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공덕이 되는 보시, 하나마나한 보시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25. 15:52

 

 

공덕이 되는 보시, 하나마나한 보시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노인에서 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신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 또한 전철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전철을 타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있거나 젊은층의 경우 열심히 스마트폰에 시선을 떼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처럼 서로 모르는 전철에서 분위기가 깨질 때가 있다.

 

전철에서 분위기가 깨질 때

 

보통 세가지의 경우인데, 하나는 선교사이고 또 하나는 장사치이고, 또하나는 걸인이다. 세가지 경우 모두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에 바쁘다.

 

특히 개신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의 경우 마치 자신의 안방인양 큰 소리로 떠드는데, 어떤 경우 훈계조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럴때 심리적 반발감이 일어나지만 누구하나 나서서 제지하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하면서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장사하는 사람은 그래도 마음속으로 수용할만 하다. 비록 불량품이라는 의심이 들긴 하지만 생활에 요긴한 물건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인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시선을 피하기 바쁘다. 대부분 초라한 행색에 불쌍하게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대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런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을 쳐다 보는 것 자체도 괴로움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어서 저 걸인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돈을 건네기도 하고 물건을 사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하고 관계없는 일로 여겨서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당당한 걸인

 

그런데 어떤 걸인은 좀 달랐다. 이제까지 보던 걸인들과 달리 매우 당당한 모습이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서 동정심을 유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적선하세요. 적선하셔서 국회의원님도 되시고 장관님도 되시고 사장님도 되세요!”

 

 

이렇게 말하는 걸인은 처음 보았다. 책에서 인도의 걸인이 매우 당당하게 적선할 것을 요청하였다는 글은 보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걸인을 본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자신에게 적선하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될 것이라 하니 시시하게 대학입시나 입찰성공기도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한다. 모두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를 받아 줄 대상이 있는 곳에 헌금을 한다든가 보시를 함으로서 기도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기도는 반드시 교회나 절에 가서 함께 해야 기도발이 잘 서고, 또 돈을 많이 내야 약발이 있다고 가르치거나 믿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잘나가는 교회는 일요일 주차요원까지 등장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관음성지와 같은 유명기도처는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기도객으로 인하여 만원을 이룬다. 그런 기도의 내용은 한결같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것이어서 한마디로 말하면 나와 나의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겠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 된다.

 

빠빠행과 뿐냐행

 

이와같이 이기적인 기도를 빠알리어로 ‘빠빠(Pāpa)행’이라 한다. 이는 댓가를 바라며 보상을 원하는 행위이다. 반면에 공덕이 되는 행이 있다. 그것을 빠알리어로 뿐냐(Puñña)이라고 한다.

 

빠빠행과 뿐냐행의 차이는 헌금이나 보시를 하되 댓가나 보상을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바라지 않은 것인지의 차이다. 댓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선행으로 보시한다면 공덕을 쌓게 되어 천국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준은 무었일까.

 

전철에서 걸인을 보았을 때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저 걸인이 어서 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시를 하였다면 이는 선행으로서 공덕을 쌓은 행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걸인이 자신에게 적선하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사장이 된다고 말을 하여 그 말을 믿고 보시하였다면 이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댓가나 보상을 바라고 돈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인에게 정치후원금을 내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마찬가지로 종교단체에 헌금이나 보시를 할 때 대학입시에서 합격하기를 바라서 거금을 낸다든가 하는 행위 역시 정치헌금을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최상의 보시는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커다란 과보를 가져오거나 최상의 보시는 어떤 것일까. 불자라면 경전에 근거한 보시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얻은 것을 기꺼이 보시하면

그 보시는 커다란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하네.

 

탐욕을 떠난 사람이 탐욕을 떠난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얻은 것을 기꺼이 보시하면

그 보시는 이 세상의 보시 중 최상의 보시라고 나는 말하네

(맛지마니까야:142  닥키나위방가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커다른 과보를 가져 오는 보시에 대하여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 역시 계행을 지키는 사람에게 정당하게 얻은 것을 댓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종교인이 걸인에게 아무 댓가없이 돈을 주는 행위는 착한것임에 틀림 없지만, 그 보다 오계를 지키는 불자가 계를 잘 지키는 비구에게  음식, , 거처, 의약품등 네 가지 필수품을 보시 하였을 때 걸인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비할 수 없이 커다란 과보를 가져 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때 반드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클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최상의 보시란 탐욕을 떠난자가 역시 탐욕을 떠난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탐욕을 떠났다라는 말은 무엇일까.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10가지 족쇄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은 다름아닌 탐욕과 같은 것으로서 사다함이 되면 옅어지고, 아나함이 되어야 완전히 소멸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탐욕을 떠난 자는 다름아닌 아나함과 아라한의 경지에 있는 성자이다. 그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크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정당하게 얻은 것을 성자에게 음식, , 거처, 의약품등 네 가지 필수품등으로 보시 하였을 때 최상의 보시라고 하였다. 하지만 현대는 돈으로 보시한다.

 

스리랑카에서는 왜 불전함이 없을까

 

절에 가면 불전함을 볼 수 있다. 때로 복전함이라고 써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절에만 복전함이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이번 중국여행에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절에서는 불전함이라는 말 대신 어느 절이나 공덕함이라고 표시 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불상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불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사찰의 불상

불상앞에 공덕함이 있다

 

 

 

 

 

 

스리랑카 사찰의 불상

불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2006년 스리랑카 삼보디사의 웨삭데이를 촬영한 악깍까소(Akakkaso)비구의 여러 사진에서 불전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 계율을 중시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은 금과 은을 받지 않는다는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어서라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보시품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네 가지 필수품이라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이처럼 초기경에서 청정한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최상의 보시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수행자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이상적인 수행자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테리가타 , 로히니 비구니,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로히니가 상가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사문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금과 은을 지니지 않고 그날 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일 사문이 탁발을 나가지 않고 저장된 음식물을 조리해서 먹는다거나 금과 은을 지녀 생활을 유지한다면 존경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축적하는 순간 타락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수행자는 음식이든 재물이든 축적하는 순간 타락한다고 볼 수 있다. 고인물이 썩는다고 재물이 축적되어 있으면 썩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또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만일 금과 은이 허용된다면 그들에게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함께 허용될 것입니다. 만일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이 허용된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사문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며, 사꺄 아들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42  가마니상윳따,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단호하게 금과 은이 허용된다면 다섯가지 감각적 욕망도 허용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음식과 재물을 축적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식욕, 성욕, 재물욕, 안락욕, 명예욕등 다섯가지 욕망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감각적 욕망이 허용 된다면 결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사캬의 아들(佛子)’이 아니라고 하였다.

 

노후보장용 사설암자갖기

 

오늘 날 종교인들은 많이 축적해 놓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안한 미래를 위하여  또 노후를 위하여 재산을 축적하는데, 스님들의 경우 어느 누구나 사설암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노후보장용 사암을 갖고자 하는 것은 세속을  사는 속인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청정하지 못한자에게 보시하면 공덕이 있을까. 더구나 청정하지 못한 자가 청정하지 못한 자에게 보시하였을 때 그 효과가 있을까.

 

초기경에서 계행을 지키지 않은 자가 역시 계행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도 없이 바르지 못하게 얻은 것을 보시하였을 때 아무 공덕도 있을 수 없는 최악의 보시라고 하였다.

 

보시공덕이 되는 경우

 

최악의 보시와 최상의 보시의 차이는 무엇일까. 경을 보면 계행과보에 대한 믿음바르게 얻은 것기꺼이 보시하는 것이렇게 네 가지 조건이 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조합되면 모두 24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다음표와 같이 네가지 조건을 설명하고 있다.

 

 

 

구 분

계행

과보에 대한 믿음

바르게 얻은 것

기꺼이 보시하는 것

보시공덕

보시자

받는자

최상의 보시

청정

청정

YES

YES

YES

보시 공덕있음

최악의 보시

불청정

불청정

NO

NO

NO

보시공덕없음

보시자가

청정함

청정

불청정

YES

YES

YES

보시 공덕있음

받는자가

청정함

불청정

청정

NO

NO

NO

보시 공덕있음

 

출처 : 맛지마니까야:142  닥키나위방가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크게 네가지로 나누어 보면 최상의 보시는 모두 보시자와 대상자가 모두 청정하고, 최악의 경우 모두 청정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시자가 청정하고 대상자가 청정하지 않은 경우 경에서는 보시하는 사람의 계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라고하였다. 이는 보시공덕이 있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설령 대상자가 청정한줄 모르고 보시하였다고 할지라도 다음번에 그에게 보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보시자가 청정하지 않고 반면에 대상자가 청정한 경우이다.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받는 사람의 계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라고 하였다. 이는 보시를 받는자가 청정하면 주는자가 계행이 없다고 할지라도 보시공덕이 있는 것으로 본다. 비록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청정한 자에게 주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면 다시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보시란?

 

이렇게 보았을 때 결국 보시는 계행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가는 거지에게 돈을 주었을 때 청정한 마음으로 주었다면 공덕이 되는 행위이지만, 걸인에게 돈을 주면서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청정하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 공덕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불자들이 계행도 지키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크다는 믿음도 없이 역시 계행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마지 못하여 보시하였다면 하나마나한보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계행도 지키지 않은 종교인에게 하나마나한 보시를 하여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201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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