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님이 아니면 소임을 맡을 수 없나, 출재가 평등권과 1998년 종권다툼

담마다사 이병욱 2011. 3. 20. 12:10

 

 

 

스님이 아니면 소임을 맡을 수 없나, 출재가 평등권과 1998년 종권다툼

 

 

 

불교는 스님들만의 종교일까. 이런 문제점에 대하여 최근 교계인터넷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제목은 출재가 평등권 보장돼야 불교 사회역할 확대라는 글이다.

 

 스님이 아니면 소임을 맡을 수 없나

 

기사에서 출가와 재가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조계종의 종단 소임을 보면 재가자가 철저하게 배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계종의 모든 조직이 소수의 스님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재가자는 단지 시주금만 내는 존재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 역할도 불분명하여 외곽에서 겉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불교는 말로만 사부대중일 뿐이지 실제로 비구와 비구니로 이루어진 이부대중이라는 것이다.

 

스님이 아니면 종단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없는 것일까. 세상은 다양화 되고 급격하게 변화해 감에 따라 재가불자들 역시 불교의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단은 여전히 비구와 비구니 위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재가불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사부대중 모두가 소임을 맡을 수 있는 종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럴만한 자신감을 이제는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이대로 불교를 스님들한테 맡겨 둘 수 없다

 

부처님 법대로를 외치면서 비불교적 형태로 승단을 운영하고, 자신의 권력에 대하여는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이라 한다. 그 좋은 예가 한글 삼귀의일 것이다.

 

삼귀의 중에 승()스님들로 바꾼 것이 대표적 예일 것이다. 이처럼 한국불교에 있어서 승가는 스님들의 것이고, 불교 역시 스님들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승가는 종종 재가불자들에게 걱정을 안겨 주기도 한다.

 

승가가 재가불자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재가불자가 승가를 염려 하는 것이다. 특히 종권다툼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뉴스가 들려 왔을 때이다. 그럴때는 출가자가 존경의 대상이 되기 보다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 되는데, 불자들은 그런 참담하고 참혹한 사건을 여러 번 접하였다. 특히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1998년의 종권다툼사태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 많은 불자들이 불교와 종단과 스님들에게 등을 돌렸고, “이대로 불교를 스님들한테 맡겨 둘 수 없다는 다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1998년에 어떤 일이 발생하였기에 1700년 불교역사에 있어서 참담하고, 참혹한 사건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한 자료를 월간해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월간해인에서

 

월간해인 1998 12월호에 실린 글(또 한번 종단 퇴보사로 기록될 이른바 ‘정화개혁회의’)을 보면 종단사태가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요일별로 매우 자세하게 마치 취재수첩을 보듯이 기록된 내용을 보면 한국불교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는 것 같고, 그 때 당시 문제를 일으켰던 스님들이 아직도 건재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또 한번 종단 퇴보사로 기록될 이른바 ‘정화개혁회의’

 

 

홍동화/자유기고가


94년 종단개혁 이후 종단은 안정 추세를 걸어왔다. 잦은 분규와 서의현 전총무원장을 제외하고는 임기를 제대로 마친 총무원장이 거의 없을 만큼 불안정했던 종단 지도체제는 철권과 독재가 아니어도
보장된 임기 4년을 마칠 수 있을 만큼 강화된 행정력과 전체 종도들의 높아진 의식 수준을 반영하며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총무원장 선거전에 돌입하면서 이런 안정화 추세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구습에 젖은 총무원청사 점거와 종권야욕에 따른 쿠데타가 발생하고 여기에 94년 개혁 전후 종단으로부터 치탈도첩된 서의현, 황진경, 김경우, 임원두 등의 해종행위자들과 이들과 관계가 있는 전종정 스님까지 개입하면서 종단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분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번 사태의 원인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94년 개혁을 이끌었던 개혁세력의 분열과 일부의 과도한 종권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94년 개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민주적인 절차나 제도가 종단 내에 자리잡게 한 제도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존 보수진영과 개혁세력 내에서도 저마다 이익이 다른 그룹들은 얼마만큼 소외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총무원장 선거가 종단 지도부의 재편과정이라고 이해할 때 당연히 이들 소외그룹들은 기존의 지도부에 대한 비판에 공동의 보조를 맞추었고, 불행하게도 그것이 기존 종책이나 종책비전에 대한 대안 있는 비판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선거상황에서 각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 목표로 맞추어져 결국 생겨난 것이 ‘3선반대 연대회의’ 였다.


오랜 독재에 시달렸던 불자들을 비롯해 우리에게 ‘3선반대’ 라는 구호는 낯설지 않다. 이유 여하에 관계없이 그 자체가 설득력을 가졌으며 처음 이 구호를 이번 선거전에 끌어들였던 주체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공할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과열된 선거전에서는 실제 법논리상의 옳고 그름의 논리가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3선반대 연대회의 내부는 불리해진 선거를 깨뜨리고 아예 종권을 장악해버리자는 월탄스님 측그래도 선거일정은 준수하자는 지선스님 측으로 갈라졌다. 전자는 바로 선거시국을 중단시키고 오늘의 파국을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이 된 월하 전종정을 개입시켜 11월 11일 250여 스님이 모인 초소형 승려대회를 통해 청사를 폭력, 점거하고 그들만의 종단을 만들기 위한 제반 일정을 밟아 나가고 있다. 반면 후자는 전자와 결별하고 총무원, 중앙종회와 함께 11월 30일 전국승려대회에 결합하믕로써 월탄스님을 단죄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전종정스님의 사판 개입

 

전종정 스님의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선거전 개입으로 인하여 선거 시국을 종료하게 됨은 물론 종단 권위의 정점이 사라져 버리는 종단 존립의 위기 속으로 치닫게 되었다.

 

전종정 스님은 10월 24일 해종행위자들과 무승적자들의 청사난입을 허락하여 이들의 행위가 당신의 뜻임을 확인하는 ‘확인증’ 을 써 주었으며, 같은 달 26일과 11월 4일의 교시로 폭력적인 상황이 우려되었던 11일 승려대회를 직접 지시하면서 성철스님 뒤로는 종단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종정 대 총무원장의 대결 양상을 직접적으로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전종정 스님의 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개입은 지금 청사를 점거하고 있는 측으로서는 곧바로 청사 점거와 종권 찬탈의 명분이 되었다. 선거전에서는 당선가능성이 전무하였고,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과열된 선거전에서의 강경발언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놓은 탓에 월탄스님 진영으로서는 전종정의 교시가 사생결단의 계기를 부여하는 최후의 보루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전종정-멸빈자-월탄 진영으로 이어지는 커넥션


폭력적인 청사 점거가 발생하고 몇 차례의 공방전이 지속된 뒤 자연히 차기 종단지도부를 선출하는 제29대 총무원장 선거전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난 11월 12일의 선거와 18일로 연기됐던 선거 모두가 무산된 19일,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월주스님이 “현 총무원장으로서 이번 사태의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사퇴” 하였고 이후 11월 20일 현 총무원장으로서의 임기마저 끝나자 종단은 차기 총무부장으로 임명된 실상사 주지 도법스님에 의한 권한대행 체제로 바뀌었다.

 

14일 기만적인 구룡사 원로모임에서 제명된 원로회의 의장 혜암스님은 전종정 스님과 청사 점거집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였으며, 저들에 의해 해산된 제12대 중앙종회에서도 폭력적인 청사 점거를 규탄하고 구룡사 원로회의를 인정치 않는 결의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교구본사주지들의 모임에서도 종단 비상사태를 확인하고 이 비상사태를 해소하기 위한 사전 협의를 거쳐 협의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전체 교구본사가 참여하는 승려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런 반대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는 가운데 11일 점거 뒤 이른바
‘정화개혁회의’ 라는 과도체제를 선포한 점거자들은 이후 일련의 쿠데타 후속조치들을 진행시키고 있다.

 

점거 다음날인 11월 12일 종정 스님을 서울로 불러와 자신들의 점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고 14일에는 서울 양재동 구룡사(주지 정우)에서 원로 스님 일곱 명의 참석과 여덟 명의 확인되지 않은 위임장으로 원로모임를 갖고 자신들의 행위를 사후 추인받은 억지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급기야 26일에는 행정, 사법, 입법을 통합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이른바 ‘정화개혁회의’ 의 개원이라는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건너버렸다.


이날 ‘정화개혁회의’ 에서는 종헌 일부를 개정하여 종정에게 사면권과 종단 비상사태 발생시 원로회의, 중앙종회를 비롯한 종무기관 해산 및 비상종단 구성권을 주었으며, 정화개혁회의법, 해종행위조사 특별위원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서의현, 황진경, 김경우, 임원두 등 구 종권세력이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아 숨겨왔던 쿠데타의 저의를 차츰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제반의 과정이 일관되게 신뢰할 수 없는 속임수와 강압적인 주장에만 머물고 있을 뿐 종도들의 지지를 확보해 나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못함으로써 스스로의 종말을 재촉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4일 구룡사 원로모임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여덟 분의 위임장으로 회의를 소집했다고 하나 주최측은 아직도 이 위임장을 증거자료로 제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16일 소위 정화개혁회의 개원에서는 의원점명이나 신원확인도 안된 채 신분이 불확실한 승려 백여 명을 모아 놓고 회의를 진행하는 등 눈속임과 사기극으로 종권을 찬탈해 나가려는 천박한 저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사실상 종정중심제로 종단의 지도체제를 바꾸어 나가려는 전종정 스님을 한 추긍로
지금 청사점거진영의 물리력을 제공하는 서의현, 황진경 등 사면복권을 기도하는 멸빈자 그룹, 그리고 현호, 정우, 성문, 법일, 원학, 현소 등 개혁종단에서 소외되거나 비위 행위로 지위가 불안정해졌거나 혹은 개혁종단에 불만을 품어왔던 일부 종회의원 그룹 등이 삼각 커넥션을 구성, 저마다의 이익에 따라 종헌 종법의 틀을 깨뜨리고 그들끼리 종권을 나누어 가지려는 저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동상이몽과 이탈의 가속화


그러나 오월동주와 같은 이들의 커넥션은 이들이 청사를 점거하는 순간부터 동상이몽이 되고 말았다.

 

전종정 스님은 주지 인사권과 재산처분승인권, 사면권을 모두 가진 종정중심제를 원했지만 월탄스님은 월주스님을 선거 과정에서 밀어내기 위해 전종정 스님이 필요하였을 뿐, 종정중심제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또 전종정스님은 과거 치탈도첩의 징계를 받아 승려자격을 박탈당한 경우스님의 사면을 위해 서의현, 황진경 등의 사면을 필요로 했지만 월탄스님은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기 위해 서의현, 황진경의 자금과 인맥이 필요하였을 뿐 이들의 사면 복권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의현, 황진경이 사면 복권되면 이들은 풍부한 자금과 인맥으로 급격하게 부상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월탄스님이 종권을 장악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갈등이 잘 나타난 것이 11월 26일 소위 ‘정화개혁회의’ 개원이다.
전종정 스님은 정화개혁회의에서 개정하고자 한 종헌개정안이 종정중심제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정화개혁회의 개원에 불참하고 통도사로 내려가 버렸다.

 

그러나 월탄스님은 종헌 개정안을 수정하여 종정의 권한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현호스님을 통해 종헌개정안 의결을 강행함으로써 자신이 전종정 스님의 힘을 빌리기 위해 최소한도의 권한만 종정에게 부여하였다.

 

‘청사만 점거하면 종권을 잡는다’ 는 망상은 이제 버려야


이번 점거사태에서는 몇 가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점거세력에게 무조건 협조해 왔던 종무원들이 이번에는 “폭력점거세력에게 협조하지 않겠다” 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 한 명도 업무에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점거 세력의 도덕성뿐 아니라 업무 수행에 막대한 지장과 타격을 입히고 있다.

 

점거세력은 공간으로서의 총무원 청사는 점거했으나 개혁종단 4년 동안 정립된 종무행정을 전혀 계승하여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점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양상으로서는 청사를 점거했음에도 원로회의, 중앙종회, 중앙종무기관과 본말사에 대한 장악력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법한 원로회의 의장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혜암스님의 강력한 반발과 중앙종회의 정화개혁회의 불법단체 규정, 종무 수행 장소를 이전한 상태에서 중앙종무기관의 종무행정 계속성 유지, 교구본사의 정화개혁회의에 대한 반대 등 종단 대다수가 정화개혁회의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초기에 각 분야를 급속히 장악하지 않고는 실패하는 것이 쿠데타인데
이번 정화개혁회의는 공간으로서의 총무원 청사 외에는 아무 것도 장악하지 못했다.

 

종도들의 뜻 확인한 1130 전국승려대회


11
30일 종헌 종법 수호를 위한 전국승려대회를 앞두고 중앙종회와 교구본사주지연합회, 정화개혁회의 측간에는 막판 타협을 통해 파국을 면하자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28일 저녁 승려대회장 탄성스님이 주재한 3자회의는 정화개혁회의 측의 불성실한 태도로 난항을 거듭한 가운데 29일 새벽 13개 항을 합의하고 전종정 스님의 재가를 받기 위해 통도사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전종정 스님은 합의안에 대한 재가를 거부하고 힘있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월탄스님은협상대표를 보낸 적이 없고 합의안에 서명한 바도 없다고 함으로써 모든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 날 전종정 스님의 재가거부로 인하여 그동안 전종정스님의 행보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해왔던 각진영이 전종정 스님을 종단파탄의 주체로 확인하고 전종정 스님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하게 됨으로써 94서암종정에 이어 98년 월하종정까지 모두 불명예스러운 종정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11월 30일 전국승려대회는 1500여 스님과 1000여 재가불자가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어 종도들의 뜻이 어디 있는가가 확인되었다.

 

전국승려대회 결의 제1조는 종정불신임이었다. 또 월탄, 성문, 정우, 현호, 현근, 원학, 법일 등에 대한 중징계를 결의했다.

 

승려대회가 끝난 뒤 평화적인 청사 반환 요구가 이어졌으나 정화개혁회의측은 서의현, 황진경 등의 세력이 가세한 가운데 70여 명의 스님과 폭력배가 화염병, 돌, 음료수병, 쇠파이프 등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청사 진입을 강력 저지함으로써 평화적인 청사 반환 요구는 일단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약 35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11월 11일 폭력사태 이후 11월 30일 승려대회에서도 청사를 점거한 측에서 승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데도 공권력은 이를 수수방관하고 심지어 불법행위를 비호 조장까지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위험물을 확인하고도 수거하지 않고 폭력에 사용되게 하고, 화염병을 비롯한 살상흉기들이 난무해도 경찰은 눈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12월 6일 대규모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범불교도대회가 개최된다. 이날 대회에 적극참여하기로 결정한 ‘불교바로세우기 범불교재가연대’(한국 교사 불자회등 15개 재가단체 참여)는 2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 상황은 더 이상 승려들간의 종권다툼의 연장으로 볼 수 없으며, 우리는 정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전 종도들의 이름으로 종권찬탈에 눈이 먼 소수 폭력집단인 자칭 정화개혁회의를 향하여 부처님의 정법의 칼을 들고 일어설 것임을 밝힌다” 고 천명했다. 이번 사태의 본질과 앞으로의 전망을 예측하는 데 기준이 되는 선언이다.

 

 

출처 ; 월간해인, 1998 12월호,

http://www.haeinji.org/contents/index.html?contents=default_view&seek_no=12&webzine_no=30&start=12

 

 

12 7일자 기사를 보면

 

글을 보는 것과 같이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1998 12 6일 범불교도대회가 개최 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 이후를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http://dna.naver.com/search/searchByDate.nhn#)에서 찾아 보았다. 12 6일 범불교도 대회가 열린 다음날인 12 7일 자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 1998 12 7일자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면 휴일에 중앙종회측과 정화회의 측이 세대결을 벌인 것으로 작성되어 있다. 청사를 점거한 정화회의 측에서는 조계사에서 700명을 결집하였고, 청사를 탈환하려는 중앙종회측은 광화문 앞에서 1500명이 모여 규탄결의대회를 연 것이다. 그러나 양측의 충돌은 없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각측의 입장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1998 12 7일자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하고 쿠데타세력의 단죄의 대열에 합류한 지선스님과 청사만 점거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인식하였던 월탄스님의 입장에 대한 글이다.

 

결국 1998년 사태는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한 중앙종회측의 승리로 돌아가고, 재가불자들과 국민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긴채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난 이래 13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타종교인들 보기가 민망해

 

월간해인에 실린 그 때 당시의 글을 읽어 보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 또는 무협소설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13년전의 상황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것도 출가한 스님들끼리 벌이는 권력다툼이었고, 여기에 전 종정이 개입하였는가 하면, 청사만 점거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인식하여 사활을 건 싸움이었다. 불자들은 그런 장면이 tv에 나올때 마다 채널을 돌려 애써 외면하였고, 무엇 보다 타종교인들 보기가 민망하였다.

 

그와 같은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서일까 불자들은 지금도 총무원장 선거를 한다든가, 종권이나 이권과 관련하여 불교관련 기사가 나올 때 마다 가슴을 졸인다. 그리고 다시 한번 1998년과 같은 참담하고 참혹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한국불교는 끝장이라고 여기고 있다.

 

사부대중의 불교

 

불교는 스님들만의 불교가 아니다. 또 불교는 승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승가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슴을 졸이고 염려와 걱정을 한다면 한국불교의 퇴보이고,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급격하게 변하는 다양화시대에 발 맞추어 재가불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인적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불교는 비구와 비구니로 구성된 이부대중의 불교가 아니라, 청신사와 청신녀도 포함된 사부대중의 불교이기 때문이다.

 

 

2011-03-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