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꿇어!” 길자연목사의 뒤늦게 알려진 사실,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종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1. 3. 17. 10:26

 

 

 

꿇어!” 길자연한기총회장의 뒤늦게 알려진 사실, 우상과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의 종교

 

 

 

뒤늦게 알려진 사실

 

꿇어!”

 

조폭집단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서로 싸워 상대방을 제압하였을 때 복종의 표시로서 무릎꿇기를 강요하고, 상대방은 복종의 표시로서 무릎을 꿇음으로서 주종관계가 형성된다.

 

그런 무릎꿇기와 비슷한 광경을 국민들은 최근 목격하였다. 그것도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 국민이 아닌 자신의 신과 교회권력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무릎을 꿇자고 권유한 사람은 우리나라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한기총 회장인 길자연목사이었다. 여기까지가 인터넷과 메스컴에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최근 불교계 인터넷신문에서는 뒤늦게 알려진 그 때 당시 길자연 목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전한다.

 

 

 

“지나간 반만년 동안 우상숭배의 죄 속에 있었으나 하나님이 주권적 역사를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나라 우상숭배의 죄를 고백합니다.”

(출처 : http://www.mediabuddha.net/bbs/board.php?bo_table=03_1&wr_id=218)

  

 

대통령을 무릎꿇게한 길자연 한기총회장은 우리나라를 우상숭배의 역사로 규정하였다. 단군조선이래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미신숭배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폄하하고, 그런 행위에 대하여 자신의 신앞에 속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에 국민을 대표한다는 대통령도 무릎을 꿇은 것이다.

 

불교를 정조준하여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누가 한단 말인가. 이는 명백히 불교를 겨냥하여 정조준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점을 캐내어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100여년 전 상황이 그랬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왔을 때 길자연 목사의 발언과 같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하는 종교로 간주 하고 자신의 종교는 문명의 종교, 개화의 종교임을 강조하였다.

 

미국의 힘을 등에 업은 기독교가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주류를 자리잡고 사회곳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할 뿐만아니라 대통령까지 무릎을 꿇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라의 문화와 역사를 부정하는 미신행위우상숭배라는 말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불교를 우상숭배의 종교로 낙인 찍어 선교효과를 극대화 하는 전략은 이미 백여년 기독교가 이땅에 처음 들어 왔을 때 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말은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이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하나님의 믿지 않아 심판을 받은 것라거나 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등의 망발을 하였는데, 이는 불교를 우상숭배로 간주 하는 발언이다 .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빌미를 준 것은 없었을까.

 

우상숭배의 빌미

 

절에 가면 수 많은 불보살상을 볼 수 있다. 큰 전통사찰이라면 절의 입구에서 눈이 부리부리 하고 칼을 치켜든 사천왕상을 볼 수 있고, 대웅전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 관음전에 가면 관세음보살, 지장전에 가면 지장보살, 신중단에는 화엄성중이 모셔져 있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상을 만나게 된다.

 

이런 상을 기독교에서는 싸 잡아 우상이라 하고, 거기에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한다고 경멸하듯이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상 그 자체에 빌거나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무나 돌덩이나 쇠붙이로 만들어진 불상 그 자체에 복을 빌거나 절을 하는 것은 우상일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존경의 표시로서 절을 하거나 모셔 놓은 것은 결코 우상숭배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우상숭배한다는 말을 들어도 딱히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100년 전 만해 한용운 스님은 불교유신론(19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만해 한용운스님의 불교유신론)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요소를 척결하자는 것이었다. 절에서는 불상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미 100년전 이런 문제가 되기 되었음에도 불굴하고 전통아닌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결과 이교도로 부터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짓는 절에서는 불상하나만 모시는 곳이 많아졌다. 특히 초기불교를 전법하는 곳은 예외 없이 불상하나만 있고, 보살상이나 신중단의 상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길상사 부처님상

 

 

 

 

다불과 다보살신앙은 대승불교의 산물이다. 여기에 민속신앙까지 습합되어 절에 가면 이곳 저곳에 수 많은 상을 볼 수 있는데, 만해 한용운스님의 지적대로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형상처럼 되어 있는 상에게 비는 행위만 우상숭배일까.

 

기도와 우상숭배

 

종교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중의 하나가 기도이다. 기도란 신 또는 신격화된 대상과 의사소통을 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대게 무언가를 간청하는 것을 기도라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표현 하면 바라는 행위를 말한다.

 

그 바라는 대상이 대부분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일 수 있고, 또 큰 바위나 산, 나무등 자연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존재를 형상화 해 놓은 것이 일 것이다.

 

상은 사람의 모습을 한 것도 있을 수 있고, 하나의 상징으로 표시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모습을 한 것에 기도를 하면 우상이고, 십자가와 같은 상징으로 표시된 것에 기도하면 우상이 아닌 것일까.

 

한마디로 기도하는 행위는 모두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 되기를 바래서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모두 우상숭배로 간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설령 그것이 인간의 모습을 한 상이거나 아니건 간에 마음속의 대상을 만들어 놓고 그 분에 바라는 행위는 모두 우상숭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를 모셔 놓은 자가 그런 존재를 형상화 하였다고 하여 우상숭배로 규정한다면, 이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바라고 갈구하는 행위 즉, 기도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기도는 절망에 이르는 지름길

 

부처님은 바라지 말라고 하였다. 바라고 갈구하는 것은 윤회의 원인이 될 뿐만아니라 고통의 근원이 되어 결국 육체적 고통, 정신적고통, 절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기도하는 행위는 절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볼 수 있다.

 

 

 

 

사진 http://doesprayerwork.info/i-hate-when-christians-pray-to-god-for-help-but-wont-do-anything-to-help-themselves.html

 

 

 

하지만 이를 모르는 범부들은 어떤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매달리고, 삶의 과정에서 풀리지 않은 문제는 모조리 떠 넘겨버린다. 그리고 신의 뜻이라거나 신의 뜻대로 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개념의 노예가 되어 철저하게 굴종적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즉, 불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것은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ditthe va dhamme, 딧테와 담메, 現今, here and now)에 충실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놓쳐 버리면 마음은 항상 과거나 미래에 머물게 된다.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후회, 회환등으로 괴롭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이 가 있으면 근심, 걱정으로 괴롭다. 따라서 마음이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 비록 단 한끼로 연명하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얼굴은 맑고 평온할 것이라고 부처님은 경전(상윳따니까야SN 1.10 Sagāthā Vagga  Aranna Sutta-숲속의 경)에서 말씀 하셨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범부들은 마음속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상에 종속되어 굴종적으로 살아간다. 그런 상을 불교적 용어로 개념이라 한다. 빠알리어로 빤냣띠(paññatti)’라 한다. 그런데 그런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끼의 뿔’, ‘거북의 털과 같은 것이다.

 

토끼의 뿔거북의 털

 

토끼의 뿔거북의 털은 실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그런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아나 인간이 만들어 낸 절대자초월적 존재역시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개념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 하거나 어떤 상징물로 나타낸다면 모두 이라 볼 수 있는데, 거기에다 바라고 갈구 하는 기도를 한다면 모두 우상숭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바라고 갈구하는 기도를  모두 부정하였다.

 

부처님은 오직 실재하는 것만이 진리이고, 실재하지 않은 것은 개념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설명하였고, 그래도 이해 하지 못하자 정신을 다시 네 가지로 나누어 수, , , 식으로 설명하였고, 더 나아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으로 더욱 더 분해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설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것은 한 마디로 개념을 타파하기 위해서이었다. 개념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오온으로 분해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84천 법문인데 이는 결국 알아차림하나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ditthe va dhamme, 딧테와 담메, 現今, here and now)

 

바로 지금 여기(ditthe va dhamme, 딧테와 담메, 現今, here and now)에서 현상을 알아차린다면 절대자니 초월적 존재이니 하는 토끼의 뿔과 같은 개념이 발 붙이지 못하게 되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것이고, 그런 대상에 바라고 갈구 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어 절망에 이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간절히 바라고, 갈구하고 기도를 하는 종교는 모두 우상숭배의 종교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201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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