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해야 기독교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도흠교수의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을 읽고
사무실이 있는 빌딩 바로 옆에 교회가 하나 있다. 교회와 교육관등을 갖추고 있는데, 이런 유형의 교회는 수도권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중급정도의 교회이다. 그런 교회를거의 1년 365일동안 수 년간 지나치며 보았는데, 교회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행사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교회공동체
교회에 걸려진 각종 플레카드를 보면 가족축제, 어르신들 효도관광, 사회저명인사나 연예인들의 신앙간증, 음악회, , 경노대학, 미용교실, 바자회등 동네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고 매달 계속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교회는 하나의 ‘동네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고, 실제로 ‘주민총회’등이 교회에서 열린다거나, ‘투표소’로도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또 동네가게들의 각종전단지를 보면 단체주문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교회이기도 하다. 떡집의 경우 기업, 학교, 교회가 단체주문의 단골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전이면 잘 차려 입은 가족들이 바이블을 끼고 교회를 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광경이 되었고, 이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봉고차, 그리고 교회앞에서 교통정리하는 신도를 보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처럼 교회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 든지 볼 수 있고, 더구나 교회공동체를 만들어 주민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비록 수금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중요한 역할을 주민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도흠교수의 글에서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득세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나름대로 현실을 바라 보면서 분석한 글을 블로그에 여러차례 올렸다. 그런데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이를 학술적으로 분석한 글 (기독교 극복 출발점은 ‘파사현정’)을 발견하였다.
한양대 이도흠교수가 발표한 글을 요약하여 정리한 기사인데, 기사를 읽어 보면 읽어 보면 기독교가 득세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글이다.
기독교의 득세는 결국 한국불교의 위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가 오늘날 득세하였고, 주류종교가 되었고, 그런 흐름이 확대재생산 되는 것일까.
기사의 요약내용으로 부족하여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여 원본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키워드검색한 결과 곧바로 자료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고 고탄 고광영추모자료집’이라는 파일이다.
기독교가 불교를 압도한 원인 12가지
이 파일에서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이라는 글을 보면, 기독교가 불교를 압도한 원인에 대하여 12가지로 요약해 놓았다. 평소 궁금해 하고 있었던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놓았는데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기독교가 불교를 압도한 원인 12가지
No |
원 인 |
내 용 |
1 |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 |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에 기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기독교 |
2 |
기독교=서구화=근대화 |
한국 대중은 기독교와 서구화와 근대화를 동일시함 |
3 |
종속된 한미관계 |
미군정이래 사회 전분야의 미국의 식민지화 |
4 |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결합 |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수용 |
5 |
근대적 담론의 확대재생산 |
합리성, 인권, 자유, 평등 등 근대적 담론을 확대재생산 |
6 |
사립학교설립 |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여 기독교신앙 확산 |
7 |
엘리트들의 기독교도화 |
기독교엘리트와 유대강화가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 |
8 |
사회민주화와 참여 |
빈민구제등 활발한 사회적 실천과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 |
9 |
공격적인 선교와 조직화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교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신도관리 |
10 |
좋은 성직자와 훌륭한 설교 |
우수한 인재의 의한 입맛에 맞는 설교로 급속히 신도가 늘어남 |
11 |
목회자와 신도의 협력 |
신앙과 사회봉사의 실천적 주체로서 유대관계 강화 |
12 |
신부들의 청렴과 의례의 대중화 |
성직자의 절제된 삶은 존경의 대상이고, 의례의 대중화에 따른 적극참여 |
츨처;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이도흠교수.docx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이도흠교수.pdf
12가지 원인을 보면 이 땅에서 기독교가 득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이와 같은 요인은 또한 불교가 사람사는 곳에서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특히 1번에서 3번까지의 외적인 요인은 시대적환경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그외 요인은 하기에 따라 달려 있는 문제라 본다.
교회를 다녀야 출세를 하고
위의 12가지 요인 중에 포커스를 3번인 종속된 한미관계로 한정해 본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불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나라가 망하고 난 후 일제강점기에서 전통문화가 말살되다시피 하였는데, ‘팍스아메리카나’로 인한 미국에 의한 질서권에 편입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득세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를 다녀야 출세를 하고 돈을 번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확산을 가져 왔다. 교회에 다녀야 권력층에 줄을 댈 수 있고, 연예계에 진출하려 해도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연줄이 닿지 않고, 심지어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학력도 보잘 것 없는 자가 교회에 다니면 아르바이트자리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교회로 몰리는 이유가 된 것이다.
이처럼 서세동점의 시대적 배경과 기독교가 기복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서구화=근대화’ 등식이 성립하여, 기독교는 ‘문명의 종교’이자 ‘개화의 종’교로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적극수용하게 된 배경이다.
또 매년 100곳이 넘는 신학대학에서 15,000명에 이르는 신학생이 배출되는 것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왜냐하면 이들중에는 매우 뛰어난 인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재들이 설교를 목적으로 매일 공부하여 고통받는 삶에서 지친자들을 어루만져 주는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을 때 신도들이 급속하게 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영광만 내세우고 있을 뿐
기독교가 전래된지 불과 100여년 만에 한국에서 ‘주류종교’로 자리잡고, 사회전분야에 걸쳐 ‘기독교엘리트’가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서 한국불교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1700년 역사와 전통의 ‘과거의 영광’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과거의 영광만 내세우고 있을 뿐, 현실을 보면 암담하기 그지 없다. 가장 먼저 사람이 사는 곳에 불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산에 가야 , 그것도 심산유곡에 들어가야 불교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스스로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려하는 것을 말하고, 어느 면으로 본다면 국민은 물론 불자들에게 까지 ‘불통’하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과 국민과 불자들과 소통을 거부한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한국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인구대비 신도수에 있어서 기독교가 1위 인데,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고, 천주교와 비슷한 비율이다.
그런데, 서울의 강남과 같은 ‘중산층’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천주교에도 밀려 ‘3등종교’라고 한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조만간 서울과 수도권에서 한국불교는 3등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해결방법은 없을까
해결방법은 없을까. 이도흠교수의 글에 따르면 기독교가 불교를 압도한 원인 12가지를 불교에도 따라 적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한다. 기독교의 기복신앙과 같은 것을 따라 할 필요는 없지만 좋은 점은 본받고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소수종교, 3등종교로 전락하지 않고, 다시 중흥하기 위해서 12가지 처방을 내어 놓았는데, 그것을 역시 표로 만들어 보았다.
불교의 현대화 10가지
No |
원 인 |
내 용 |
1 |
세계사적 흐름의 역류 |
-서구화와 자본주의 모순으로 인한 사조의 유턴 -서양에서는 불교도가 늘고 서양불교가 역수입 |
2 |
미개=구식=후진 이미지극복 |
-전근대적이미지의 기복불교 청산 -현실에서 느끼는 고와 멸의 구체적 방법제시 |
3 |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불교 |
마음수행법, 소욕지족, 생태론적인 삶과 같은 불교적 모델 제시 |
4 |
탈근대적 담론 확대재생산 |
불교의 연기론과 생명사상등을 21세기 삶의 가치에 적용 |
5 |
사립학교의 설립 |
대형사찰들이 학교를 세워서 불교적 가치에 입각한 교육실시 |
6 |
불교 엘리트 육성 |
영향력있는 ‘오피니언리더’들을 양성하기 위한 종단차원의 지원 |
7 |
도시 불교화 |
산중사찰중심을 지양하고, 시민의 삶에 파고들어가는 포교당과 사찰, 수행원을 도시 곳곳에 설립 |
8 |
감동적인 법문 |
공허한 법문보다 현실의 삶과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설법 |
9 |
출재가 협력체제 |
스님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여 재가자도 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함 |
10 |
청규혁신과 의례의 대중화 |
계율을 중시하고 의례문을 한글화하여 신심이 일어나도록함 |
이도흠교수의 불교현대화 10가지 중에 첫 번째인 ‘세계사적 흐름의 역류’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가지는 한국불교가 실천해야 할 당면 과제이다. 이는 기독교가 불교를 압도한 12가지에 대한 표의 내용을 그대로 불교에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9가지의 내용을 보면 거의 대부분 스님들과 종단이 실천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거꾸로인 것이 현실이다. 위의 9가지 사항은 현실에서 적용되어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9가지를 실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식 ‘대승-테라와다불교’?
이에 대하여 이도흠교수는 ‘하화중생과 보살행의 실천’과 ‘대미 자주성 확립’을 들었다. 이 둘과 표에 있는 10가지 사항을 더하여 ‘한국불교의 현대화 12가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보살행의 실천과 관련된 것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개선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교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간화선을 종지로 하되, 상좌불교의 교리, 계율, 위빠사나의 수행법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양자를 종합한 것을 21세기 한국 불교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 “
(이도흠교수,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
이른바 원효대사의 ‘회통(會通)’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통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불교이든지 마치 ‘용광로’처럼, ‘비빔밥’처럼 녹아 들어가 모든 불교를 통섭할 수 있는 불교모델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하면 도저히 회통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대승불교는 대승불교이고, 테라와다는 테라와다불교일 뿐이지 대승과 테라와다가 복합화 되어 한국식 ‘대승-테라와다불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종착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종착지가 다르기 때문에 그 수행방법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는 초기경전인 니까야와 대승경전을 읽어 보아도 차이를 알 수 있고, 더구나 초기불교의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이나 빠알리 삼장중의 하나인 ‘아비담마 ‘논장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는 사항이다.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매일 넘나들며
2009년 5월 순례법회를 ‘남도’로 떠난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시 3곳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한 곳이 ‘강진’에 있는 전통사찰이었다. 추사와 초의선사와 관련된 사찰은 풍광이 좋았다. 강진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주변은 번질번질한 동백나무로 둘러쌓여 있어서 중부권에서 볼 수 없는 신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이처럼 한가롭고 아름다운 사찰에서 강진만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스님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세속과 마찬가지로 온 갖 편의시설은 다 들어와 있었다.
위성방송수신기와 TV, 전화등과 같은 통신 시설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핸드폰, 인터넷등은 전국의 어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심산유곡에 있는 사찰도 예외가 아니다. 이처럼 세속을 떠나 깊은 산중에서 살아가는 스님들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성안테나 하나만 보아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세상이 더 있다.
요즘사람들은 두 개의 세상을 살아간다. 하나는 ‘현실공간’이고, 또하나는 ‘가상공’간이다. 이처럼 현대인은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매일 넘나드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스님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깊은 산중에 위성안테나가 설치 되어 있듯이 역시 인터넷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청규를 만든다면
그런데 이런 인터넷은 사용하기에 따라 이득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다. 인터넷은 국경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특정사이트에도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도흠교수도 이런 점을 글에서 다음과같이 우려 하고 있었다.
“출가한 자를 승려라 할진대 온라인으로는 세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으로 ‘야동’을 보고 메일과 휴대폰을 통해 여신도와 은밀한 사연을 주고받는 스님, 육식을 하거나 생명을 해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세속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도흠교수,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
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일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듯이, 스님들 역시 깊은 산중에 세상과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다면 ‘온라인상으로’ 세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몸만 산중에 있을 뿐 마음은 세속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이도흠교수는 승가의 계율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청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런 청규가 만들어진다면 위성방송이나 인터넷금지가 포함되지 않을까.
불자들과 소통을 거부한 결과
이처럼 한국의 스님들은 세상을 떠나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가면서 또 한편 통신수단을 이용하여 세속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라고 볼 수 도 있지만 이런 이와 같은 ‘이중적인’ 삶의 행태를 바라보는 불자의 시각은 그다지 곱지 않다.
지금 도시에서는 교회끼리 주민들을 위한 봉사경쟁을 하며 교회끼리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찰은 보이지 않는다. 절은 오로지 산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러다 보니 불자들이 절에 가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이도 나이가 먹고 관절이 아프기 시작 하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거동이 불편한 노보살들이 찾는 곳은 바로 집 근처에 있는 교회라고 한다. 절에 가도 ‘관세음보살’에 빌며 복을 간청하는데, 교회에 가서 ‘유일신’에게 기도해도 들어 오는 복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도시에 정법을 가르치는 불교의 부재로 인하여 대부분의 불자들은 기복으로 흐르고, 일부 불자들은 기복을 찾아 유명기도처를 찾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앉아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이다.
도시의 불자들이 헤매이고 있을 동안 스님들이 산중에 머물면서 도시의 불자들과 소통을 거부한 결과 도시는 이제 유일신교의 세상이 되었다. 일요일 오전 어디를 가나 교회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현상이 되었고,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전도의 대상이 되어 길거리를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이중적인 생활
한국불교가 이렇게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스님과 종단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서이다. 아니 ‘거부’ 하였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과 국민과 불자와 소통을 거부하면서도 세속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스님들의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진정으로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 한다면, 위성안테나도 없어야 하고 핸드폰도 갖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은 말할 나위도 없다.
TV를 보고, 핸드폰이나 인터넷과 같은 통신수단을 활용하는 생활을 하려거든 사람사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그런 기기를 이용하여 포교도 하고 설법자료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갖가지 통신수단을 활용하여 세속과 거의 같은 이중적인 생활을 누리지만 이를 활용한 포교수단으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만일 부처님당시의 포교제일 ‘부르나’ 존자가 현시대에 나타났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갖은 통신수단을 이용하여 매우 훌륭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3무(三無)현상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하는 이들이 하는 것중의 하나가 3무(三無)현상이다.3무현상이란 무엇일까.
3무현상은 ‘무사안일’ ‘무식’ ‘무위도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3무 현상으로 인하여 도시에서 불교를 찾아 볼 수 없고, 심지어 가상공간에서조차 스님들의 활약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국불교가 다시 예전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처럼 중흥 할 수 있을까.
이도흠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파괴 없는 창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썩은 살을 도려 내듯이 온갖 삿된 것을 쳐버리고 시스템을 개혁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나부터 개혁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썩은 부위가 너무 많다면 어떻게 될까. 도려내고 싶어도 도려 낼 수 없을 것이다. 또 허물어가는 집을 보수해서 다시 사용하고 싶어도 너무 낡아서 무너질 것 같다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처음부터 집을 다시 짓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아예 처음 부터 제로베이스로 시작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럴 경우 역사와 전통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할 필요도 없고, 기득권의 반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시도가 아마 초기불교의 도입에 관한 것이라 본다.
그래서 과거 1700년 역사의 전통은 그대로 놓아 유지하고, 사성제와 팔정도로 요약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른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 따라서 보수적인 스님과 보수적재가불자들은 1700년 전통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고, 진보적인 스님과 진보적인 재가불자들은 새로운 집을 지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집을 지어야할까
도시로 나와 보살행을 보여 주어야
한국의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보다 ‘공사상’과 ‘보살사상’에 기반한 ‘용수’의 가르침을 더 따르기 때문에 ‘무애’하고 자유분방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공사상에 따르면 그 어떤 진리도 ‘공한 것’이 되고, 심지어 ‘공조차 공한 것’이 되기 때문에 깨달은 선사들의 무애행을 볼 수 있는 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어렵지 않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스님들은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는 것 같다. 세속을 떠 났으면서도 세속인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그런 배경에는 ‘중생의 바다’에 ‘퐁당’빠져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사무애’와 같은 화엄사상도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깨달아 다시 나고 죽는 열반을 실현하기 보다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중생구제를 서원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라 성자가 되는 길을 거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유아견(有我見),법에 대한 의심, 계금취를 극복하여 성자의 흐름(예류자, 수다원)에 들게 되면 7생 이내에 열반하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세세생생윤회하려 한다면 유아견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유아견이 극복되지 않은 보살을 성문이나 연각승 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것도 초기불교의 교리로 보았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구나 지옥에 가서라도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 하는데, 지옥의 경우 너무 고통스럽고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된 곳이라 하는데 어떻게 남을 구제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까.
한국불교가 진정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려 한다면 산속에 살면서 세속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도시로 나와 보살행을 보여 주어야한다. 그래서 도시라는 바다에 ‘풍덩’빠져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살아가야 진정한 ‘무애행’과 보살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회통과 짬뽕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파사현정’을 이야기하고 ‘회통’을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썩을대로 썩어 죽기 일보직전의 사람이라면 수술을 하여도 가망이 없을 것이다. 설령 수술을 하여 썩은 부위를 도려 내고, 새로운 장기를 이식하는 조치를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시한부’인생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영광뿐인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와 위빠사나와 같은 새로운 수행법등을 접목하여 ‘환골탈태’하려 한다면 이를 좋게 말하면 회통이고 용광로이지만 , 좋지 않게 말하면 비빔밥, 잡탕, 섞어찌게가 될 것이다. 이미 대승불교와 선종, 밀교, 민속신앙등과 회통하고 있는 마당에 재료가 하나 더 추가 되는 ‘짬뽕’과 같은 음식이 되고 말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잘 보전하여 가면되고, 진보주의자는 이제 막 도입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른 새로운 불교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면 된다. 이것이 기독교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20년 후 성인이 되었을 때
세계사의 흐름은 서구의 기독교사상과 자본주으로 부터 이제 불교사상으로 ‘유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때의 불교는 과연 어떤 불교일까.
세계적인 석학과 구미지식인 불자들이 신봉하는 불교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대승보살사상이 아니라 연기법에 기반한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서양불교는 우리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어서 ‘역수입’되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니까야에 대한 영문판을 무수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이고, 이것이 또한 기독교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한국불교 포대기론’을 말한다. 포대기에 아기가 있어야 하나 한국불교에는 포대기만 있을 뿐 아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요즘 다행히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하게 되어 아기를 새로 데려온 것이나 다름 없다. 따라서 이 아기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야 한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 하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뿐인 1700년 전통은 보수주의 스님들과 보수적인 불자들에게 맡기고, 진보적스님들과 진보적 불자들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포대기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가 앞으로 20년 후 성인이 되었을 때 기존의 한국불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통의 한국불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201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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