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교계와 화해한다고? MB의 이중플레이와 보통불자의 각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9. 17:35

 

 

 

불교계와 화해한다고?  MB의 이중플레이와 보통불자의 각오

 

 

아픔을 준 대통령

 

MB는 불자들에게 아픔을 준 대통령이다. 서울시장 재직시절 서울시를 자신의 신에게 봉헌한다고 발언하였는가 하면, 부산에서 기독교 청년들이 사찰아 무너져라하고 기도하였을 때 영상으로 축사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최근 한기총주최의 기도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충격적인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불자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로 부터 좋지 않은 이미지로 비치고 있는  그는 철저한 종교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재임 중에 정치를 하기 보다 종교를 하였다. 국민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사업은 그의 종교적 신념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원래 정치라는 것이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 정책이라는 것이 타협의 산물이라서 정치는 항상 최선 보다 차선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MB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면 모두 정략적이라거나 정치적인 발언으로 일축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서 소명의식때문에 추진한다고 매스컴에서 누차 말을 하였다. 대체 그 소명의식이란 무엇일까.

 

대통령의 소명의식

 

소명의식은 기독교용어이다.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정치하는 사람이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종교는 정치와 달라 항상 최선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4대강 사업도 소명의식 때문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종교적 최선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소명의식과 최선의 추구는 자신이 공약을 내걸었던 정책을 줄줄이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 추진하였던 행정수도복합도시 마저 소명의식이라는 이름아래 폐기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종교적 소명의식으로 가득찬 그가 최근 불교문화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한다.

 

불교계와 화해한다고?

 

4 8일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MB  “한국적인 것은 전통문화로 불교문화와 유교문화를 들 수 있다”며 “사찰과 서원과 같은 전통문화의 가치를 발굴하고 확산하는 일이 한국의 이미지를 신장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한다.  

 

이른바 불교계에 화해의 손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의 말을 믿어도 될까.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불교를 띄어서 표를 얻어 보자는 목적은 아닐까. 작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천안함사건을 이용하였듯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 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정신에 투철한 대통령이 불교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단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말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와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는 금방 밝혀 질 것이다.

 

공약폐기를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쉽게 하고, 전임이 추진하던 일마저 폐기를 시도하는 가 하면 자신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차선 보다 항상 최선을 추구하는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종교인이다.

 

그런 그가 종교인으로서 그가 불교계에 던진 메세지인 불교문화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고 하나 그는 먼저 서울시청봉환발언과 사찰아 무너져라 기도회당시 동영상 축사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한 번도 한적이 없었다.

 

그가 불교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발언하였다면, 그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먼저 불교와 불교인에게 공식적인 사과부터 해야한다.

 

불교는 박멸의 대상인가

 

MB는 한편으로 종교적신념으로 가득찬 발언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불교유화책을 내어 놓는 것에 대하여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독교인들의 이와 같은 이중적인 현상에 대하여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L법사는 다음과 같이 썻다. 

 

 

설혹 저들이 겉으로는 웃음을 짓고 악수를 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듯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한시도 공격성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땅 끝까지 전도하여 인간 모두를 예수의 백성으로 만들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명감이 뼈 속까지 박혀 있는 그들에게는 불교는 언제고 무너뜨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제열법사, 종교영성연구소’ 설립을 제안한다)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베푸는 듯이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이 나라를 자신의 신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 밖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언제가 무너뜨리고 말 대상이자 박멸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눈에는 눈, 코에는 코식으로 일일이 대응해야 할까. 만일 그렇게 대응한다면 종교전쟁이 일어 났을 것이고, 이나라는 오래전에 절단 났을 것이다.

 

모순과 허구와 위선으로 가득 찬

 

자비의 종교이자 평화의 종교인 불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또 그렇게 하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그들이 불교를 박멸하기 위하여 사찰에 방화를 하고, 불상을 훼손하고, 사찰이 무너지라고 기도하여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L법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이제 불교는 불교인들만을 위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불교는 불교 교리만을 세상에 알려서도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불교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허구와 모순을 찾아내어 기독교가 결코 진리가 아님을 알리고, 불교가 세상을 구제할 유일한 종교임을 드러내야 한다. “

(이제열법사, 종교영성연구소’ 설립을 제안한다)

 

물리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나라 부처님의 가르침(담마)을 이 세상에 널리 알리자고 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적 모순과 허구와 위선도 또한 널리 알려서, 기독교가 마음이 만들어낸 우상을 섬기는 종교라는 것 또한 널리 알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종단안에 종교영성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 하였다.

 

근본 가르침을 알아야

 

불교를 지켜내고 부처님법이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는 종단과 스님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된다. 불자들 또한 적극적으로 불교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담마를 퍼뜨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자들이 먼저 불교 교리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한다. 자신도 잘 모르는데 남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불교의 교리의 핵심은 무아(無我)’연기(緣起)’로 볼 수 있다.

 

우리불자들은 무아와 연기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타종교인과 논쟁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 종교의 모순과 위선과 허구를 얼마나 많이 들추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불교가 성립할 당시 시대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불교는 부처님이 창시하였지만 또 한편으로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출발하였다. 부처님당시 브라만교는 요즘의 유일신교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브라만교는 어떤 것일까.

 

창조신브라흐마(Brahma)’를 비판하고 성립한 불교

 

브라만교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창조신을브라흐마(Brahma)’라 한다. 이 브라흐마에 대하여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의 저자인 일아스님은 전지전능한 절대자의 한 호칭이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이런면으로 보았을 때 브라만교의 브라흐마는 기독교의 야훼또는 하나님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브라흐마와 브라흐마와 합일 되는 경지인 범아일여사상을 비판하였다.

 

이는 실체가 없는 것을 관념화하여 세상과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부처님은 무아연기를 설하여 세상을 있는 그대로볼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불교이론은 고대인도에 있어서 수백년간 전승되어온 고도의 철학체계를 비판하며 성립하였기 때문에, 불교 역시 고도의 철학체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사막에서 철학적 기반 없이 탄생된 유일신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품격’높은 종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들이 불교의 교리를 알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면 불자가 되기를 참 잘 했다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내 마음대로 하지못할까

 

불교의 교리를 알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알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모두 위선과 모순과 허구에 가득찬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불자들이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잘 모르기 때문에 타종교와 논쟁이 붙었을 때 잘 설명할 수 없고 당하기만 한다.

 

불교교리의 가장 핵심인 무아사상에 대하여 타종교인이 논박한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는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된다.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의 이야기를 해주면 꼼짝 못할 것이다.

 

 

 

두 번째 법의 바퀴를 굴리시다 (무상, 무아의 가르침)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부처님은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가르치셨다.


육신은 무아(無我)이다. 만일 육신이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몸이 무아인 것처럼 느낌도 무아이고 지각도 무아이고 형성도 무아 이고 의식도 무아이다. 만일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등이 자아가 있다면, 이런 것들이 병들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 게 되지 말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 등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 지 말라 고 말할 수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지각, 형성,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통찰력으로 보아야 한다. 육신과 마찬가지로 느낌이 어떤 것이든, 지각이, 형성, 의식이 어떤 이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보고 가르침을 잘 습득한 훌륭한 제자들은 몸에 도 집착하지
고,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각에도 형성에도, 의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집착을 떠났을 때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하였다. 고 알게 된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고 알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기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다섯 명의 비구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로부터 해탈하였다.


그때 이 세상에서 아라한은 여섯 명이 되었다.

 

(상윳따 니까야: 22 칸다 상윳따 59, 율장 마하왁가 1 6:38-47)

 

 

사람들은 보통 내 몸’ ‘내 마음이라고 말한다. 또 자아나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 즉,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것을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내 것, 나의 자아, 영혼과 같은 것은 실체가 없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아를 예를 든다면 나가 있긴 있지만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형성된 일시적인 나에게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자아가 존재한다면, 내 몸이 맞다면, 내 마음이 맞다면 내 마음대로 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원인과 결과에 따른 조건에 따른 것일 뿐이다.

 

마음이 만들어 낸 우상

 

잠을 자려 할 때 좀처럼 잠을 못드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자려고 노력해도 온 갖 잡생각만 일어나고 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만일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면 잠 또한 내 마음대로 잘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몸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님이 틀림 없다. 이는 나란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단지 조건에 따른 상속된 흐름일 뿐이다. 이것이 무아이다.

 

위에 언급된 경에서 육신이 내 것이 아님을 병이 들었을 때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육신이 진정코 내 것이라면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은 내 것이 아니고 무아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오온중에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 지 말라 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그렇다면 이 몸과 마음은 내 것, 나의 자아가 아님은 확실하다. 따라서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 즉, 영혼이나 창조주, 알라, 야훼, 브라흐마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마치 토끼의 뿔처럼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지만, 단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개념 또는 문자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허구의 대상, 마음이 만들어 낸 우상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이다. 

 

 

 

 

토끼의 뿔

 

독일 바바리아 지방 민담에 나오는 상상속의 동물이라 한다

사진 : http://mirror.enha.kr/wiki/%EB%B3%BC%ED%8D%BC%ED%8C%85%EC%96%B4

 

 

 

 

 

2011-04-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