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애수행도 기도의 대상인가, ‘100일 소원성취 메타기도’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21. 11:28

 

 

자애수행도 기도의 대상인가, ‘100일 소원성취 메타기도를 보고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도와 불교, 어울리는 말일까. 기도와 기독교는 잘 매칭이 되지만, 기도와 불교는 어색하다. 마치 잘못된 만남처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초월적존재와의 대화이다. 그 존재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자신의 소원이 들어주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존재를 숭배하고 받들어 모셔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신과의 약속인데, 이를 신약이라 한다. 그 이전의 약속을 구약이라고 한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계약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기독교에서 기도는 지극히 자연스런 신앙행위이다.

 

하지만 창조주나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기도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부적절한행위라 볼 수 있다.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라 원인과 조건과 결과 즉, ‘인연과로 보는 불교에 있어서 기도는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행위로서, 결국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기도하는 행위는 한국불교가 신앙의 불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여래장사상계통의 불교로서 테라와다 전통의 법의 불교와 대비된다. 또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보살사상의 영향도 크게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여래장사상과 대승보살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을 신봉함으로서 유일신교에서 보는 것처럼 기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여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따라하기인가

 

한국불교에서 불과 몇 십년전까지만 해도 기도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 대신 불공(佛供)’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절에 갈 때 불공드리러 간다고 말하지 기도하러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절의 거의 대부분은 기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불교의 총본산이라는 조계사의 월간 일정계획표에서도 나타난다. 홈페이지를 보면 신중철야기도’ ‘약사기도순례’ ‘초삼일및 신중기도회향등에서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물론 관음재일법회, 미타재일법회등이 있어서 법회라는 말을 일부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한국불교의 1번지에서 조차 유일신교에서나 사용하는 기도라는 용어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불교 1번지라는 봉은사는 어떨까. 봉은사 홈페이지를 보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행안내 게시판을 보면 기도와 천도재일색인데, 그 중에 기도불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기도나 불공이나 같은 의미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목적은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불보살의 가피력을 입고자 기도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조계사와 봉은사가 이런 정도라면 지방의 사찰은 말할 것도 없다. 거의 대부분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관음재일도 관음재일기도가 되고, 지장재일도 지장재일기도가 된다. 어느 유명사찰은 우란분재도 기도라고 말한다. 실제로 스님들은 기도라는 말을 즐겨사용한다. 그래서 항상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불공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불공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왠지 촌스럽고 낡아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것일까. 그러는 반면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무언가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고 근사해보이고 시대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기도는 불교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고, 더욱 더 문제되는 것은 기도라는 용어는 기독교따라하기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공이란 무엇일까.

 

불공의 의미는

 

불공의 원어는 빠알리어로  ‘붓다 뿌자(Buddha-pūjā)’라 한다. 이런 불공의 사전적 의미는 “부처나 보살에게 음식·향·꽃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는 의례, 또는 그것을 바치며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의례”를 말하지만, 더 깊은 뜻은 ()·법()·승() 3보를 찬탄하고 예배하는 것이고,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기도는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 이기적인 기도의 절정은 아마도 댓가성 보시일 것이다. 무언가 댓가를 바라고 보시하는 것이다.

 

대학입시합격기도, 공개입찰성공기도등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처럼 바라는 기도는 공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에게 정치헌금을 주고, 그 정치인이 권력을 잡았을 때 한자리를 기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길거리에서 거지에게 적선하는 무종교인보다 못한것이 바라는 기도행위라고 하였다.

 

100일 소원성취 메타기도

 

그런데 바라는 기도가 기존 한국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소위 초기불교를 지향한다는 어느 인터넷카페에서 메타기도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빠알리어 멧따(metta)’와 기도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메타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정식명칭은 ‘100일 소원성취 메타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도에 어떤 내용이 실려있을까. 100일 회향자중의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저는 100일 소원성취기도 시작하여 100일 되기 전 84일째,90일째 소원성취했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미국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기도는 한미디로 "! 이렇게 하는거구나!" 알게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기적, 대박이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한치의 오차 없는 철저한 수행지도로  이끌어낸 정신과 물질 현상의 과학입니다. 과학의 특성은 같은 과정을 그대로 밟으면 누가해도 같은 결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번 기도로 저는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기쁨! 같은 과정을 밟으면 같은 결과를 낸다는 것은' 인과법칙'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소원성취의 공개된 비밀! 그 중의 하나는 메따입니다. 이제 우리와 함께 지역메따 (이 화면 왼쪽  메따-꾸띠 (서울, 경기)에 들어오셔서  메따를 시작합시다. 소원성취하고 싶으신 분은! 이 길을 보여주신 OOO스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여러분 모두 소원성취로 기쁘고, 행복하고, 안전하시길 메따 합니다.

100 소원성취 메따기도 수행자, 회향

 

 

 

 

 

 

 

 

사진 ; http://www.blessindiaonline.com/wp-content/uploads/2010/09/prayer3.jpg

 

 

 

 

100일 소원성취기도를 하였는데, 아들이 원하는 미국의 대학에 합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메타기도라는 것이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바꿀 수 있는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인과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기도하면 소원성취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메타란 무엇일까.

 

멧따(metta)란 무엇일까

 

멧따(metta)는 빠알리어 용어이다. 초기경전에 수 없이 나오는 용어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사상이 있다면,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 이에 필적할 만한 사상이 멧따이다. 그런 멧따는 우리나라에서 자애로 번역된다.

 

또 멧따는 까루나(연민), 무디따(더불어 기뻐함), 우뻬카(평온)와 함께 네가지 거룩한 마음(사무량심)’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런 멧따가 어떻게 기도대상이 될 수 있을까.

 

멧따는 한 마디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Sukhino vā khemino hontu                             수키노 와- 케미노 혼뚜
sabbe satt
ā bhavantu sukhitattā: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참으로 행복하고 안은하기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숫따니빠따의 멧따경(Karaniya Metta Sutta,자애경) 3번 게송>

 

자애경_빠알리어_101213_진흙속의연꽃.docx

자애경_빠알리어_101213_진흙속의연꽃.pdf

 

 

 

부처님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실려 있는 숫따니파타의 까라니야멧따경 (Karaniya Metta Sutta)’에 실려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어머니가 하나 뿐인 자식을 대하듯 모든 중생에게 막힘 없는 자애를 베풀 것을 강조하였다.

 

자애수행(Metta Bhavana Meditation)

 

이런 멧따는 초기불교에서 중요한 수행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중의 하나가 자애수행(Metta Bhavana Meditation)’인데, 청정도론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자애수행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해 놓았는데, 다섯가지 제한없이 가득채운 자애와 일곱가지 한정적으로 가득채운 자애와 열가지 모든 방향으로 가득채운 자애를 방사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때마다 항상

 

 

원한이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근심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하고 바라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초월적대상이나 절대자는 보이지 않는다. 자기자신 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곳에서 부터 먼 곳까지, 가까운 사람부터 인연없는 중생들까지 사방 팔방 십방으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일까.

 

소원성취100일 메타기도에서 기도의 제목처럼 소원성취를 하기 위하여 멧따를 하는 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한테 기도한다는 말인가. 내가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자애를 방사하는데, 이를 소원성취하기 위하여 방사한다는 말인가.

 

멧따경의 그 어디에도 소원성취를 하기 위하여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말이 없다. 또 주석서인 청정도론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대체 메타기도는 어떤 경전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자애수행의 이익은

 

청정도론에서 자애수행은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자심해탈 (慈心解脫)’이라고 하는데,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하여 얻는 이익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초기경전에서도 언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발전시키고, 연마하고, 수레로 삼고, 근본으로 삼고, 굳건히 주함으로써 열한 가지 이익을 얻는다. 무엇이 열한 가지인가?

 

- 편안하게 잠이 들고

- 편안하게 잠에서 깨어난다.

- 악몽을 꾸지 않는다.

-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 사람 이외 것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 신들이 보호한다.

- 불이나, 독이나, 무기가 해치지 못한다.

- 쉽게 마음집중을 할 수 있다.

- 안색이 밝다.

- 죽을 때 혼미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죽는다.

-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브라흐마 세계에서 태어난다.

 

이와 같이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을 발전시키고, 연마하고, 수레로 삼고, 근본으로 삼고, 굳건히 주함으로써 열한가지 이익을 얻는다.

 

(앙굿따라 니까야 11 16, Metta (Mettanisamsa) Sutta)

 

 

자애수행을 하면서 얻는 이익에 대하여 부처님은 위와 같이 열 한가지로 정리하여 말씀 하셨다. 그런데 자애수행이 아니라 메타기도를 함으로서 해서, 그것도 소원성취 기도를 함으로해서 얻는 이익이 자식의 대학입시합격이나 공개입찰성공등을 바란다면 대체 절에서 100일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통불교(通佛敎)와 회통사상

 

이처럼 초기불교를 전법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내용을 보면 기복신앙의 그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를 회통하는 개념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를 통불교(通佛敎)’라고 말한다. 이는 어느 한 종파에 국한하지 않고 불교 전체에 통하는 교리를 뜻한다. 그러다 보니 대승불교에서 부터 밀교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들어온 온 갖 불교사상이 통불교라는 이름아래 녹아들어가 있다.

 

한국불교에서 사용하는 또 하나의 용어가 회통(會通)’이다. 회통이란 어떤 뜻일까. 이는 회석(會釋)’이라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다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하여 조화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회통은 원효사상의 근간이다. 그런데 통불교나 회통사상이나 모두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이런 통불교는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과도 다른 것이고, 테라와다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는 남방불교국가와 다른 것으로서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불교에는 대승에서 부터 밀교까지 다양한 불교를 맛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전이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천수경이다.

 

통불교의 표본, 천수경

 

천수경을 보면 부처님의 말씀 부터 중국의 역대조사스님의 말씀까지 좋은 말은 모두 모아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각종 진언이나 다라니도 수 없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밀교가 유입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밀교중에 가장 압권이 신묘장구대다라니’일 것이다. 다라니나 진언은 원래 해석하면 안된다고 하여 단지 독송하는 것으로 교육받았으나, 인터넷 시대를 맞이 하여 여러 해석본이 나돌아 다니고 있다. 그렇다면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어떤 내용일까.

 

신빙성있는 논문자료에 따르면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청경존의 이타행을 찬탄하는 것이라 한다. 천수경에서 니라간타로 표시되는 청경은 원래 닐라칸타로케스바라(Nīlakaṇṭha Lokeśvara)’의 한역으로서 우리말로 다시 풀이하면 푸른목을 가진 세자재(世自在)’로 표현된다.

 

어원을 보면 닐라칸타(nīlakaṇṭha)에서 닐라 (Nīla)푸루다라는 뜻이고, 칸타(kaṇṭha)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닐라칸타는 푸른목을 뜻하게 되고, 이를 한자어로 표시하면 청경(靑頸)’이 된다. 이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다른 말로 니라간타다라니라고도 한다. 그런데 왜 푸른 목을 가지게 되었을까.

 

인도신화인  라마야나(Rāmāyaa)와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에 따르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śiva’가 등장하여 기꺼이 독을 마셨는데, 그 결과 푸른 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푸른 목을 가진 니라간타는 자비의 화신이고, 그 만이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푸른 목을 가지게 된 니라간타를 기억하면서 그의 자비와 보살행을 찬탄하는 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것이다.

 

천수다라니의 인도신화학적 고찰.hwp

 

 

초기불교도 회통의 대상?

 

천수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불교는 대승에서 밀교까지 심지어 힌두교의 신격까지 모두 회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통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는 불공이라는 아름다운 말 대신 유일신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기도라는 용어를 최근 몇십년전 부터 적용하였고, 이제 초기불교의 수행방법중의 하나인 멧따수행을 소원성취기도와 합쳐서 메타기도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특징은 모든 사상을 통불교라는 이름으로 통섭하고 회통하게 함으로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불교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는데, 최근 초기불교 또한 회통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하다.

 

이는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테라와다 불교의 장점을 받아 들여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해 보겠다는 것인데. 이도흠교수의 “간화선을 종지로 하되, 상좌불교의 교리, 계율, 위빠사나의 수행법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양자를 종합한 것을 21세기 한국 불교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도흠교수, 한국 불교 비판 및 나아갈 길) “는 말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어느 테라와다 전법사이트에서는 부처님의 진정성찾기회통하지 않음을 기치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만일 테라와다 불교와 한국의 통불교가 회통하게 된다면 정체성을 잃은 것은 명약관화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런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초기불교모임에서

 

댓글을 남겨 주신 어느 법우님은 초기불교모임에 대한 글을 보여 주었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기대하고 갔었는데, 반야심경 독송부터 하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하였다고 한다. 또 어떤 곳은 신묘장구대다라니독송을 보고 염오가 치밀어 올랐다고 써 놓기도 하였다.

 

대승불교가 탄생한 요인중의 하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불완전한 것으로 본것이다. 그래서 부족한 면을 보충하기 위하여 대승보살사상공사상을 만들었는데.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대표적인 경이 반야심경일 것이다.

 

이처럼 반야심경에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12연기등의 핵심가르침을 공이라는 논리로 모조리 부정하였는데, 초기불교모임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한 것은 모임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음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초기불교에서는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니라간타와 같은 청경존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원인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인없이 존재하는 자재천은 모든 곳, 모든 경우,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면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청경세자재(Nīlakaṇṭha Lokeśvara)’는 틀린말이 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원인의 배후에 다른 짓는 자(kāraka)’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초월적존재나 자재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묘장구대다라니독송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양복입고 갓을 쓴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 또는 테라와다불교는 한국불교와 회통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공부한다는 것이 양복입고 갓을 쓴 것처럼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에 메타기도도 포함될 것이다.

 

 

 

2011-06-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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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다라니의 인도신화학적 고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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