비판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나가르주나이다.

 

나가르주나는 부처님이 설한 근본교리를 모조리 공의 논리로 비판 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십이연기등을 비판하고 성립된 대승불교는 공의 논리를 더욱 더 발전시켰다.

 

공사상은 여래장사상, 어뢰야식으로 특징되는 유식사상, 여래장 사상과 아뢰야식을 동일시 하면서 진여의 전개로 논술한 대승기신론의 일심(한마음)사상등으로 발전하였다. 급기야 공사상은 인도에서 밀교로, 중국에서 법성과 불성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인도에서 밀교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공성의 인식이 지혜이고, 지혜를 실현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의 상태를 그대로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러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 bodhicitta)’이라 하였다.

 

이처럼 밀교화 되고, 중국불교화된 불교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좋은 먹이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승불교의 참나성령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자 니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안에참된 나가 있다고 할 때,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 안의 불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은그리스도성을 구현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장]선지식과 신학자, 종교간 소통을 말하다(), 진제스님-폴 니터, ‘대장경 천년, 밀레니엄 평화토크’,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76)

 

 

이처럼 참나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하나인 성령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를 기독교의 아류로 생각하고 있고, 부처님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인류를 위해 내려운 구원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대승불교의 업보라 본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공한 것으로 비판 한 결과 다시 브라만교로 되돌아 가는 형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비슷한 것으로 오해 받고 있는 삼신사상은 어떻게 생겨 나게 되었을까.

 

삼신사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삼신사상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은 4세기 부터 발전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신사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는 인도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화신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화신사상은 유일신의 신앙을 설하면서 그 안으로 각종신앙을 흡수하기 위한 방법으로 힌두교발전의 유력한 무기가 되었다.

(인도불교사, 경서원, 권오민교수역)

 

 

불교에 밀려 숨을 죽이고 있던 브라만교가 힌두이즘으로 변신하여 모습을 나타낸 것은 대승불교의 출현과 거의 같은 시기라 보여진다.

 

힌두이즘의 특징은 비쉬누쉬바라는 두개의 신에 대한 숭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비쉬누는 일신교적 유일신 사상으로서 수 많은 화신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인도문화에 퍼져 있는 각종신들을 흡수하기 위한 방편이라 한다. ‘아바타라고도 불리우는 화신중에 부처도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힌두이즘에 자극 받아 대승불교 역시 화신사상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붓다가 바이로차나의 아바타(화신)로 보는 것이다. 화신으로서 부처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대승경전이 아마도 법화경일 것이다. 박경준 교수의 논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법화경》에서는 이러한 인간 붓다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폭로된다. 석가세존은 보드가야에서 처음 붓다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겁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구원실성] 본래부처[본불], 다시 말해 구원본불(久遠本佛)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개(((()하기 위한 근본원(根本願)을 가지고 태자의 몸으로 화현하였고, 열반에 들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며, 여래의 수명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사상적 차이 / 박경준 , 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88)

 

 

법화경에서의 부처님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음을 성취한 구원실성의 법신불이지만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알려 주기 위하여 일부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방편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바타(화신)로서 부처님에 대한 대표적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법신불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 되어 있을까.

 

법신불에 대한 대표적인 경전은 화엄경이라 볼 수 있다. 인도불교사에 언급된 법신불로서 부처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붓다 성도 후 삼칠일(21)동안 체험한 삼매의 내관으로 여기에서 나타난 세계는 비로자나(Virocana, 大日)불의 현현에 불과하며,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모두 중중무진의 연기로서, 바로 비로자나불이다. 이 비로자나불을 교리적으로 말한다면 법신이다. 법신은 진리 그 자체로서 붓다, 곧 붓다이면서 법인 것이다.

(인도불교사, 경서원, 권오민교수역)

 

 

인도불교사 책에 따르면 비로자나는 법신인데 진리 그 자체라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 기독교에서도 진리 그 자체를 하느님이라 한다. 거기에 덧 붙여 선 그 자체, 미 그 자체라 한다. 이처럼 진선미 그 자체를 하느님이라 하는 데,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유이기 때문에 결코 무일 수 없다는 것이다. , 존재 그 자체를 하느님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사막의 부족신을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이론을 접목한 결과 중세의 신관이 완성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본다. 그런데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느님과 진리 그 자체로서의 비로자나는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이다.

 

화신과 법신과 더불어 보신사상이 있는데 이는 정토계열의 경전에서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 아마도 아미타경일 것이다.

 

아미타경은 아미타불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아미타불은  법장비구가 보살로서 발심할 때 중생제도를 위한 서원을 오랜 수행 끝에 성취하였다는 부처님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장비구의 서원을 일종의 보신으로 본다는 것이다. 보신으로서의 부처님은 아미타불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각종 보살도 해당된다. 이런 보신사상은 대체 어디에서 불교로 들어 왔을까.

 

이에 대하여 인도불교사 책에서는 그 때 당시 힌두이즘의 비쉬누파로 보고 있다. 또 더 멀리는 페르시아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이는 페르시아인과 고대인도의 아리아인은 같은 뿌리라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들어 올 때 아리아인의 한 분파는 페르시아에 들어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페르시아인과 인도의 아리아인은 역사와 신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셈족의 사막종교는 페르시아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역시 뿌리는 페르시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의 삼신사상과 기독교의 삼위일체사상이 유사해 보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취약한 교리와 기독교 따라하기

 

한국불교가 위기라 한다. 특히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한 기독교와 공존하고 있는 것 자체가 위기인 것이다. 그들은 틈만 나면 불교를 말살하려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 중에 오강남교수는 참나와 하나님은 같은 것이라 주장하고, ‘이찬수교수는 불교와 기독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 고 불교평론에서 주장하였다. 그처럼 같은 것이라면 그들은 불교로 개종을 하여 같은 것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불교를 기독교의 아류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바탕에 삼위일체와 삼신사상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본다. 그래서 진공이 하느님이라느니, “불성과 그리스도성은 비슷한 것이라고 비교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대승불교의 교리는 한국적 상황에서 취약하기 그지 없다. 마치 바람앞에 등불처럼 보인다. 거기에다 대승불교는 기독교 따라하기에 바쁘다. 대표적으로 기도를 들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나 사용하는 용어인 기도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가 하면 기복을 조장하는 행태 역시 기독교따라하기의 전형이다. 이러다 보니 기도의 대상만 바꾸면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경우 끊임 없이 불교와 기독교의 일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초기불교에 대하여 일치점은 찾지 못하고 있다.

 

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해방을

 

기독교와 대승불교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하지만, 기독교와 초기불교를 비교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 것은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초기불교를 비판하며 성립된 대승불교가 기독교와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브라만교의 후신인 힌두이즘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 본다.

 

한국적 상황에서 불교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교리적으로 취약한 대승불교 보다 교리적으로 확고한 초기불교가 널리 보급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개념과 관념의 타파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오온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십이처, 십팔계, 이십이, 사성제, 십이연기를 설한 것은 결국 개념(paññatti, 빤냣띠)’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오로지 명칭이나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자와 같은 개념을 부숨으로서 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준 것이다.

 

 

 

 

2011-01-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