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전조와 로까뷰하(Lokabyuha, 世莊嚴)
종말의 전조일까
아침기온이 영하10도라 한다. 이런 날씨가 지난 연말이래 근 20여일 째 이어지고 있다. ‘삼한사온’은 실종된지 오래고 언제 날씨가 풀릴지 알 수 없다. 마치 봄날이 언제이었나 싶을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산하대지을 보면 마음까지 얼어붙는 것 같고, 인심 또한 사나워 지는 것 같다. 이처럼 ‘인정사정’을 보아주지 않는 날씨에서 또 하나 우울한 소식은 ‘구제역’에 관한 것이다.
닭공장이나 돼지공장에서 출하를 기다리는 상품에 문제가 발생하여 즉, 불량이 발생하여 폐기처분하는 것이 살처분이다. 이미 백만마리에 달하는 소나 돼지가 ‘살처분’ 되었거나 심지어 생매장을 당하고 있다고 하니 이 모두 인간이 저지른 ‘업보’라 여겨진다. 생명이 있는 것들을 마치 공산품처럼 상품화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살처분보다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새나 동물의 ‘떼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를두고 환경론자들은 지구의 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날 ‘전조’가 시작 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진, 해일, 태풍, 가뭄, 홍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인간은 불가항력적이고 무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인류의 종말이 온 것 처럼 느낀다. 그런데 이와같은 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전조’가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쥐떼’들의 이동 같은 것이다.
쥐떼들이 이동한다는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동물들의 이동이나 집단 떼죽음은 앞으로 다가올 커다란 재앙을 예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거기에다 자연재해까지 겹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괴질’이 유행하였을 때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생각나게 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시간관은 어떻게 다른가
종말이란 말은 종교에서 가장 잘 사용되는 말이다. 언제 어느 때 세상이 곧 끝날 것임을 암시하며 종말론을 이야기하면 심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믿게 된다. 더구나 종말의 징조나 징표를 보여주면 더욱 더 종말을 확신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우주적 종말론’을 들 수 있다. 이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종말론’으로서 예수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도 종말론이 있을까.
종말이라는 것은 ‘시작’을 전제로 한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창조라는 시작이 있었다면 당연히 종말로 끝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시간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원’으로 설명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이 점은 기독교의 직선적인 시간관과 대비된다. 기독교에서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끝점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직선적 시간관을 보면 시작점이 있고 반드시 끝점이 있다. 기독교의 시간개념으로 말한다면 시작점은 창조가 되고, 끝점은 종말이 된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가 명확하고 시간은 마치 화살처럼 미래를 향하여 날아 가는 개념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 보다 미래를 더 기대하고 바라본다.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불TV, 김종욱 교수,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09
기독교의 시간관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종말론을 바라는 것인지에 대한 답이라 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간에 대하여 마치 ‘굴렁쇠’처럼 굴러가는 하나의 원으로 보기 때문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굳이 시작점 또는 창조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자신이 ‘찍는 점’이 시작이 되고 창조가 된다. 즉,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끝점 또는 종말은 어디쯤에 있을까.
끝점이나 종말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멈추는 시점이 끝점이자 종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순환적인 시간관에서 어느 점을 찍어도 모두 ‘중심’이 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지금 여기’, ‘매 순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불에 의한 파괴, 겁화
불교적 시간관은 영원회귀의 순환적 시간관이라 하였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주이멸’이라 하고,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을 ‘생노병사’라 하듯이, 우주 또한 일어났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이를 ‘성주괴공’이라 한다. 그런데 성주괴공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초기경전에서 이를 ‘겁’의 단위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겁화’란 무엇일까.
과거 부처님들이 숙명통으로 본 우주는 성주괴공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우주가 성주괴공을 거듭하였는데 그 시간적 단위가 겁(kappa)인 것이다.
청정도론에 표현된 우주의 성주괴공은 수축하는 것à 수축한 상태로 머무는 것à 팽창하는 것à 팽창하는 상태로 머무는 것으로 각 1아승지겁이 걸린다. 모두 4아승지겁이 되면 하나의 사이클이 완성되는데 이를 1대겁 (maha-kappa, 마하깝빠)이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에 의한 파멸이 있게 되는데 그 것이 ‘괴겁’이다. 이처럼 불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파괴되는 현상을 ‘겁화’라 한다. 괴겁이 시작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괴겁이 시작되면 가장먼저 볼 수 있는 현상이 기상이변이다. 이는 현대의 기상이변현상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현상을 볼 수 있을까.
로까뷰하(Lokabyūha, 世莊嚴)
세계가 불에 탈 때 어떤 징조가 있을까. 가장 먼저 우주에 한 차례 큰 비가 내린다. 이후 새순들이 돋아 소가 뜯어 먹고 자랄 때 쯤 천둥소리에도 불구 하고 오랜 세월 동안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해동안, 여러 백년동안, 여러 천년동안, 여러 백천년(10만년)동안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 기상이변이 발생한다.
사진 http://www.itsyourworld.org/assnfe/ev.asp?ID=2797
백천년(10만년)동안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고 모든 것이 마르고 타들어 가는 종말적 상황에서 어떤 이상한 무리들이 나타난다. 그들에 대한 묘사를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하였다.
로까뷰하(Lokabyūha, 世莊嚴)라고 이름하는 욕계의 신들이 백천년이 지난 뒤 겁의 종말이 시작될 것임을 알고서 관모를 풀고, 산발한 머리털과 비참한 얼굴로,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물들인 옷을 입고 아주 보기 흉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다니면서 이와같이 알릴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 지금부터 백천년이 지난뒤에 겁의 종말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대해도 마를 것입니다. 이 대지와 산의 왕인 수미산도 불타고, 멸할 것입니다. 세상의 멸망은 범천의 세계까지 이를 것입니다.
여러분, 자애를 닦으십시오. 연민과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을 닦으십시오. 어머니를 봉양하고 아버지를 봉양하고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십시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세상을 장엄한다는 뜻의 ‘로까뷰하’라는 신들이 나타나 겁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들은 신통력이 있어서일까 미래의 비참한 모습을 가르쳐 주며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부모를 공경하며 자애와 더불어 사무럄심을 닦을 것을 강조한다. 그런 사무량심을 닦으면 겁화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범천에 태어 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악처에서 선처로 어떻게 태어날까
그런영향이어서일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모두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자애수행등을 하여 욕계천상에 태어난다. 또 그곳에서도 선을 닦아 범천에 태어나게 된다. 심지어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도 천상에 태어난다. 그렇다면 지옥중생들이 지옥을 빠져나와 어떻게 선처에 태어 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은 미래에 겪어야 할 업(받는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으로 인해 천상에 태어난다. 왜냐하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에 유전하는 중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설령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업이 다하면 아직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이 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정법이 없던 시절에 선을 닦아 태어날 수 있는 한계가 범천(색계초선천)까지이다. 그런데 그런 범천도 겁화로 부터 안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겁화가 일어나면 색계초선(범천)까지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태워버릴까.
한개의 ‘불꽃’이 되어
로까뷰하(Lokabyūha, 世莊嚴)가 나타나서 머리를 풀고 울면서 자애등을 닦으라고 이야기 한 것은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은지 백천년(10만년)이 지났을 때이다. 그런데 그 후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된다.
어느 날 하늘에 태양이 두개 떠오르게 된다. 그 결과 밤과 낮의 구분이 없어진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작은 강물은 모두 말라버린다. 세 번째 태양이 떠 오를 때 큰 강물도 말라버리고, 네 번째 태양이 떠 오를 때 히말라야의 일곱호수가 말라버리고, 다섯 번째 태양이 떠 오를 때 큰 바다에 손가락 한 마디 적실 물도 없고, 여섯 번째 태양이 떠 오를 때 전 우주는 ‘한 무리의 연기’가 되고, 일곱 번째 태양이 떠 오를 때 전 우주는 ‘한개의 불꽃’이 된다.
이렇게 일곱개의 태양이 떠 올라 하나의 불꽃이 되어 지옥에서 부터 인간, 천상에 이르기까지 온 우주를 태워버리는데 그 불꽃은 드디어 색계초선(범천)까지 이른다. 자애수행등을 열심히 하여 가장 멀리 도망쳐 왔건만 범천도 겁화는 면할 수 없다.
마침내 그 불꽃은 색계초선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태우고 색계 2선천인 광음천에서 멈춘다. 여기까지가 불의 의해 세계가 파괴되는 겁화인데 이를 ‘괴(壞)’라 하고 1아승지겁 동안 계속된다. 이후 수축한 상태로 머무는 것을 ‘괴주(壞住)’하 하며 1아승지 겁동안 계속되고, 다시 우주가 생성되는 것을 팽창이라 하는데 이를 ‘성(成)’이라 하고 1아승지 겁동안 계속되고, 팽창하는 상태로 머무는 것 ‘성주(成住)’라 하는데 1아승지 겁동안 계속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성주괴공
성주괴공 |
기 간 | |||
1 |
수축하는 것 |
괴(壞) |
1 아승지겁 |
1대겁 |
2 |
수축한 상태로 머무는 것 |
괴주(壞住) |
1 아승지겁 | |
3 |
팽창하는 것 |
성(成) |
1 아승지겁 | |
4 |
팽창하는 상태로 머무는 것 |
성주(成住) |
1 아승지겁 |
청정도론에 따르면 세계는 불에 의한 파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에 의한 주기적 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물에 의한 파괴’이다. 불에 의하여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되었다면, 물에 의한 파괴는 ‘색계2선천’까지 파괴된다. 그런데 물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람이다. 바람에 의한 세계의 파괴는 ‘색계 3선천’까지이다. 그렇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
왜 세계는 주기적으로 파괴될까
색계 3선천까지 파괴가 되는 것으로 색계4선천 정도는 되어야 안심이다. 왜 색계4선천이 안심지역일까. 아마도 그것은 가장 수승한 천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불환자(아나함)들이 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아 색계4선천인 정거천에 태어나면 죽어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다시 나고 죽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는 탐진치가 모두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세계는 왜 불과 물과 바람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파괴될까.
세계가 불이나 물이나 바람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파괴되는 이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불에 의한 파괴는 인간의 ‘탐욕’이 치성할 때이고, 물에 의하여 세계기 파괴될 때는 인간의 ‘성냄’이 치성할 때이고, 바람에 의하여 세계가 파괴될 때는 ‘어리석음’이 치성할 때라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파괴는 결국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탐욕이 극에 달하였을 때 그 탐욕으로 인하여 모든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오염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재해나 기상이변, 괴질, 역병등이 생겨 나게 되는데 이는 모두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냄이 극에 달하면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전쟁이 날 것이다. 어리석음이 극에 달했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오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탐진치에 절여 사는 세상사람들은 어디로 도망가야 가장 안전할까.
어디로 도망가야 가장 안전할까
아눌라스님의 음성법문을 듣다 보면 삼계에 안주할 곳이 없다고 한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 하였을 때 보는 족족 무너진다면 그 어디에도 안주 할 곳이 없어서 “이 세계는 참으로 위험한 곳이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지은 행위에 대한 업이 남아 있다면 삼계중 어느 세계에서인가 다시 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삼계는 안주 할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세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 것이 바로 열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이라 볼 수 있다. 숫따니빠타의 일부분을 주석해 놓은 닛데사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세상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생존한다.
마음이 무너지면 세상은 끝난다.
(Nd1, 42-43, 마하닛데사)
닛데사(Niddesa)에 표현된 문구에 따르면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는 탐진치가 소멸되어 지은 업이 없기 때문에 업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무너졌다는 의미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앞서 인터넷백과사전에서 불교의 종말론은 해탈과 열반이 달성됨으로서 이루어진다는 맥락과 같은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완전히 적멸하였을 때 세상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어떠할까. 그 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하여 생긴 겁화(劫火)를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겁화는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육문과 육경이 부딪쳤을 때 팟사(phassa, 감각접촉, 촉)가 일어나는데, 이 때 “좋다” “싫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라는 느낌이 일어난다. 좋으면 취하려 하는 탐욕이 일어나고, 싫으면 밀쳐내려 하는 성냄이 일어난다. 이런 탐욕과 성냄으로 인하여 결국 과보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이란 무엇일까.
어리석음이란 한 마디로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원인과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탐진치 3독 중에 가장 무서운 것으로 본다.
201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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