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개념놀음’에서 해방되려면, 길희성교수의 궁극적 실재(Reality)로서 ‘그분’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15. 12:08

 

 

 

개념놀음에서 해방되려면, 길희성교수의 궁극적 실재(Reality)로서 그분

 

 

 

 

남의 글에 좀처럼 댓글을 달지 않는데, 어느 글을 보고서 로그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글은 초기불교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진보적신학자가 쓴 글을 어느 법우님이 올려 놓았는데. 이에 대한 나름대로 느낀 바를 적어 놓았다. 다음날 확인해 보니 그글은 내려져 있었다.

 

그들의 속내는

 

그 글의 제목은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건 우상숭배이다. 서강대 길희성교수가 작성한 글이다.

 

길희성교수는 불교를 잘 이해하는 진보적기독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여러 저서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보살예수일것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대승정신을 찬양한 책으로서 기독교에서도 이런 사상을 받아 들여 대승기독교가 되어야 하고, ‘보살예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대승불교의 덕목에 대하여 칭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가 불교를 연구한다고 하여 그의 신앙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글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대승불교의 장점을 받아 들여 기독교를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자는 취지의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은 진보적 신학자들의 친불교적 주장에 동조하거나 환호를 보내기도 한다.하지만 이는 매우 경계해야 될 사항이다.

 

 이른바 불교를 잘 안다는 진보적 기독교신학자들 대부분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와 불교의 접목을 시도하려고 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불교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신학자중에 오강남교수의 경우 참나와 하나님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강남대 이찬수교수의 경우 기독교와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중에 울산대 김진교수의 경우 초기불교의 무아와 윤회의 모순점을 주장하기 위하여 논문을 발표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하면서 불교에 귀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가 불교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불교를 연구한다고 볼 수 있다. 서강대 길희성교수의 글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들러러인가

 

길교수는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건 우상숭배라는 글에서 유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독점의 시대는 지나 갔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어야만 종교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만일 한 종교가 독점하게 되면 견제세력이 없기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소수의 종교가 공존하면서 종교간의 대화를 하며 종교다원화를 이루었을 때 종교가 건강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에서 성공은 결국 실패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회 전체가 기독교가 되었을 때 그 때는 아무도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타종교가 있음으로서 해서 기독교가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공존해야 하고 서로 견제해야 하는데, 이는 마치 기독교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불교와 기타 소수 종교가 들러리처럼 있어야 한다는 뉘앙스로 받아 들여진다.

 

유한한 인간이

 

이처럼 기독교의 들러리로서의 소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길교수는 우리사회가 기독교화로 인하여 독선적진리를 주장하는 등의 여러가지 병폐를 지적하고 있지만 종교다원주의자로서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리 자체 혹은 하느님 자신은 절대적이겠지만 인간의 진리 파악이나 하느님 이해는 유한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길희성교수,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건 우상숭배)

 

 

 

출처 :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건 우상.docx

 

 

 

 

 

 

 

 

 

이말은 무슨 뜻일까.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라도 그 종교가 말하는 진리에 대하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사유로서 진리나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고, 진리나 하나님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Reality)로서 그분

 

이처럼 불교를 잘 안다는 진보적신학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분은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궁극적 실재로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궁극적 실재(Reality)’로서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단지 진리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이긴 하지만 절대유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는다.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는 영원하고 절대적일지 모르나 그것을 추구하고 인식하는 종교들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는 역사의식과 진리 앞에서의 겸손한 자기성찰이다.”

(길희성교수,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건 우상숭배)

 

 

이는 궁극적 실재에 관한 것이다. 그 것이 진리라고 이름붙여진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하나님, 야훼, 이슬람의 알라, 대승불교의 진여, 불성, 참나, 본마음등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것은 다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있는 것에 대하여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있느니 없느니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처사라는 뉘앙스이다. 그래서 진리가 인격화한 야훼, 알라, 비로자나, 하느님등에 겸손하라는 말이다.

 

이는 철저하게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고 방식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 따르면 결국 야훼, 알라, 비로자나, 하느님이라고 이름지어지고 명칭이 붙여진 것은 궁극적 실재이자 만물의 근원을 인정하자는 말과 같고, 결국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미 1960년대도 있었다.

 

그때 당시 가톨릭에서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포괄주의로서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모를 뿐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견해이다.

 

결국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그분의 섭리하에 있기 때문에 지금 비록 다른 종교를 믿어도 그분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길희성교수가 생각하는 종교다원주의

 

길교수의 글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길교수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소수종교를 인정하는 듯 하지만 결국 그분의 섭리와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길교수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입장은 그의 또 다른 글에서 잘 드러난다.

 

 

종교다원주의는 그 종교들이 모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해 주는 매개체라고 봅니다. 이는 신 중심적(theocentric) 신앙입니다.”

(길희성교수-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

 

출처 :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길희성.docx

 

 

길희성교수는 하느님이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런 하느님을 믿는 자신은 종교다원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만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또 말한다.

 

 

저는 다른 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하나고, 한분 하느님을 믿고, 궁극적 실재는 하나라고 믿습니다. 평생 종교를 공부하다 보니 비슷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같은 것을 달리 이야기했을 거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길희성교수-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

 

 

그는 산을 올라가는 것에 비유하여 모든 종교는 하는님께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산에 올라가는 길이 여럿이듯이 종교 또한 여럿이 있을 수 있지만 정상에는 오로지 그분 한분만이 계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종교는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은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공부를 하여 보니 하느님 한분을 놓고 종교간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종교다원주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길교수가 생각하는 종교다원주의이다.

 

길교수는 종교다원주의자로서 불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듯 하지만 그의 본 마음에는 궁극적 실재로서 그분을 상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미 2,600년전에 이런 견해를 부수었다.

 

 

신이 없어도 인간은

 

종교도 발전한다고 한다. 불교TV사이트에서 김종욱교수는 가장 원초적인 종교는 샤머니즘이라고 하였다. 만물에 정령이 있어서 길흉화복을 주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정령신앙은 뿌리깊어서 오늘날까지 민중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정령신앙은 다신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다신주의는 신들의 패권경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신이 우세해지면 그 신을 믿는 것으로 통합된다. 이렇게 다신에서 유일신으로 발전하는 것이 종교에 있어서 필연적인 발전단계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신 단계 이후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신론이라 한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무신론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신론은 전세계적으로 확산추세에 있는데, 특히 교육수준이 높은 선진국에서 현저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영국이 가장 왕성한데, 무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영국에서 리처드 도킨스일 것이다. 그는 “신이 없어도 인간은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무신론의 원조는

 

하지만 무신론의 원조는 부처님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창조론에 대하여 비판하였는데, 원인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연기법으로서 창조론이 하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음을 설하였다.

 

그런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경에 실려 있다. 디가니까야의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Brahmajāla Sutta, D1)에 따르면 부처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62가지 견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중 영속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가해석가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해석을 수반하며

자신이 스스로 규명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디가니까야, 범망경-Brahmajāla Sutta, D1)

 

  범망경(Brahmajala Sutta).docx  범망경_Brahmajala Sutta_.pdf

 

 

 

영속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을 브라만이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주장은 갖가지 추론에 따른 견해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이 세상과 자아는 영원하다고 믿는 영속론자들이 기둥이나 산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를 연기법으로 설명하였는데, 연기법은 결국 원인과 결과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원인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고정되고 불변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개념놀음에서 해방되려면

 

만일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창조한 신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신은 누가 창조하였을까. 이렇게 소급하다 보면 결국 막히고 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을 그분이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인과법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고 천명하거나 어떤 변치 않는 궁극적 존재가 있다고 여기는 것, 또 몸은 무너져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추론으로 만들어 놓은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말씀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을 원인 없이 창조한 궁극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는가 하면, 그 궁극적인 실재의 섭리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고, 그 궁극적인 실재를 유한한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62가지 견해중의 하나에 포함된다. 이는 결국 실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실체도 없는 신을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후 거기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종속되면 어떻게 될까. 빠져나가도 싶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에 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처럼 걱정이 되고,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마치 남의 돈을 훔친 것처럼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들어가기는 쉬어도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어렸을 때 교회에서 믿다가 믿지 않으면 유황불에 빠져죽는다는 식의 노래가 있었는데, 이는 미션스쿨에 배정받아 다닐 때도 유사한 말을 많이 들었다. 이와 같은 협박성 설교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가슴에 커다란 멍에를 하나씩 안고 살아 가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지나지 않은 신에게 스스로 철저하게 종속당하고 그 종이 됨으로서 안정과 구원을 찾고자 하는데, 이는 개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념놀음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루빨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고정되고 영원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만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또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연기의 세계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이 부처님의 사성제와 팔정도인데, 부처님은 우리를 고통으로 해방시켜 주고 윤회를 종식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고, 동시에 단지 개념(paññatti, 빤냣띠)’으로만 존재하는 그 분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2011-06-15

진흙속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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